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과 사회적 인식 소통능력이 살아있는 문화예술교육을 꿈꾸다’-리스본에서 만난 문화예술교육의 키워드들

‘창의성과 사회적 인식 소통능력이 살아있는 문화예술교육을 꿈꾸다’-리스본에서 만난 문화예술교육의 키워드들

 

 

‘창의성과 사회적 인식 소통능력이 살아있는 문화예술교육을 꿈꾸다’
리스본에서 만난 문화예술교육의 키워드들

                                                       글 l 정현선 (경인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예술교육 세계대회의 다음 개최지는 한국입니다. 포르투갈에서 한국까지, 리스본에서 서울까지, 세계 각국의 상상력과 고민이 도시와 도시를 잇고 국경과 국경을 넘어 행복한 협주곡을 만들어내길 기대해봅니다.  ㅣ 편집자주


 

유네스코 문화국이 주최하고 포르투갈 정부가 주관해 리스본에서 열린 세계예술교육대회에, 지난 2006년 3월 6일-9일까지 4일간 참여하고 돌아왔다. ’21세기를 위한 창의적 능력 수립’을 주제로 열린 이번 세계대회는, 지난 2000년에 유네스코가 수립한 ‘모든 이를 위한 교육(Education for All)’과 ‘문화 다양성 프로그램’의 틀을 기반으로 기획된 것으로, 그 방향에 있어 ‘예술 자체의 교육(Education in Art)’보다는 ‘예술을 통한 교육(Education through Art)’, 즉 예술을 통한 창의성 신장과 사회적 인식 및 소통 능력 향상에 초점을 두어 진행되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차기 세계대회를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문화관광부와 교육인적자원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민간전문가로 대표단을 구성해 참가했는데, 필자는 이 대표단에 민간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번 대회에서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창의성과 문화다양성을 핵심어로 하는 예술교육의 철학과 목표는 무엇으로 설정해야 하며, 이는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커리큘럼, 이에 대한 연구와 평가, 교사교육 등에 의해 어떻게 뒷받침될 수 있는가를 이론과 실제의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시사점을 찾는 일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분야에서 지난 몇 년간 정부 차원의 다양한 지원 사업들이 있어왔고,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다양한 분야의 우수 사례가 발굴되어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말이 낯선 용어는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교육’ 앞에 접두어처럼 붙어 있는 ‘문화’의 함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충분히 합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취지에 적합한 실천과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적잖은 의문이 제기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교육’의 의미를 예술 자체의 교육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창의성 교육과 문화 다양성 교육에서 찾고 있는 이번 세계 대회 참가는,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교육의 철학과 방향에 있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기대되었다. 참석 전에 살펴 본 대회 프로그램에 제시된 많은 강연자와 워크숍 참가자들의 이름과 소속기관은 필자로 하여금 이러한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화려했기에, 필자는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포르투갈로 향했다. 이 글에서는 주로 본회의장에서 있었던 주제 발표와 사례 보고, 본회의장 밖의 사례 프리젠테이션과 워크숍 중에서, 앞서 밝힌 초점과 관련해 필자가 관심 있게 본 것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예술교육을 통한 성숙한 시민 만들기

 

