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속살에서 자라는 아이들, <아이들은 자연이다>


며칠 전 출장길, 저녁 무렵 남녘의 국도를 달릴 때였다. 어스름 해가 져 가더니 슬금슬금 어둠이 사위를 덮어 버렸다. 하나 둘 집집마다 불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 상 차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차창을 열었다. 어둠이 뺨에 찰싹 달라붙었다. 얼마 만에 만져 보는 어둠인가. 진짜 어둠이다.

그런데 “산골의 그믐은 깜깜하다. 전깃불만 끄면 온 세상이 고요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온전한 어둠, 무서울 줄 알았는데 편안했다. 밤에 오줌 누러 갈 때도 불을 켜지 않고 움직여 보니, 아무것도 안 보여도 몸이 알고 움직인다. 신기했다.”라고, 장영란은 이야기한다. 도시에서 어둠이 무서움의 대상이 된 것은 어둠 때문이 아니라, 어둠 속에 감춰 있는 적의들, 그 불나비들을 부르는 네온들, 어둠을 어둠이지 못하게 하는 것들 때문이다.

그렇다. 자연은 도시의 반대어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곳, 우리의 몸이 바로 자연이다. 우리의 몸에 맞지 않는 도시의 어둠이 무서울 뿐. 결국 도시는 썩은 자연일 뿐. 그러기에 “아이들은 자연이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지사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아이들은 자연이다> (장영란ㆍ김광화 지음, 박대성 사진, 돌베개 펴냄) 를 곰곰 되씹어 보면 특별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지사를 일깨워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평범하지만 중요한 진리. ‘자연’. 그 속살을 천천히 느껴 보자.

자연 속의 두 주인공, 탱이와 상상이

장영란ㆍ김광화 씨는 화자이며, 탱이와 상상이는 이 책의 주인공이다. 물론 장영란ㆍ김광화 씨는 화자이면서 든든한 조연이기도 하다. 탱이와 상상이가 보여 주는 배움의 풍경들은 풍성하다.

탱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배움의 세계에 접어들었다. ‘우리 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운동’ 동참한 이후 사람들에, 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배움을 넓혀 가고 있다. 수벽치기, 춤 테라피(자기 용돈으로 수강료 내고)를 배우고는, 배운 내용을 가족들과 나눴다. 가족 홈페이지가 필요할 거 같다는 이야기에, 홈 프로그래밍 책을 보고서는 혼자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용돈 한 푼도 받지 않고 가끔 업그레이드까지 한다. 자기가 먹을 요리는 자기가 한다. 그리고 <개똥이네 놀이터>에 요리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그리고 용돈도 번다. 필요에 따라서는 주걱도 만들고, 목검도 만든다. 혹은 아래채 짓기까지.

 

상상이는 누나와 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날 때부터 산골 생활을 시작한 셈. 그만큼 자유롭고 편하게 배움과 일을 결합시키고 있다. 메뚜기를 좋아하는 아빠를 고객으로 메뚜기 잡아 삼천 원 정도의 용돈을 벌더니 메뚜기 잡는 걸 도와준 누나한테 과자 두 봉지, 오락실에서 삼백 원, 먹어보고픈 사탕 한 봉지, 껌 하나, 아빠한테 아이스크림 하나… 남김없이 써버린다. 스스로 벌어 당당하게 쓰기를 배운다. 바늘을 방바닥에 어지럽힌 범인으로 핀잔을 들었지만, 알고 보니 바늘을 털옷에 문질러 남북 방향 알아보는 실험을 했던 것. 따라 하기의 명수로서, <공작 도감> 따라 만들기 놀이하기, <미스터 초밥왕> 보고 초밥 만들기, <식객> 보고 누룩과 전분이 만나 알코올과 이산화탄소가 생기는 신비 체험하기 등, 한번 빠지면 쉽게 놓지 않고 바로 끝을 보고야 마는 집중력 있는 배움꾼. 혼자서 수학 교과서 떼기에 몰두하다 지금은 바둑에 푹 빠져 있고, 잡지에 요리 만화를 연재하는 누나에게 자극을 받은 건지 엄마 생일에 미역국 끓이기까지 시도했다. 자신에게는 배움이요 가족에게는 감동이다.

놀이꾼이면서 배움꾼

두 주인공이 배우는 중심에는 욕망이 아니라 몸이 있다. 몸이 시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배워 가는 것이다. 필요한 주걱, 목검을 만들기 위해, 나만의 방(아래채)을 만들기 위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책에 나온 막걸리 이야기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뻣뻣한 몸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이렇게 몸이 원하는 것들을 이뤄가는 일이 배움이 된다. 부모, 학교, 사회가 정해준 이유, 목표에 따라 하는 일이 아니다. 몸이 말하는 바에 귀 기울이고, 들리는 소리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고 하고, 배우는 것이다.

