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대부분 시간을 배다리 마을에서 보내고 있다. 배다리 마을은 인천의 원도심으로, 한때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활발한 마을이었다. 큰 시장이 서는 곳이기도 했고 40여 곳의 헌책방이 늘어서 전국 3대 헌책방 거리로 불렸을 정도다. 지금도 다섯 곳의 헌책방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이곳에 온 건 2021년이다. 워낙 오래된 것과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인천의 원도심에 놀러 왔다가 책방과 문구점이 모여 있는 모습과 그사이에 섞여 있는 오래된 건물들에 반하고 말았다. 평온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았다.
이렇게 빨리 공간을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이 동네를 만나면서 커피 로스터리이자 문화 플랫폼 ‘동양가배관’이 시작되었다. 처음 공간을 열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품은 질문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어떤 문화가 있을까? 우리가 하는 활동으로 또 다른 문화가 생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뒤로는 이 질문을 풀기 위한 활동을 이어왔다.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를 지역으로 초대해 지역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하고,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지닌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하면서. 그렇게 작은 실험을 반복하다 보니 활동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했고, 2년이 흐른 2023년부터는 로컬 크리에이티브 기획사 ‘패치워크’를 만들어 더욱 다양한 문화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벌이는 문화적인 활동이 도시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 건 작년에 진행한 ‘언노운 북 페스티벌’ 때였다. 그냥 우리가 해왔던 실험을 모아보기만 해도 축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한 기획이었는데 먼 곳에서 찾아와 숙박까지 하면서 즐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광주에서도, 부산에서도, 심지어 미국에서도 왔다. 어린 시절부터 배다리를 좋아했다는 한 지역 주민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던 동네를 되살려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사실 도시를 되살리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고 활동을 시작한 건 아니었기에 그 말이 얼떨떨했다. 그럼에도 지역에서 문화예술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 애써온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역할을 돌아보는 것이 결국 문화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말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중요하게 다루어온 것과 그 속에서 발견한 것들을 나눠보려 한다.
낯설게 바라보고 가능성을 상상하기
우리가 배다리에서 공간을 열었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도대체 왜 여기로 온 거예요?”였다. ‘이 동네가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우리를 동네 사람들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본인들은 오랫동안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별로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거 재미있지 않아요?”라고 짚어서 말하면 갸우뚱하면서도 “듣고 보니 그렇네”라며 즐거워했고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더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 알았다. 기존의 것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볼 때,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한다는 것을.
오래된 것은 버려지기 쉽다. 익숙한 것은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래된 물건이나 공간, 도시뿐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쌓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을 대하는 관점은 ‘나’를 보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화려해 보이는 타인의 것이 아닌 내가 이미 가진 것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일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낯선 방식이 필요하다. 그 일의 전문가는 바로 예술가이기에,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을 지역으로 초대해 조금은 엉뚱한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있다. 예술가와 함께 동네를 산책한다거나, 가상의 축제를 개최해 본다거나 하는 식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인디문화 콘텐츠 기획자, 예술교육실천가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매년 배다리에 와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을 나눈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정해진 정보를 해설하거나 전달하는 게 아니라 질문하고 상상하는 과정을 함께 하다 보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걸 느낀다. ‘이런 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꿈꿔보고 시도해보게 된다. 낯선 시선을 제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변화의 씨앗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문화예술가의 첫 번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표현하기
지역을 기반으로 기획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기획은 오히려 지역을 낯설게 경험하며 얻은 영감으로 ‘나’를 발견하고 표현하도록 돕는 것에 가깝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표현하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해도 될까요?” “제가 맞게 하고 있을까요?” “제가 그림을 잘 못 그려서 자신이 없어요.”라는 말을 정말 자주 듣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럼요. 마음대로 하세요!”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도 괜찮다는 분위기를 만든다.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다채로운 창작의 도구와 영감이 되는 사례들을 제공한다. 그래서인지 패치워크에는 유독 자기답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자기만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멀리에서도 찾아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모두에게는 잠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꺼내고 존중받는 경험을 한 사람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게 된다고, 안전한 환경에서 나만의 작은 실험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그 힘이 자신의 삶을 바꿀 용기로도 이어진다고 믿는다.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영역을 제공하고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 역시 문화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부드럽게 뜻밖의 연결을 만들기
“패치워크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게 아쉬울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서 들려주고, 지역과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존재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너무 슬플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우리가 활동하는 동네에는 오랫동안 지역을 지켜온 사람이 많다. 각자의 철학도 개성도 강하다. 이 지역이 궁금하지만 어쩐지 다가가기 어려워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도 그만큼 많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양쪽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을 꼽자면 다시 한번 ‘인정’과 ‘존중’을 말하고 싶다. 서로 다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문화예술의 본질적인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온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의 존재 가치를 말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평생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는 이들이 하고 있는 일상적인 활동의 문화적 가치를 들여다보고, 의미 부여하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조명한다. 이 과정에서 ‘존중받고 있다’는 감각을 느낀 사람은 상대방 역시 존중하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렇게 연결이 시작된다.
이때 서로가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축제 함께 준비하기’ 같은 것. ‘축제’ 하면 흔히들 화려한 무대나 몰려드는 관광객을 상상하지만(결과), 지역 축제에서 더 중요한 건 ‘연결’이라고 생각한다(과정). 하나의 목표로 무언가를 함께 준비하면서 생겨나는 연대감, “여기 써도 될까요” “이것 좀 부탁해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소통, “프로그램 참여하러 왔는데요”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핑곗거리.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기를 원한다. 다만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만날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우리의 일은 자꾸만 확장되고 있다. 숨은 이야기를 모아 문화적 자산을 축적하고자 하는 지역, 구성원들의 자기표현을 돕고 싶은 단체, 부드러운 조직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기업에서 ‘패치워크’를 찾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 이 과정을 통해 나 역시 문화예술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
문화예술과 일상 사이, 도시와 동네 사이,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사이, 다양한 ‘사이’를 매개해 오면서 문화예술가의 전문성은 잘 만든 ‘결과물’을 제공하거나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개입과 소통, 매개의 ‘과정’을 설계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수치화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문화예술가들이 자신의 역할과 전문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그 과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며 2024년을 시작하면서 내게 큰 영감이 된 문장을 전한다.
“지구는 이제 더 이상 성공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더 많은 중재인과 치유사, 복원가, 이야기꾼, 모든 유형의 사랑하는 사람을 절실하게 요구한다.” – 세스 고딘, 『의미의 시대』 중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문화예술의 역할이 중요해진 시대가 아닐까. 우리는 이 사회에 어떤 의미를 선사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해 보고 싶다.
- 김해리
- ‘예술적 상상력을 통한 창조적 변화’를 모토로 다양한 경계를 넘나들며 경험을 기획하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해 의미를 불어넣는 과정을 사랑한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고유한 문화로 만들어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heyknitters@naver.com
patchwork.incheon.kr - 사진제공_김해리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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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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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교육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는 기사네요. 잘 읽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문화예술교육의 가치와 상당히 비슷한 내용들이 많아서 굉장히 반갑고 또 공감되는 글이었습니다~!! 내용이 너무 좋네요~!! 덕분에 좋은 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
존중이 마음을 연다, 연결이 시작된다
패치워크가 추구하는 매개의 역할
공감이 가네요
존중이 마음을 연다, 연결이 시작된다
패치워크가 추구하는 매개의 역할
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