대회 첫날 기조연설을 맡은 사람은 미국 남가주 대학교의 ‘두뇌와 창의성 연구소’ 소장이자 심리학과 신경학 전공 교수인 안토니오 다마시오(Antonio Damasio)였다. 두뇌 연구와 예술교육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궁금해 하며 들었는데, 그의 연설의 초점은 두뇌와 정서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놓여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예술교육이 요구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를 현대 사회의 문제점 진단과 심리학과 신경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통해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연설의 핵심 내용은, 전통적으로 학교 교육에서 강조해온 수학과 과학 교육은 그 자체로 ‘시민’을 길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며, 따라서 예술교육과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속도’는 다양한 기술 발전과 세계화의 압력 하에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더욱 빨라지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지 능력의 속도를 정서 체계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개인의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사회적 기능 장애가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마시오 교수는 이와 같은 사회에 대한 성찰적 이해와 한 개인의 인격적 자질 형성에 예술교육이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신경과학이 이룩한 연구 성과는 이러한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있어 예술교육이 기여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데, 특히 ‘건전한’ 행위는 정서적 발달을 요구하며, 정서적 발달에 예술교육이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로 첫째, 정서는 행위와 관념의 질을 규정하는 일종의 형용사로서 기능한다는 연구, 둘째, 사회적 관습과 윤리적 구조가 사회적 정서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연구, 즉 관념과 행위는 정서와 병행해 발달한다는 연구 등을 들었다. 도덕적 발달이 완성된 성인도 두뇌 손상 시 정서 체계가 손상된다는 사실 역시 관념과 행위가 정서와 연관됨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정서와 인지가 날이 갈수록 더욱 분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한쪽에 치우친 학교교육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시민을 양성하는 일은 정서 체계의 발달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윤리적 행위는 성찰과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하며, 이는 예술과 인문학 교육과정에서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다마시오 교수의 주장의 전제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그가 첫 번째 전제로 삼은 것은 인지와 정서를 분리하여 보는 양분법적 사고의 문제점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예술교육자들에 의해 널리 공감을 얻어온 주장이다. 이는 뒤에 연설한 켄 로빈슨 교수를 비롯해 많은 강연자들에 의해 대회 내내 되풀이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전제는 예술교육 역시 전통적으로 그것이 행해져 온 방식, 즉 예술 자체의 교육을 고립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문학적 교육과 맥을 같이 하며 장르를 넘나들어 보다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영화 등 개별 장르의 미학적 관습과 작품 이해 및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예술교육의 관행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적 방식의 예술교육은 그 자체로 다마시오 교수가 강조하는 시민 양성이라는 목표에 부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을 넘어서는 예술교육


이와 같은 다마시오 교수의 연설이 이번 세계대회의 첫 번째 기조연설이었다는 점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나흘간의 세계대회 기간 내내 예술교육의 개념과 접근법에 대해서 상당한 입장 차이가 발견된 것도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특징만 살펴보면, 사회의 경제적 발전이나 개인의 직업 창출과 같은 실용적 측면에 예술교육이 수단적으로 기여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다분히 경제 중심의 논리를 펴는 입장도 있었고, 이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입장도 있었다. 한편 문해력이나 수리력과 같이 근대 이후 학교 교육에서 전통적으로 중시해 온 학습 능력과 예술교육이 중시하는 창의력은 양립 가능한 것이며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럼에도 예술교육의 목표가 문해력이나 수리력을 향상시키는 데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다양한 예술교육을 통해 창의성이 신장되면 그 결과 문해력이나 수리력이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가 예술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회 셋째 날 OECD에서 온 연구자가 예술교육이 실제로 수리력과 문해력에 도움이 되는가를 상관도 조사를 통해 입증하려 한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문제의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이 쇄도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마시오 교수의 연설은 예술교육이 전통적으로 학교교육에서 중시해온 학업 능력이나 직업 창출과 같은 예술 외적 목표에 수단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식의 실용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예술교육이 예술 자체의 교육이 아니라 시민 양성과 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 때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 연극, 소설, 영화, 음악, 그림 등의 교육에서 다마시오 교수가 중시하는 가치는, ‘예술을 통한 사회의 반성적 이해’와 ‘한 개인의 인격적 자질 형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점을 인식했던 때문인지, 이후 예술교육의 권고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토론에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예술교육’이라는 용어 대신 ‘예술과 문화 교육’을 권고안 제목 자체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유네스코에서 말하는 예술교육에 이러한 문화적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서인지 이러한 주장이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술과 문화 교육’을 함께 권고안의 제목에 넣자는 주장은, 우리나라에서 ‘예술교육’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명칭을 정책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예술교육을 통한 성숙한 시민의 양성이라는 목표와 관련하여 새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교사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과연 우리 사회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교사와 예술가, 매개자들이 이와 같은 문화예술교육의 철학과 방향을 얼마나 공유하고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아직까지 너무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별 예술 장르에 고유한 특성의 교육에 치우친 나머지 문화예술교육의 큰 목표를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고, 또 구체적인 프로그램 자체는 재미나지만 막상 그것이 ‘문화예술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술교육, 수사와 실행 사이의 간극


