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의 영화 만들기 – ‘함께하는 영화세상’에서 본 우리시대의 자화상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영화진흥위원회 <남양주 종합촬영소>는 대부분의 한국 영화가 거쳐 가는 필수 촬영지이다. 그곳에는 거대한 6개의 실내 스튜디오와 3만여 평의 야외 세트장이 있으며, 촬영뿐만 아니라 영화후반작업을 지원하는 녹음실과 디지털 영상실을 갖추고 있다. 극장에서 보는 완성된 영화의 한 단계 이상은 종합촬영소를 거쳐 간다고 하더라도 거의 틀림이 없다.
영화 종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발걸음도 잦은 곳이 이곳이다. 서울 근교에 거주하는 시민들, 영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지망생들,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심지어는 효도 관광을 오는 노인들에게도 이곳 종합촬영소는 즐거운 관광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영상체험관이나 영화문화관에 들러 영화를 만드는 여러 공정을 구경하는 그들의 눈에는, 종합촬영소가 미국의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소품실에 들러 수십만 점의 영화 소품들을 구경하고, <취화선>이나 <스캔들>,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었던 야외 세트장에서 사진을 찍고, 운이 좋으면 촬영하고 있는 영화배우들에게 싸인을 받아가기도 한다.   

남양주에서 유명한 두 가지

종합촬영소 이외에도 유명한 것은 남양주에 또 있다. 그것은 마석가구단지이다. 마석가구단지는 규모면에서 일산, 의왕, 아현동의 가구단지보다 월등히 크며, 4백여 개의 중소업체와 많은 대기업들이 만들어내는 가구들의 공장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가구의 절반 이상을 이곳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것 중 하나는 그 가구들이 이주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석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수는 공식적으로는 약 5천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수치화되지 않은 불법체류자들까지 합친다면 그 수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의 생활터전이 그러하듯이, 수많은 인종과 언어, 종교가 모여 국적 불분명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 또한 남양주의 마석이라는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종합촬영소에 마석가구단지의 이주노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남양주에서 제일 유명한 종합촬영소와 남양주에서 그 다음으로 유명한 마석가구단지의 노동자들이 만났으니 어찌 보면 제법 어울리는 이 만남, 최첨단을 자랑하는 영화의 메카와 하얀 피부를 가지지 못해 서러움을 당하고 살았던 이주노동자들의 조금은 특이한 만남은 작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합 촬영소와 이주노동자들의 만남

원래부터 종합촬영소에서는 영화 촬영이나 일반인 대상의 관광 사업 말고도 청소년이나 학생, 영화인들을 위한 영상교육사업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 프로그램들을 창안하고 교육을 담당한 누군가가 촬영소와 근접한 마석의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리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영상 교육의 혜택을 받게 할 방법은 없을까 하고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강료나 참가비를 받고 운영했던 ‘한국인’ 대상의 프로그램과는 달리,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유료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은 그 실행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어쩌면 무산될 수밖에 없었던 기획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실행시키기 위한 좋은 조건을 얻었는데, 그것은 문화관광부의 지원사업이었다.

문화관광부는 2005년부터 ‘사회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개발운영지원사업’을 선정해 각 단체마다 최대 3천만 원 이하의 금액을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교육의 소외계층에게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사회공동체성을 강화한다는 목표아래 2005년에 113개 단체를 지원했던 이 사업은, 2006년에는 주로 노인층과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138개 단체를 선정해서 지원하고 있다. 이 지원사업에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영상 교육 프로그램이 선정된 것이다.  


사진: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한 1차 <편지> 중에서.

 

종합촬영소의 종촬운영팀이 기획했던 이 흥미로운 아이디어는 문화부의 지원을 받아 ‘함께하는 영화세상’이라는 이름 아래 세 개의 프로그램으로 현실화되었다.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가족영화 만들기 <편지>,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연극 놀이 캠프 <우리 친구>, 노동자들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 그리고 스스로 노동자이기도 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심리치료 프로그램 <닥터 무비>가 그것이다. 이 세 개의 프로그램은 소외 계층에게 영상 교육을 제공하는 취지 이외에도,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로의 삶의 방식이 충돌하고, 화해를 모색하며, 화합을 이끌어내는 장이 남양주의 종합촬영소에서 열린 것이다. 

