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진로는 생각해 봤니?”
사실 학생들과 첫 상담에서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은 아니었다. 요즘 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의미 있었던 경험은 무엇인지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고등학교의 상담 시간은 너무 짧았다.
“의사가 되고 싶어요.”
“그래? 왜? 언제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어?”
“모르겠어요.”
“그럼, 어떤 의사가 되고 싶어? 의사가 되어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
“음… 모르겠어요.”
의사, 간호사 아니면 반도체공학과, 화학공학과, 경영학과 등 말하는 직업이나 학과만 달라질 뿐, 학교 안에서 늘 반복되는 대화였다. ‘모르겠어요’라는 말에는 아이들의 가슴에 콕 박힌 막막함과 불안감이 담겨있다. 지식의 암기보다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의 목표는 오래전부터 강조되고 있지만, 아이들이 삶의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 진로와 관심사,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본 경험이 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스스로 세운 목표인지 판단해 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지나가는 고등학교 생활에서, 어른들의 기대가 너무 크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얼른 서울로 가고 싶어요.”
“저 수도권 대학 못 가죠? 여기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진로 상담을 하면서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시‧군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있었는데, 우리 지역에 남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돈 잘 버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가야 한다고 ‘응원’하는 어른들이 만든 비교 기준을 답습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늘 마음 아팠다.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이 나고 자란 지역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원하는 바를 펼칠 수 있는 학교와 지역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선생님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리얼월드러너’(Real World Learner)라는 이름으로 함께 지역연계 교육과정을 기획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시골에서 태어나 계속 고향에 살고 있어서, 지역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마을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마을에 대한 애정이라는 딜레마에 공감할 수 있어요. 아이들이 여러 ‘지역’의 가능성을 알고 장소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더 크고 멋지게 꿈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어요. – 김민지 괴산고등학교 교사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관한 관심과 애정을 키우고, 지역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다. 단단한 자존감을 발판으로 온전히 나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자유롭게 고민하길 바랐다. 그리고 주어진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관계를 만들어 가는 용기를 갖길 바랐다. ‘학교’라는 공간은 배움과 성장이라는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나답게 살기를 꿈꾸어 보고, 실제 세상에서 부딪히게 될 경험에서 덜 지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교사도 ‘지역’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성찰과 반성도 있었다. 학생을 위한 활동을 기획하기에 앞서 교사가 먼저 학교 밖으로 나가, 지역에서 활동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충북 창조경제혁신센터와 충북 로컬크리에이터 등 학교 밖 전문가와 인연을 맺고, 학교와 지역을 연결하는 많은 도전을 함께하며 ‘로컬크리에이팅’ 수업이 시작됐다.
나만의 방식을 찾아도 괜찮아
리얼월드러너에서 기획하고 실천하는 모든 활동에는 학생들이 지역의 자원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고, 지역의 환경, 문화, 사람들과 느슨한 연결로 이어지고,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생생하게 자신의 꿈을 그려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로컬 인사이트 특강, 로컬 인사이트 캠프, 모의 창업 프로젝트, 학교 밖 전문가 연계 프로젝트, 학교로 온 마을 축제 등을 진행하였다.
로컬 인사이트 특강은 지속 가능한 로컬의 삶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하는 청년 창업인과의 만남을 통해, 지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키우기 위해 기획했다. 우리 지역에서 자유롭게 꿈꾸고 상상해 보는 경험보다 좌절감과 부정적인 인식을 먼저 알게 된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지역에서 나다움을 지키면서 지역 공동체를 위한 변화를 만들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가치관’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 로컬 인사이트 특강: 로컬크리에이터와 함께하는 책 대화(괴산고등학교, 2023)
이상창(충주 세상상회 대표)님과 함께 『프리워커스』를 읽고 책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 지금은 일단 무조건 공부해야 하고, 여유를 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면, 대화를 나누고 난 후에는 조금 실수도 해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세상과 부딪혀 보며 나만의 방식을 찾아도 괜찮다는 가치관의 변화가 생겼다. 다른 로컬크리에이터와 협업하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멋진 결과를 만들어 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역을 변화시키는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 진태희 괴산고등학교 학생, 로컬 인사이트 특강 참여 소감
로컬 인사이트 캠프는 학생들이 직접 실제 세상으로 나가서 현장에서만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의미 있는 활동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다. 로컬크리에이터의 활동과 끈끈한 협업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으로 충주 관아골을 선택했다. 리얼월드러너 연구회의 교사들이 로컬과 학교의 만남을 꿈꾸게 된 장소이기도 했다.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서 관아골 답사를 통해 지역을 경험한 후, 팀에서 선택한 장소를 담당하는 로컬크리에이터와 협업하여 ‘장소를 지속 가능하게 브랜딩 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처음 만나 낯설고 어색했던 순간은 짧게 지나가고 친해진 아이들은 엄청난 열정과 호기심, 창의력을 발휘하였고, 깜짝 놀랄만한 큰 감동을 주었다. 학교 밖 전문가의 역할을 맡은 로컬크리에이터의 피드백을 직접 들어보는 활동도 이전에는 해볼 수 없는 좋은 경험이었다. 활동이 끝난 후, 아이들의 소감문에는 자신들이 제시한 아이디어가 실제로 그 장소에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로컬크리에이터에게 물어보고 싶은 지역을 변화시키는 활동에 관한 질문이 가득했다.