다마시오 교수의 기조연설에 이어진 켄 로빈슨(Ken Robinson) 교수의 연설은, 문화예술교육의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회가 열리는 나흘 내내 다양한 발언자들에 의해 반복해서 인용되었고, 이에 따라 필자의 고민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예술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정서 발달, 시민성, 사회적 감성의 세 가지 측면에 있음을 천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예술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면, 그 필요성에 대한 수사는 많은데 비해 실질적인 제공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술교육의 실질적인 지위와 질이며, 여기서 전체를 조직하는 주제는 창의성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사실 이처럼 예술교육이 정치적 수사에 비해 실행에서 뒤처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지난 해 한국에서 열린 아태지역 준비회의에 참석했던 앤 뱀포드(Anne Bamford) 교수의 세계 예술교육 현황 발표에서도 지적된 바 있으며, 이 내용은 <‘와우’ 하고 탄성을 지르게 하는 요소(The Wow Factor)>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며 로빈슨 교수는, 최근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예술교육 정책과 실천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라고 강조했다. 우리사회 내적으로 보면 보다 내실을 기하기 위해 성찰하고 평가해야 하는 문제가 분명 남아 있기는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추진되어 온 문화예술교육 정책이 제도의 도입 측면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관심과 부러움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만은, 비단 로빈슨 교수의 지적에서만이 아니라 회의장 밖에서 만난 많은 이들의 시선과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갖춘 문화예술교육의 제도를 실질적인 공급의 측면에서 질적으로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더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로빈슨 교수는 특유의 유머 감각과 정확한 현실 인식에 근거해 내내 청중을 사로잡으며 주장을 펴 나갔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교과목의 위계가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대체로 언어와 수학이 가장 우선시되고, 그 다음이 인문학 계열의 과목이며, 맨 마지막에 찬밥 신세가 되는 것이 예술 교과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왜 춤이 수학만큼 가르쳐지지 않는가, 혹은 두뇌와 같은 신체의 일부만이 특권화 되는가, 공교육의 목표가 최종적으로는 ‘대학 교수 양성’에 있는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은 간과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말해 현재의 학교 제도에 이론적 정당성이 없다는 점을 설파한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학교 교육은 특정 방식의 사고를 강조해 왔으나, 이제는 보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공장’에서 ‘허브’로 : 변화하는 교육의 의미와 철학


그의 연설에서도 강조된 것처럼, 현재의 학교는 19세기 산업 혁명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사회에 공급하게 위해 생겨났다. 산업혁명기의 교육은 삶의 전반기(아동기)에 집중되어 있고, 교과목 중심이며, 위계질서에 사로잡혀 있고, 노동 분업을 원칙으로 하며, 순응성과 선조성(線條性)을 강조하여, 기본적으로 ‘공장’ 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전반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학습, 교과목이 아니라 지식 분야 중심, 위계질서가 아니라 균형, 노동 분업이 아니라 협동과 학제적 접근, 순응성과 선조성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의성,  ‘공장’이 아니라 ‘허브’가 되는 교육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와 관련해 로빈슨 교수 역시 예술은 문화와 다른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도시에서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문화예술교육이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예술교육의 시수를 좀 더 늘려달라는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 자체를 아예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당연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교육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과 교사 양성, 대안적 평가 방식의 도입이 중요한데, 오히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우리의 목표가 지나치게 낮은’ 데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실행 방안을 설계하고, 그 실행에서 애초의 목표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사실 대회가 치러지는 나흘 내내 ‘창의성’과 ‘문화 다양성’이라는 말이 어쩌면 자칫 남발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이 논의되어 대회 후반부에는 다소 식상하게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대회 첫 날 있었던 다마시오 교수와 로빈슨 교수의 연설만큼은, 새롭게 요구되는 문화예술교육의 철학적 기초로 작용하는 것으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아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이를 바탕으로 교육 제도를 새롭게 디자인할 것을 요구하는 가운데,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을 찾으려는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후 필자의 관심은 이와 같은 문화예술교육의 목표를 제대로 성취하기 위해 어떤 커리큘럼이 개발되었으며, 교사 양성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평가는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연구되었는가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들로 옮겨졌다.