삶의 다양성을 마음으로 이해하며,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프로그램의 첫 출발을 끊은 것은 <편지>였다. 이 과정은 총 5차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앞의 4차는 파키스탄(7월 10일), 방글라데시(7월 17일), 필리핀 여성(7월 24일), 필리핀 남성, 라이베리아(7월 31일)로 구분되어 개별적으로 실시되었다. 5차 교육 프로그램은 앞의 4차 프로그램에서 더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대상으로, 11월 중순에 1박 2일로 심화과정을 열어 촬영 뿐 아니라 편집의 기술까지 습득하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각 국가별로 조를 나눈 것은 캠코더나 디지털 영상 툴을 다루는 이 과정이 아무래도 초보자에게는 쉽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찍고’ ‘배우가 되는’ 참여자들 사이의 언어와 문화적 차이성을 배려한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 시작된 것인데다 아이디어를 통한 기획과 실제의 진행 사이에서 충분한 준비의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김영구씨는 준비기간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다. “가족영화 만들기 ‘편지’라는 프로그램으로 이주노동자 대상 사회문화예술교육의 첫 스타트를 끊었던 그날의 설렘을 되새겨 봤을 때, 그보다 앞서 상당한 진통을 치러야했던 준비단계가 떠오릅니다. 언어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특히나 쉽지 않았던 일은 이주노동자를 ‘교육의 대상’으로 모집하는 것이었습니다. 80년대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중동의 뙤약볕 아래에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피땀 흘려 일했듯이 돈을 버는 것은 그네들이 우리나라에 머무는 가장 일차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일요일밖에 시간이 없기 때문에 교육 전날 회식이나 기타 가사활동 등으로 인해 교육 당일 다수의 인원이 불참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행사가 시작됐을 때, 프로그램을 준비했던 이들의 좌충우돌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파키스탄 노동자들이 모인 첫째 날, 이슬람교도들에게 제공한 돼지고기는 그들을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준비자들의 웃을 수 없는 실수였다. ‘준비하던 이들’의 문화를 기준으로 ‘교육받는 자들’의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조를 나눠서 실습을 진행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거부 반응을 나타냈다. 열다섯 명의 참가자들을 조로 나누어 카메라와 녹음 장비를 제공하고 그룹별로 영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혹은 서구일지도 모르겠다)의 문화를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당연한 수순이지만, 그것이 파키스탄인들에게는 뭔가 부당한 대우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상한 그들은 오후의 교육을 거부했고, 당황한 프로그램 진행자들은 카메라 작동법에 대한 이론 수업 대신, 종합촬영소 견학으로 내용을 바꿔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의 촬영에 들어가서도 조를 해산하고 전원이 참가하는 방식으로 영상편지를 촬영하도록 조치했다.