  • 로컬 인사이트 캠프: 충주 관아골 브랜딩 하기(2023)
충주 관아골에 있는 가게를 브랜딩 하면서, 나의 일을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추진한다면, 개인의 이익을 넘어 사회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다시 지역사회의 문제를 발견하고, 친구들과 협력해서 해결해 볼 기회가 있을까? 처음 다른 학교 아이들과 대면했을 때는 어색해서 힘들었지만, 프로젝트 하나로 뭉쳐서 같은 목표를 위해 활동하며 느낀 감정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못 잊을 것 같다. 학교로 돌아가서 친구들과 지역사회 문제를 찾고 지역의 특색을 발견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활동을 한다면, 캠프에서 느꼈던 기분보다 배로 즐거울 것 같다. – 정희수 봉명고등학교 학생, 로컬 인사이트 캠프 참여 소감
여러 활동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의 진지한 태도와 반짝이는 아이디어, 찐한 배움의 소감을 보고, 참여한 선생님들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껏 세상과 만나 자유롭게 상상해 볼 기회를 주었을 때 볼 수 있는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이 너무 놀라웠다. 학교에서의 배움을 세상과 연결하고, 학교 밖에서 찾은 궁금증과 도전 주제를 다시 학교 안에서 풀어보는 의미 있는 배움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나와 지역, 세상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수업
몇 년 동안 지역연계 프로그램을 실천하면서 쌓인 긍정적인 경험은 ‘교과서’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도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어, 영어, 수학처럼 정규 수업 시간에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배울 기회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로컬크리에이팅 교과서는 시의성 있는 지역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며 해결 방안을 직접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배움’을 실현하는 것을 중점에 두고 집필하였다. 로컬크리에이팅을 배우며 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지역 공동체와의 느슨한 연결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또한 지속 가능성을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역에 임시로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지역의 실질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더불어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사가 실제 현장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활동 기획 방법, 인적 및 지역 자원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방법, 자기 생각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법, 갈등을 유연하게 해결하는 방법 등 유용한 역량을 배움으로써 미래의 삶에 대비할 수 있다.
2023년 3월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집필을 시작한 로컬크리에이팅 교과서는 충청북도교육청의 고시 외 과목 신설 승인(2023.10.17.)을 받았다. 2024년에는 봉명고등학교, 충원고등학교에서 ‘로컬크리에이팅’ 과목이 개설되었고, 여러 학교의 공동 교육과정이나 학교 체험활동 프로그램에서 ‘로컬크리에이팅’ 교과서가 활용되고 있다.
올해 봉명고등학교 로컬크리에이팅 수업에서는 청주가 가진 ‘기록 문화’에 주목하여, ‘지역 잡지 제작’을 공동목표로, 팀별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아이들이 찾은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우리 동네 버스 여행, 어른들과 우리의 추억이 만나는 골목식당, 지역의 빈티지 숍 소개, 우리 지역 굿즈 만들기, 우리 동네 사진전 등 우리 지역을 소개하는 주제와 청소년의 연애, 청소년의 놀 공간, 피시방 문화 탐험, 키링 문화 소개 등 우리 지역 청소년들의 문화에 주목한 주제였다.
수업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기대에 부응하는 흥미로운 주제였다. 지역 잡지 제작을 함께할 로컬크리에이터 이옥수 원더러스트 대표도 아이들의 주제가 더욱 뾰족하게 ‘우리 지역, 청소년’에 집중될 수 있도록 조언해 주면서 많은 칭찬을 해주었다. 전문가의 칭찬은 아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앞으로 아이들은 팀원들 그리고 학교 밖 전문가와 협력하면서 자신들만의 결과물을 만들어 갈 것이다. 교사는 수업을 기획하고 아이들의 동기와 흥미를 이끌고, 필요한 자원을 찾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세상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 로컬크리에이팅 교과서
  • 로컬크리에이팅 수업 중 선생님과의 인터뷰(봉명고등학교, 2024)
교과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로컬크리에이팅 수업이 대학 입시를 위해서 스펙을 쌓기 위한 활동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이었다. 학교와 세상을 잇고자 했던 노력은 이미 많은 선생님이 굉장히 오랫동안 여러 수업에서 시도해 왔다. 로컬크리에이팅은 조금 더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집중하고 직접 경험하고 실천해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수업이다. 그동안 다른 선생님들의 노력도 이렇게 많은 의문에 답하며 꾸준히 이어져 왔을 것이다.
앞으로 ‘아이들이 지역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지, 아이들이 관심사에 집중하도록 돕기 위한 지원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로컬크리에이팅 수업 과정에 함께하고 싶은데 참여할 방법은 없는지’에 답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태지현
태지현
충북에서 지리 교사로 재직하며, ‘지역에 관한 관심과 애정’을 기를 수 있는 수업을 실천하고 있다. 현재 교사자율연구회 ‘리얼월드러너’를 운영하면서 여러 선생님과 함께 학교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있다. 학생들이 ‘나다움’을 발견하고 지역 자원을 활용하여 공동체를 위한 지속 가능한 문화를 창출하는 수업 그리고 지역에 뿌리내리고 자유롭게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업을 지향한다.
shtjh@naver.com
사진제공_리얼월드러너 인스타그램 @rw_lear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