‘카니발 페다고지’, 국지적으로 실천하는 예술교육-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원정기

           ‘카니발 페다고지’, 국지적으로 실천하는 예술교육
              –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원정기 
                          
  
                                                                    글 l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 3월 6일부터 9일까지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포르투갈 리스본에 다녀왔다. 과거 아메리카 대륙을 호령했던 제국의 수도 리스본의 풍경은 뭐랄까, 제국의 도시답지 않게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카스텔로’나 ‘신트라’ 성, 그리고 도심의 오랜 건축물들은 과거 영광의 유산들이면서 동시에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난 리스본 현재의 감정을 고스란히 발산한다. 권위롭긴 하되 귀품스럽지 않은 풍경들, 제국의 스펙터클보다는 중세의 영광의 흔적이 느껴지는 리스본은 아마도 과거의 이미지였다기보다는 오늘의 소박한 도시 리스본의 일상의 거울에 투사된 모습이다. 일상 속의 문화유산, 튀지 않지만 유서 깊음이 느껴지는 거리들, 시각적인 편안함을 갖게 해주는 건축물들, 그리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인심 좋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표정들, 이런 것들을 위해 예술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예술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100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 내가 스케치한 풍경은 네 가지이다. 첫째 예술교육에 대한 참가자들의 인식과 이해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부족했다는 점, 둘째 예술교육 개념의 나이브한 인식 하에서도 현실의 벽에 도전하는 현장실천적인 전문가들이 존재한다는 점, 셋째 예술교육의 국가별, 지역별, 영역별 차이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논의할 토픽들이 많다는 점, 마지막으로 변방으로만 여겨졌던 한국의 예술교육 정책이 국지적인 대안 사례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예술교육 대회를 스케치한 서로 다른 네 가지 풍경은 각기 다른 문제의식과 해결 과제들을 갖고 있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예술교육의 궁극적인 좌표와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국지적인 네트워크의 활성화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네 장의 스케치, 그 뒤의 풍경들

 

국제단체의 모든 세계대회의 개막식과 플레너리 세션이 크게 다르지 않듯이 형식적인 인사말과 예술교육의 현황을 설명하는 의전행사와 대표성 발표들은 별다른 영양가가 없었다. 참가한 전문가들이 공히 체감했겠지만, 예술교육의 정의와 효과에 대해 나이브하고 보편적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발제문이 공유하고 있는 가설들은 사람들을 내내 지겹게 만들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예술교육에 대한 각자의 감수성과 스타일, 그리고 정치적 입장에 대해 인식의 공유가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예술교육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창의성”과 “상상력”이 듣는 이들에게 전혀 창의적이지도 상상력을 유발하지도 않게 언급이 되었다면 왜 이런 반응이 나왔는지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모든 발제자들이 언급한 ‘창의성’과 ‘상상력’은 어떤 의문의 여지없이 예술교육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문제는 이 용어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이 용어를 말하는 방식에 있지 않았나 싶다. 세상에 창의성과 상상력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전제가 문제의 발단이 된다. 발표자들은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이 개념들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의 이입 없이 대단히 무미건조하고 자명하게 사용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사용된 이 개념들, 그리고 사전적인 의미를 되풀이하는 설명들이 과연 감동적일 수 있었을까? 발제자들은 대게 창의력과 상상력에 붙는 동사들로 ‘개발하고’, ‘증진하고’, ‘활성화하고’를 사용한다. 창의력을 개발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상상력을 증진한다는 것은 또 뭔 말인가? 사실 창의력 증진이야 ‘웅진싱크빅’이 탁월하게 잘하고, ‘상상력 증진’이야말로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원더풀하게 잘하는데, 예술교육의 진정한 창의성과 상상력은?


