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란?” “도시란?” 이 질문에 집은 아파트, 도시는 빌딩이 많은 곳 정도로 쉽게 답하거나, 질문 자체를 굉장히 당황스러워할 가능성이 크다. 지극히 뻔하고 쉬운 용어인 것 같지만, 막상 대답하려고 보면, 단순하지 않은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거, 거주, 공간, 장소, 마을, 지역 등 유사한 단어로 확장해 생각하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진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음의 괴리가 있고, 이는 이 단어들이 대체로 추상화되고 형식화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 『한옥 적응기: 전통 가옥의 기구한 역사』 이 두 책은 어쩌면 일반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린 ‘집’과 ‘도시’와는 전혀 다른 ‘집’과 ‘도시’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런 혼돈이 생긴 것은 서구에서 유입된 개념의 혼재와 부동산이라는 자본주의적 상품으로서의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살고 싶은 집을 커다란 네모 상자에 여러 개의 네모난 창문으로 표현한다. 기존의 집과 도시라는 물리적 환경이 인간의 상상 자체를 제한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집과 도시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적 장소 개념
한국에서 장소적 개념에 대한 관심은 1990년 전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사회에서 모더니즘 사조가 시작된 20세기 초 한국은 일제 식민지기였고, 1968년 ‘68혁명’을 기점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시기에 한국은 군사정권에 의해 통치되던 때였다. 따라서 한국은 서구의 개인 자율성에 기초한 근현대 문화와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고, 군사정권이 끝난 1990년대에 이르러 포스트모던과 장소 개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경제적 잉여와 물리적 도시화라는 기반도 주요한 조건이었다.
1990년대 한국에서 사용된 장소 개념에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론, 특히 그가 1951년에 발표한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Building, Dwelling, Thinking)’이 주요한 논거가 되었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정성(Authenticity)’이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상적 살아감(비본래성)의 상대적 개념으로 일상적 관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본래적 모습(내면)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성’이 개인의 욕망과 주체에 기대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와는 상반된 성질이다. 무언가(장소)에 영원불변의 성질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하이데거의 ‘장소’는 내면의 본래적 회복의 의미로 영원불변한 ‘장소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적 특수성과 결합하여 또 다른 고정값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박제화된 궁궐 등의 한옥이 그렇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함께 만들어가는 ‘도시’
‘장소’는 개인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본다면, 인간 삶과 문화가 집적되어 현상(現象)될 수는 있지만, 영원불변한 성질일 수는 없다. 즉 장소는 인간이 생산하고 만들어갈 뿐이고, 이렇게 생산된 가치가 집적되어 현상될 뿐이다. 리처드 세넷은 “물질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스스로 살 곳을 만드는 유능한 창조자다”(『장인』)라고 말하며, 외부와의 관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비본래성을 강조한다. 어쩌면 세넷이 하이데거의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에서 ‘사유함’을 뺀 ‘짓기와 거주하기’를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짓기와 거주하기』는 『장인』 『투게더』에 이은 리처드 세넷의 ‘호모 파베르 3부작’의 완결판이다. 세넷은 건축과 도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도구적 인간’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물질, 타인 등 외부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세계로서 건축과 도시의 중요성을 말한다.
세넷의 도시 개념을 간단하게 나누어 보자면, 물리적 도시인 빌(Ville)과 비물리적 도시인 시테(Cite)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이 유기적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상태를 좋은 도시로 본다. 이런 이유로 세넷은 ‘빌’ 중심으로 이루어진 20세기 도시계획을 “일단 헐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헐고 맨땅처럼 밀어버린 다음, 새로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있던 환경은 설계자에게 가로 고치는 것으로 간주됐다. 이와 같은 공격적인 처방은 번번이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장인』)라고 비판했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면 “도시계획의 규율이 건축과 거주에 대한 지식 사이에서 분열하여 파열되었다.”(『짓기와 거주하기』)라고 분석한다.
세넷의 이런 관점은 현재 도시와 건축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인간과 인간성 자체의 파멸로 심각하게 보는 문제의식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보자면, 한국은 ‘빌’에 집중된 전형적인 20세기 도시계획을 여전히 맹신하고 있다. 더구나 ‘빌’을 완전하게 자본주의적 교환가치로 치환했기 때문에 분열과 파열을 넘어 거주, 건축, 도시(계획)은 교환가치의 하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집’은 형태가 아니라 공감
『한옥 적응기』는 ‘한옥’이 아니라 ‘적응(adaptation)’에 방점을 찍고 있다. 적응은 “적절하고 유익하게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으로서, 외부 세계의 현실에 적당히 맞추는 활동과 환경을 바꾸거나 더 적절하게 통제하기 위한 활동을 포함한다. 또한 개인과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함께 어울림(adaptedness)’의 상태를 의미”(『한옥 적응기』)한다. 왜 ‘한옥’을 주제로 하면서 ‘적응’에 방점을 찍었을까?
‘한옥’은 기이한 말이고, 고정불변의 법칙처럼 틀을 짓는 용어다. 한옥은 양옥과 구분하기 위해 1908년에 만들어진 용어이고, 1960년대부터 정부와 언론을 중심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한옥’의 ‘한’은 새로운 것과 구분하기 위한 접두사다. 하지만 보통은 ‘파’가 있고, ‘양파’가 있고, ‘배추’가 있고, ‘양배추’가 있듯이 새로운 것에 접두사를 붙인다. 따라서 ‘옥(집)’이 있고 ‘양옥(일옥)’이 있어야 하지만 ‘한옥’이 된 것이다. 현재는 오히려 ‘양옥’이 ‘양’을 뺀 채 일반적인 ‘집’이 되고, ‘한옥’이 특수한 것으로 구분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파트가 보편적 주거유형이 되고, 한옥이 박제화되어 보존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말 ‘집’은 한자 ‘葺(기울 즙)’에서 연원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초가집은 ‘초즙(草葺)’, 기와집은 ‘와즙(瓦葺)’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한자 ‘즙’은 ‘귀에 대고 말하는 형상’의 ‘소곤거릴 집(咠)’ 위에 ‘초두머리(艹)’를 얹은 글자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초가를 잇는 행위를 나타내는 글자라고 할 수 있다. 외부와의 관계와 문화적 공감대, 함께 만들어가고 나누는 과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집’이 물리적 환경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이유는 물리적 환경은 이런 인간의 집단적 행위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집은 “살아온 사람들의 치열한 삶과 문화가 축적된 역사의 한 단면이고, 더 나은 공간이 되기 위한 발판”(『한옥 적응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옥 적응기』에는 집과 도시에 대한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가 담겨 있다.
『짓기와 거주하기』 『한옥적응기』 두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집과 도시’의 주인으로 서기를 요구하고 있다. 두 책이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행위 자체와 ‘적응’이라는 변화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다. 두 책은 모든 인간을 집과 도시를 만드는 주체로서 다루는 ‘집과 도시’의 역사이고, 현재 ‘집과 도시’의 문제에서 인간성을 중심에 둔 근원적 고민과 대안을 제시한다.
- 정기황
- 각 시대의 문화가 새겨진 공간과 도시를 계보학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이며, 이를 기초로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근대 서울의 도시건축 적응과정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시시한연구소 소장으로 장소인문학적 도시건축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더불어 경의공유지시민행동 공동대표, 공유성북원탁회의 공동대표, 커먼즈네트워크 등의 도시사회운동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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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도시 그리고 삶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잘 보고 갑니다
집과 도시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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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