사진: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3차 <편지>

이런 시행착오를 시작으로 2차부터는 각 해당 국가의 문화와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가미되었다. 2차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젊고 모국에서의 학력수준이 높은 집단이었는데, 그들은 카메라와 대한 거부감이 적고 학습효과가 높았다. 그들은 가족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단지 카메라 앞에서 말을 하고 찍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뉴스 리포팅하는 형식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운드 레코딩 과정과 블루스크린 합성 기법까지 배우는 등 참가자의 열의와 교육적 효과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 또한 4차 교육 때는 빈 의자를 가져다 놓고 카메라와 모니터를 설치하여, 마치 각 개개인이 스스로 고백성사를 하는 듯한 형식의 내용물을 만들었는데, 이는 필리핀의 카톨릭 문화와 영상 심리치료 기법을 활용한 좋은 사례였다.
5차 프로그램은 당시 종합촬영소에서 열린 네 쌍의 이주 노동자 합동결혼식을 찍고 편집 기술까지 익히는 심화과정이었다. 사실혼 관계였으나 사정상 결혼을 하지 못한 마석의 이주 노동자 부부들이 종합촬영소의 배려에 따라 한국식의 전통혼례식을 올렸는데, 그 결혼식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것이 프로그램에 포함된 것이었다. 정진영과 수애가 출연한 <나의 결혼원정기> 포스터에 결혼식을 올리는 이주노동자들의 얼굴을 합성하여 간판을 세우고 그들의 친구와 종합촬영소의 관광객까지 하객으로 합세한 전통혼례식은, 서로의 문화를 수용하고 접하는 하나의 이벤트를 떠나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기쁨을 나눌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행사였다.
김영구씨는 다섯 차례의 영상 교육을 실시한 감상을 이렇게 전한다. “처음으로 마석 성생공단에 갔을 때, 대학로에서나 가끔 보이던 검은 얼굴의 이방인들이 너무도 많이 보여서 놀랬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의식 속에 약간은 남아있던 차별의 색안경을 그 당시만 해도 쓰고 있었던 것 같구요. 하지만,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러한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옅어져갔습니다. 그들은 단지 피부색과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습니다. 21세기 다문화라는 화두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지금, 직접 접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을 때는 느끼지 못할 그런 감정이죠. 늦은 저녁까지 생전 처음해보는 노동을 하고 낯선 시선들 속에 버스를 타고 지친 어깨를 이끌고 열성적으로 교육에 참가하는 친구들을 보면,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스스로 반성도 하고 배우기도 합니다. 그들을 먼저 인정하고 다가서면, 그들은 저에게 더 많은 것을 줍니다. 오히려 배운 건 나였어요.”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우리가 이주노동자들을 보는 차별의 색안경은 우리의 문화가 그들의 문화보다도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 기반 한다. 경제력에 따른 삶의 질의 차이와 인종적 편견까지 합쳐져 한국인의 시각에는 동남아의 이주노동자들이 어느새 기피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은 ‘이해’의 문제이지,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한국인들은 일제의 해방 전후,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돈을 벌기 위해 멀리 타향으로 떠났고, 70년대에는 독일의 광부와 간호사가 되어 일했으며, 80년대에는 중동의 사막에서 땀을 흘려 일해야 했다. 이렇게 과거의 한국인들이 외국에서 일을 해야 했던 이유는 일제 식민지배의 수탈과 함께 급격한 근대화의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그들’의 시선 속에서 문화 경제적 미개인 취급을 감당해야 했고, 이제 세월이 지나 그 입장이 뒤바뀐 것뿐이다. 역사적 맥락의 차원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돌아보지 않고 단편적인 모습들로 타인을 판단하다보면 그 자체로 우수함과 열등함을 구분 짓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또 다른 차원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인 중에서,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방글라데시인들 또한 파키스탄인들에게, 한국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본과 일본인에게 느끼는 막연한 반감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가령, 개별적으로는 일본인과 친할 수 있지만 집단의 차원이나 민족 감정이 실린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반일이나 극일을 외치는 한국인이 많은 것처럼, 방글라데시인과 파키스탄인 사이의 갈등 또한 단순한 시각에서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그들은 그저 피부색이 비슷한 이주노동자들일 뿐이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 업주가 그들을 상하관계로 고용한다든가, 서로에게 막연한 반감을 갖는 특징을 개인의 성격차원의 문제로 치부해버린다면 그것은 단지 무지에 그칠 수 없는 태도인 것이다. 그 문제는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의 이주노동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도 가지고 있는 민족 감정 차원이 얽힌 문제인데 말이다.