본회의장에서 발표된 우수 사례들의 면모를 대체로 살펴보면, 우선 시각예술ㆍ음악ㆍ춤ㆍ연극ㆍ시 창작과 퍼포먼스ㆍ영화와 뉴미디어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되, 문화 다양성과 사회적 문제 인식과 이를 예술적 소통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사례들을 소개하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만 스케치 형식으로 언급하면, 우선 영국의 경우 교사교육을 위해 2005년 2월에 디지털 방송을 시작한 ‘교사들의 텔레비전(Teacher’s TV)’을 통한 다양한 사례를 소개했다. 영국의 사례는 특히 ICT를 활용한 교사 교육이라는 기술적 측면의 진보, 내용적으로는 보다 큰 교육 목표를 위한 예술교육의 활용을 강조하는 방법론과 교과교육의 방법론으로서 예술교육을 활용하는 것, 예술교육을 통한 직업 창출 등이 강조되었다. ‘교사들의 텔레비전(Teacher’s TV)’ 사례는 특히 교사교육의 방법론과 기술적 측면에서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외에 소개된 프로그램 사례로는,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위해 퍼포먼스 하는 것, 오케스트라를 통해 사회 문화의 통합을 추구하는 음악 프로그램, 사진과 글 혹은 시를 결합시켜 개인의 경험을 표현하고 슬라이드 쇼를 통해 소통하게 하는 것, 그리고 예술을 민주주의의 학습을 위해 활용하는 것에 대한 강조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예술을 통한 사회적 인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로빈슨 교수의 주장과 같이 문화와 예술이 구별되지 않고 결합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은 주최 측의 고민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에 대한’ 교육과 ‘예술을 통한’ 교육


짧은 글 속에 대회의 면면을 세밀히 소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으나,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사례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미국 뉴욕시의 영상교육센터인 ‘Jacob Burns Film Center’를 들고 싶다. 이 사례는 우선 교육과정 개발 측면에서, 전문적인 ‘커리큘럼 매니저’가 센터에 상주하면서, 자체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학교 연계 교육 프로그램 역시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평가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 개발과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또한 대회 내내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예술 자체에 대한 교육’과 ‘예술을 통한 교육’을 훌륭하게 결합, 병행시키고 있는 점도 눈에 띄었다. 즉, 영화라는 예술의 언어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하면서도, 이를 사회적 주제나 이슈와 접목하여 배우게 함으로써,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교육 그리고 영화를 통한 사회적 인식을 중시하는 예술을 통한 교육 모두를 성취하고 있었다.