탈규제적, 탈산업적 경제론자들. 혹은 글로벌 콘텐츠 기업가들에 의해 개발된 창의성은 사실 예술적 창의성 그 자체의 힘을 강조하기 보다는 사회운영원리를 혁신하기 위한 수단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사회발전원리로서 창의성은 창의적으로 살아라, 창의적으로 돈을 벌어라, 창의적으로 콘텐츠를 개발하라는 등의 보이지 않는 경쟁논리를 갖고 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창의성과 상상력은 현실을 부정하고 제도를 혁파하며 일상에서 제 스타일대로 살 것을 주문하는 자유로운 삶의 강령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개발하고’ ‘증진하는’ 것은 사실 예술교육의 실천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며, 일종의 정책적인 언어에 국한되는 말이다. 창의성과 상상력은 또한 예술교육의 지식교육이나 과학교육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미학적 가치이면서도 예술교육을 특권화하게나 절대시하는 권위적인 가치도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에 창의성과 상상력은 개발되거나 증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문화적 감수성과 문화적 취향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자생적인 정념(affect)을 말한다.

 

플레너리 세션에서 발표한 발표자들의 예술교육에 대한 견해들이 진부했던 것은 사회의 변화와 지식과 학문을 분화를 대단히 이분화 시켜 설명했다는 점이다. 가령 예술교육을 과학과 단순 대비하는 경우라든지, 예술교육의 출현 배경을 산업사회와 탈산업사화로 이분화해서 설명하는 경우들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탈주하려는 예술교육의 본래 의미와 전제부터 어긋나 있어 보였다. 사실 이런 식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은 설명이나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현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카니발, 페다고지의 변형적 실천


예술교육 현장의 실천적인 고민들이 대회 기간 내내 간간히 논의되긴 했지만, 논의의 중심 주제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유네스코의 중립적인 예술교육 개념과 긴장감 없는 발언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는 예술교육의 현장의 실천에 대한 고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중 3월 8일에 위기사회를 위한 예술교육의 실천과 전망에 대해 발표한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다니 린더세이(Dani Lindersay) 박사의 발언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그가 말하는 예술교육은 페다고지의 변형적 실천으로서, ‘카니발적 페다고지’의 의미를 생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카니발 페다고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맥락을 요약해 보면, 예술교육의 사회적 실천을 즐겁고 재미있게 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카니발적인 예술교육은 자본과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참여와 쾌락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교육이 사회의 부패, 범죄, 빈곤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교화와 훈육의 차원을 넘어서는 감성적인 공유일 것이며, 이는 글로벌 시대 지역의 시민들의 문화주권을 강화하는 것과 연계될 수 있다. 다니 린더세이 박사가 언급한 카니발적인 예술교육은 카니발리즘이 페다고지나 인간개발론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지향점이자 이념이 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예술교육의 개념에 현황에 대한 진부한 설명과는 달리 실제 국가별, 장르별, 권역별 현장은 서로 다른 생각과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사례발표 자리나 질의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나기도 했다. 예술교육을 설명하는 발표자들은 서로 다른 층위들을 말한다. 가령 유럽 선진 국가들이 언급하는 예술교육은 특성화된 사례들과 시민들의 문화향수권 신장이라는 차원에서 중시되는 반면, 저개발 국가들의 예술교육은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의 희망으로 설명되며 개발도상국들이 말하는 예술교육은 대체로 공교육에서 실시하고 있는 예능수업 혹은 아티스트 교육에 집중한다. 그래서 논의과정에는 시민들의 문화향수권으로서 예술교육인지, 공교육 내 예술교과수업으로서 예술교육인지, 아티스트 양성으로서 예술교육인지가 구분되지 않고 논의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예술교육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NGO 그룹들 간의 연대가 적극 모색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국제음악교육협회'(ISME), ‘국제연극교육협회'(IDEA), ‘국제미술교육협회'(INSEA) 회장단들은 예술교육 세계총회가 열리기 이전에 모여 예술교육의 통합적 교육실천을 위해서 공동의 워크샾과 인적교류, 학술교류를 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개막식에 발표함으로써 참가자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국제연극교육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댄 베런 코헨(Dan Baren Cohen)이 발표한 선언문은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NGO 간 예술교육의 구체적인 통합 교육과정과 통합 주제들을 설정하고 고민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둘 수 있었고, 이들 단체들의 워크샾과 공동토론들이 서로 다양한 장르와 의견을 가지고 있는 참가자들의 의견수렴을 하는 데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국제연대와 네트워킹의 상상들