근대화 과정에서의 과거의 한국인의 모습이나 위의 두 민족 간의 사연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문제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역사적 이유와 논리를 가지고 있다. 단지, ‘경제적으로 못 살아서’, ‘피부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문제를 많이 일으킬 듯해서’, ‘이해하지 못할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이주노동자들에게 색안경을 끼고 무시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몰이해에서 나오는 한국인 스스로의 문제이다. 인종과 민족 혹은 국가가 얽혀있는 부분에 있어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나’의 문화만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문화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의 시작은, 그들의 문화가 생성된 역사적 맥락의 이해뿐 아니라, 실제로 함께 겪어보는 것에 있다. 단순히 말해, 같이 놀아보면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친구>가 가르치는 것들

그 좋은 모델은 아이들이 제시해 주었는데, 그것은 마석초등학교 녹촌 분교생 전원을 대상으로 한 연극 캠프 <우리 친구>이다. 녹촌 분교는 마석지구에 살고 있는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과 이주노동자들의 자녀로 구성된 전교생 19명의 작은 학교였다. 내국인과 외국인이 같이 어울려 학교를 다니는 특성에 착안하여 열린 연극 캠프는, ‘어린이들의 인종, 계층 간 차별을 해소하고 우정을 통해 다문화 다인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 한다는 취지 아래 기획되었다.
1차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한 마을의 주민으로 역할을 나누고 곤경에 빠진 한 사람을 함께 돕는 역할극의 형식과 서로 다른 특징을 갖는 집단이 모여 미래의 가상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가상극의 형식 두 가지를 기획했는데, 두 연극의 공통된 주제는 ‘다른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였다. 그 두 개의 연극을 진행한 끝에 교육자들은 아이들에게 피부색이 서로 다른 친구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사진: <우리 친구> 1차 연극놀이에서.

집이랑 이불, 이 두 개의 사물은 무엇을 뜻할까? 연극 캠프에 참여했던 한 아이의 생각으로는, 피부색이 서로 다른 친구들이 함께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집과 이불이 필요하단다. 또 다른 아이의 생각을 빌리면 어떨까?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옷과 음식, 그리고 말(language)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두 아이의 생각에는 어른들이 떠올려 봄직한 서로에 대한 관심, 이해, 친절함, 사랑 같은 덕목은 그 다음인가 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아이들은 서로 조금만 어울려보고 친해지다 보면 그런 덕목들 없이도 어른들이 가질 법한 타인종과 타문화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를 자연스럽게 지워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혹여 이런 대답을 한 아이들의 환경이 경제적으로 낙후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어른과는 달리 편견을 화합의 마음으로 바꿀 줄 아는 용기와 솔직함이 있다. 그들은 함께 ‘어울려 놀고’, ‘어울려 사는’ 연극 하나만으로도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친구들에게 우정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교육의 힘이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것에 대해 실질적인 고민을 해본 아이들은, 그들이 성장한 이후에도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는 자세에 대해 남들과는 다른 태도를 자연스럽게 지니게 될 것이다.

이 캠프에 참여했던 녹촌 분교의 이명원 교사는 종합촬영소의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2박 3일 동안 덥고 비오는 날씨에 우리 녹촌 분교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체험과 즐거움을 선사해주신 모든 선생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석한 아이들 모두 편한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너무 솔직히 표현하는 모습은 이끌어주신 선생님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기회로 아이들이 더 활기차고 나름대로의 스트레스도 확 날려 보냈을 거예요. 특히 산따, 샤킬, 나피에게는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잊지 못할 귀한 추억이 될 겁니다…”
2차 캠프는 1차 캠프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학생들의 부모 및 친지들을 초청, 학교의 학예회 형태로 진행했다. 취화선 세트장에서 벌인 시대극 연극도 외국인 아이들에게는 처음 겪어보는 ‘재미있는 놀이’였고, 부모들 앞에서 단소를 불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영어말하기를 하는 등, 축제로서의 캠프의 취지를 살릴 수 있었다.

타자의 고통을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발견하는, <닥터 무비>

방글라데시 여성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던 <닥터 무비> 행사는 8월말부터 9월초까지 3주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또한 3주간의 시행 이후,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발견한 녹촌 분교의 요청에 의해, 아이들을 대상으로도 아홉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이 글에서는 방글라데시 여성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닥터 무비> 행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프로그램은 아내이자 엄마라는 특수성에 기인한 탓인지 앞의 두 행사보다는 의사소통의 혼란에서 오는 어려움이 더 많았다. 1주차에는 참여를 약속했던 이들이 아이가 아프다든가 카메라 촬영을 원치 않는다며 행사 직전에 참여를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고, 방글라데시에서는 일상화 되어있는 ‘행사 참가비(어떤 행사를 참여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에 대한 무지로 참가자들의 오해를 사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참여를 조건으로 방글라데시 행 비행기 티켓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방글라데시의 여성들 사이에서 대모로 통하는 유은숙씨를 통해, 그렇게 주고받는 문화가 방글라데시의 관습이라는 것을 알아낸 담당자들은 다음 모임부터는 소정의 참가비를 주기도 하였다.