또한, 초등학교 연령대의 어린이를 위한 교육에서 중고등학교 연령대의 청소년을 위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정서와 사회적 발달 과정에 적합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개발해 적용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기조는 ‘이야기가 지니는 힘’의 이해와 ‘시각적 리터러시’ 능력을 바탕으로 한 미디어 창작과 소통이었다. 이러한 일관된 기조 하에, 8-18세에 이르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영상 언어 교육과 관람 포인트를 가르치는 교육, 짧은 애니메이션을 협동하여 만들어보게 하는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 교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포나 꿈과 같은 정서와 개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영화를 보는 프로그램, 노인에 대해 조사하고 ‘대화적 과정’을 강조하여 영화를 제작하게 하는 상급 연령 청소년을 위한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 등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동시에 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의 바탕에는 우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발달 단계에 대한 치밀한 진단과 그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를, 문화예술교육의 철학 측면에서 상위적으로 조정하고 모니터하는 전문적이고 섬세한 안목이 있었다. 또한 실험적인 커리큘럼과 교육방법론을 디자인하고 이를 적용해 본 후 이에 대한 평가와 연구를 통해 잘 되는 사례를 기록으로 남기는 실행 연구의 노력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험과 안목을 바탕으로 그 노하우를 학교 교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경험의 전수 노력도 있었다. 결국 교육을 받는 주체인 어린이와 청소년의 시각에서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예술의 근본을 잃지 않는 커리큘럼과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 좋은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파트너십의 사례들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교육의 교육과정 및 교육방법론 개발과 평가, 교사교육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영국의 실행 연구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관여(Engage)’라는 이름의 연구 프로젝트가 그것인데, 이는 시각 예술과 미술관 교육 분야의 커리큘럼 및 교육방법론의 실험을 학교와 미술관, 그리고 대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3개 주체가 협동하여 디자인하고 실행한 후, 이를 연구 결과로 보여주는 공동 프로젝트이다. 이는 영국의 교육부와 문화부의 공동 프로젝트이기도 하며, 테이트 갤러리와 같은 주요 미술관이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커리큘럼 및 교육방법론의 개발과 이에 대한 질적 연구가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연구 문제로는 “미술관 교육이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웰빙(Well-being)’을 촉진하기 위한 지식, 기능, 자신감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미술관 교육의 경험은 학생들에게 자기 정체성과 창의성을 고려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가?”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문화예술교육의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연구 문제를 선정하고, 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교육과정과 교육방법론을 실험적으로 설계한 후, 그렇게 디자인된 교육과정과 교육방법론에 대한 질적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은 연구의 설계와 실행에 대한 참여를 통해 자연스럽게 예술가, 학교 교사, 미술관 교육자들 간 파트너십을 강화하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2004년 12월-2006년 3월까지 1년 반에 걸쳐 시행된 연구의 최종 결과는 올해 9월에 웹사이트(http://www.en-quire.org)를 통해 발표될 것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7가지 측면에서 미술관 교육의 의의를 살펴볼 것이라 했다. 그 7가지는 ① 맥락: 사회적 배경, 학교의 정서(ethos), 자원, 교사의 경험 등 ② 프로젝트의 목표: 과정이냐 결과냐 ③ 가치: 커리큘럼과 자격(직업적 전망) 측면 ④ 공간: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이 지니는 해방적 가치 ⑤ 시간: 일반적인 학교 시간표 이외의 시간 ⑥ 자신감 ⑦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 등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연구 문제를 설정하고 그 문제에 답을 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과 교육방법론을 설계하도록 하며, 실행되는 수업에 대해 탐구하는 연구자의 역할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연구자이자 교사교육자인 필자로서는 새삼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연구 역량을 재고하기 위해 현재의 미진한 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성찰적인 교수 설계와 이에 대한 반성적 연구일 것이다. 나흘간의 세계대회 내내 핵심어로 언급되었던 창의성, 사회적 인식, 문화 다양성, 소통 능력 등의 말들이 힘을 갖는 방법을 찾는 일은 바로 이런 시도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2006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가 3월 6일부터 9일까지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열렸습니다. “21세기를 위한 창의력 건설 (Building Creative Capacities for the 21st Century)”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유네스코와 포르투갈 정부가 주최한 이번 세계대회는, ‘국제음악교육협회'(ISME), ‘국제연극교육협회'(IDEA), ‘국제미술교육협회'(INSEA) 등 국경을 뛰어넘는 여러 비정부기구들의 협력과 각 지역별 준비회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네스코 회원국들의 교육 및 문화관련 정부부처 대표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교육자, 연구자들이 이례적으로 한데 모인 이 나흘 동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웹진 땡땡은 세 편의 참관기를 통해 이번 세계대회의 면면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먼저 정현선 교수는 첫날의 기조연설에서부터 대회기간 동안 소개된 각국의 사례들에 이르기까지 차분하고 세심한 어조로 되짚어보면서,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마리를 조심스레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동연 교수의 글은 이번 대회를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을 통해서 ‘카니발 페다고지’로서의 예술교육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박남진 기획홍보팀장의 글은 ‘문화예술교육, 그 세계적인 첫 걸음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입니다.

문화예술교육, 그 세계적인 교류의 첫 걸음 –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 ‘카니발 페다고지- ‘, 국지적으로 실천하는 예술교육-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원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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