유네스코에서 제시한 로드맵의 구체적인 토픽이 3월 7일에 발표되었는데, 로드맵의 항목에 대한 많은 참가자들의 의견개진이 있었다. 학교교육을 넘어서는 예술교육, 디지털 뉴테크놀러지에 대한 예술교육의 관심, NGO 그룹의 협력과 파트너쉽 강조, 문화환경의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과 대응, 예술교육으로서 체육교육 질적 향상의  중요성, 서양 중심적인 예술교육 아젠다 비판 등의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그러나 로드맵에서 제시하고 있는 목적이나 개념들, 구체적 전략에 대한 기본 방향이 제대로 논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없었다. 로드맵 문건에서 제시하는 문화적 참여로서의 인권향상, 문화다양성 표현 증진, 개인능력의 개발, 교육의 질 향상과 같은 목적들이 제대로 설정되고 있는지를 개별 워크샾이나 플레너리 세션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대회 프로그램들은 사실상 로드맵 작성을 위한 세부 토론이었다기보다는 별개의 논의 주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적어도 개념과 전략에 있어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감각이 반영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들만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특히 예술교육의 권역별 격차를 해소하는 공동의 노력이나 국지적 예술교육의 교류에 대한 로드맵들은 생산적으로 도출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로드맵 작성 시간에서나 국가 간 예술교육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나 마지막 플레너리 세션에서나 한국의 예술교육 정책과 교육사례들이 국제적인 대안으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예술교육의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이 지난 몇 년 사이 적극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많은 재정을 투여해서 제도와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과정은 역시 ‘다이나믹 코리아’로 부르기에 충분한 급성장의 사례가 되었다.

 


예술교육 세계대회가 끝나갈 즈음 한국이 차기 대회 개최지로 선정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예술교육의 국제적 연대에 대한 많은 시도들이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국가들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회의보다는 국가 대 국가, 도시 대 도시가 직접 만나서 함께 다양한 예술교육의 국제 연대와 네트워크의 사례들을 많이 만들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카니발적 페다고지로서의 예술교육의 국제연대와 네트워크라는 생각이 대회 내내 머릿속에서 그려지기도 했다. 서울과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서울과 자메이카의 킹스턴이, 서울과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로가, 서울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이 함께 만나서 서로의 문화다양성의 경험을 공유하는 국제적 연대활동을 통해 카니발적인 예술교육의 사례를 많이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의 강사풀제, 사회문화예술교육, 학교-지역 간 연계교육, 전국문예회관 교육 등 제도로 강제하는 예술교육을 넘어서 일상의 자유로운 삶에서 나오는 카니발적인 예술교육이 이러한 국지적 실천 사례를 통해서 한국의 교육을 바꾸는 실마리를 제공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P.S.

3월 8일 저녁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 만난 벤피카와 리버풀 경기를 보기위해 일정을 취소하고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로비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전반 40여분 쯤, 벤피카의 포워드 시망 사브로사의 중거리 슛이 터지는 순간, 평소에 리버풀 서포터즈였던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리스본은 연고로 하는 벤피카는 지난 10여 년간 하락세를 면치 못하다가 작년 리그 우승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 예선에서 맨체스터를 물리치고 16강에 진출하더니 급기야는 작년 우승팀 리버풀을 연파했다. 리스본에서 벤피카와 리버풀의 경기를 리버풀 서포터즈인 한국인 내가 경기를 시청한 것에 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글로벌한 문화의 위용을 절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승리를 만끽하는 리스본 시민들에게서 국지적인 일상의 소중함으로 발견한다. 그리고 평상시 소박한 리스본 시민들의 카니발적인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2003년 챔피언스리그에서 FC 포르투갈이 우승했을 때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 시민들의 광란의 축제를 TV를 통해 목격한 바 있다. 2002년 광화문이 생각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예술교육도 이러한 리스본 대중들의 일상적 카니발을 위한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오버한 말일까?

                                                                  


     –문화예술교육, 세계적인 교류의 물꼬를 트다- 2006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창의성과 사회적 인식, 소통능력이 살아있는 예술교육을 꿈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