이 여성들을 대상으로는 집, 나무, 사람을 그리게 한 뒤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HTP 검사를 실시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팔이 없거나 몰골인 사람 형상을 그려냈다. 집을 그릴 때는 마석가구공단을, 나무를 그려보라는 이야기에는 단순히 네모난 나무토막을 그리기도 했다. 검사 결과는 대체적으로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거나 유아기적인 모습, 위축감 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이 양육’과 ‘돈’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꿈이 로또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몹시 안타까웠다고 교육을 담당한 황보성진씨는 말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HTP 검사에 소극적이고, 카메라로 자신의 모습을 찍는 것에 거부하던 이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그들은 ‘남편’, ‘아이들’, ‘방글라데시에 있는 가족’, ‘친구’ 등의 주제를 놓고 10분에서 20분가량 자신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마지막 주차에 다시 실시한 HTP검사에서는 첫 주차 때보다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그림을 그리는 등 심리 치료 요법으로서의 영상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사진: <닥터무비>에 참여한 방글라데시 여성들

하지만, 이들이 왜 마음을 닫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았을 때, 마음은 조금 무거워진다. 그들은 한결같이 빨리 돈을 모아 한국 땅을 뜨고 싶어 했다. 한국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주고 안아주는 터전은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경제적 약소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오는 후진국민이라는 이유로 냉대와 멸시를 받던 그들로서는, 문화적 다양성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따뜻함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주로 남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프로그램 <편지>에서도, 처음 그들은 고가의 카메라 장비를 다루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일을 할 때, 기계가 멈춰서고 고장 날 때마다 한국인 관리인의 고성과 욕지거리를 무방비로 들어야 했을 장면을 상상해보면 그들이 왜 기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일이다.

삶과 문화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 종합촬영소가 진행한 이 행사의 캐치프레이즈는 ‘함께하는 영화세상’ 이었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김영구씨는, “솔직히 처음엔 이주노동자 관련 범죄소식을 종종 들은 처지라 조금은 무서웠던 맘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진행됨에 따라 연민의 감정을 가진 채 진행했던 태도가 후에는 동년배의 친구에게 제가 아는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심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의 말 그대로 어쩌면, 사회적 약자에게 교육을 ‘베풀고자’ 기획했던 이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그들을 통해, 우리의 문화가 문화적 다양성에 얼마나 인색한가를 알게 해주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타국에 와서, 그것도 단일 민족주의와 배타성이 강한 한국에 와서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속에 힘겹게 살아가야 했을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 모습의 자화상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가 경제의 차이에 따라, 인종의 색깔에 따라, ‘우리’와 ‘타자’의 경계에 따라 ‘나’와 ‘너’를 가르고 그러한 인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한국의 현재의 모습은, 상대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서로 함께 어울리는 과정 자체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하나의 숙제와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지난해의 성과와 반성을 바탕으로 이주노동자 대상의 프로그램들은 올해도 다시 열린다. 올해의 특징이 있다면, 영상 교육의 강사를 이주노동자들 자체에서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올해 훈련을 받은 이주노동자들은 차후에 이주노동자들을 직접 교육하는 ‘주체’로서 설 수 있게 된다. 이는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고 보수도 지급할 수 있어, 문화교육적인 측면과 함께 경제적 지원도 함께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영상미디어센터와의 연계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사회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워크숍을 개발하려고 준비 중이다. 이는 사회단체 내부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연속적인 영상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이다. 첫 해의 생기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과 그에 수반되었던 시행착오가, 올해와 내년 이후의 과정에서는 보다 의미 있고 성과 있는 사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