탱이는 공부가 뭐냐는 질문에 “‘공부를 한다’라는 무게감 없이 그냥 편하고 재미있게 배우는 거지요. 공부를 생활로 끌어들였다고나 할까.“라고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배우고 익히는’(工夫) 것이다. 학습이 아니다. 또 그들은 한 매듭을 묶고 다음으로 넘어갈 때 그걸 기념하기 위해 잔치를 한다. 책 한 권을 다 끝냈다면, “야, 우리 잔치하자”고 해서 책거리 잔치를 한다. 그리고 그 배움을 가족과, 이웃과 나눈다. 탱이는 그러한 배움의 과정 중에 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결과로 돈이 생긴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있다. 돈과 일의 관계를 자기 몸으로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아쉬움 하나. 탱이와 상상이의 열연 덕에 책을 읽는 내내 나 역시 부끄럽기도 부럽기도 끄덕이기도 하면서 배움을 얻어 갔다. 하지만 장영란ㆍ김광화가 이야기하듯이 배움이란 자람이란 알곡도 있고, 쭉정이도 있는 자연의 모습일 텐데, 이 책은 너무 매끄럽다. 두 부부가 정리해 놓은 탱이와 상상이 이야기는 또 하나의 대안 ‘교과서’처럼 깨우침과 배움으로 잘 엮어져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로 느껴지지 않는다. 작은 테마들로 정리된 에세이가 아니라, 굳이 깨우침에 이르지 않더라도, 뭔가 생각할거리가 없더라도 그냥 가감없이 적어 내려간 일기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울지 않는 늑대>나 <나를 부르는 숲>에서 느꼈던 그러한 편안함이 아쉬운 대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 책은 “나와 남편이 다르듯 아이마다 다르다”라며, 주인공들과 엮어 내려 간 이 이야기가 정답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비슷하게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여럿 보게 되었는데 공부하는 모습 또한 다 다르더라는 것이다. 탐구심이 대단해 가족 모두가 지식 공부에 열중해 있는 경우, 사회운동에 열중해 있는 경우, 각자 한 가지씩에 푹 빠져 지내는 경우, 백수처럼 놀면서 지내는 ‘백스쿨링’을 하는 경우…. 한 가지 공통점은 부모와 아이가 자신들에 맞는 길을 찾아간다는 점. (여기에 하나 추가하자면, 아직 길을 찾지 못하고 혹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길을 찾지 못하고 지낼지라도, 그것이 부족함이 없는 삶이라면 그것 역시 하나의 자연임을 인정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두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엄마는 엄마 삶을 사세요. 우리 삶은 우리가 살게요.”
“기대는 실망을 낳잖아요.”

좋은 엄마, 좋은 아빠, 좋은 아들, 좋은 딸, 지나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보자. 서로에게 한 뼘씩의 여유를 줘 보자. 그리고 내 몸에, 내 생활에도 한 뼘씩의 여유를 줘 보자. 그게 바로 자연(自然)이고 배움이리라.
“그래, 나도 한번 해 보리라!” 이렇게 얘기하려니, 장영란씨의 얘기가 뒤 꼭지를 당긴다. “나도 아이처럼 일을 즐겁게 하고 싶다. 일 욕심 부리지 않고 한 듯 만 듯 일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식구들 눈빛이 찌릿찌릿.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을 해요, 실천을!’”이라고.

 

* 고백 하나.“귀농 부부 장영란ㆍ김광화”라는 부제에 선입견을 갖고 그냥저냥 귀농 이야기려니, 먹물들의 자연 예찬이려니,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시를 떠나 정착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책의 앞부분은 솔직히 먹물이 덜 빠진 느낌이 들어 ‘그러면 그렇지’ 약간 실망하면서 읽어내려 갔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서는 알았다.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가는 솔직한 기록, 뒷간 같은 풍성한 이야기이기에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었던 먹물 냄새였다고. 온갖 자연의 냄새 가득한 솔직한 뒷간처럼.

* 고백 둘.“아이와 함께 크는 교육” 이야기를 통해 내가 버린 몸의 느낌을 다시금 배웠다. 자연 이야기인 동시에 교육 이야기인 이 책은 탱이와 상상이라는 맑은 거울을 통해 나를, 내 몸을, 찐득허니 몸에 배인 때를 돌아보게 해 준다. 그 누구의 어떤 이야기보다도, 두 아이의 삶은 한 아름 배움의 만찬을 차려 준다. 집 앞에서 갓 따 온 나물 반찬과 밥으로 차린 한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