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넘어지며 일어나는 종이다. 인간은 두 발로 걷기 위해 몸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직립보행의 모험 속에서 한 발이 넘어지는 순간 다른 한발을 내디뎌 나가는 법을 익혀왔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모든 위대한 이야기는 길을 떠나는 여정에서 시작되지 않던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어른이 되는 아이는 없는 것처럼, 사실 헤매거나 넘어지는 부분이야말로 이야기의 가장 매혹적인 부분들을 이룬다.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기억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아이들은 넘어지는 걸 못 견딘다. 넘어지는 건 걷기의 실패라 생각해서일까, 창피함에 얼른 일어나 홀로 쓰라림을 감내한다.
그 와중에 누구나 걷다 보면 넘어질 수 있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걸음걸이의 리듬을 익혔노라고 스스로를 ‘실패전문가’라 칭하는 이들이 있다. 없던 길을 내고 여럿이 함께 갈 수 있는 지도를 그리고 있는, 작년에 열린 <실패박람회 in 대구 – 실패 모아(more) 자산>을 공동기획한 레인메이커가 바로 그들이다. 사회적 이슈를 새로운 시각의 콘텐츠로 다양하게 풀어내는 13년 차 탄탄한 영상·디자인기업이자 아트디렉팅 팀으로 성장해 온 그들이 말하는 실패란 무엇일까. 실패를 이렇게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지까 궁금증을 안고 레인메이커협동조합의 이만수 대표를 만났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시작은 ‘지역을 떠나지 않고 여기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자’였다. 대학 시절, 영상을 전공한 이만수 대표는 주변 친구들이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을 때,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데 몰두했다. 무언가의 가치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일이었다. 동아리 친구, 후배들과 영화, 다큐멘터리를 찍다 23살 이른 나이에 창업을 했다.
당시 ‘문전성시’ 사업이 한창이었던 방천시장에 첫 둥지를 틀고 방천시장의 예술가들을 담는 다큐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지원사업이 종료되면서 예술가들이 참여하던 플리마켓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구에서는 보기 힘든 멋진 씬이라 생각했는데, 사라진다는 게 너무 아쉽더라고요. 계속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그냥 우리가 판을 열기로 했어요. – 이만수 레인메이커 대표
전공 시간에 배웠던 ‘씨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를 떠 올리니 해볼 만할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 창작자가 직접 다큐멘터리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금세 40여 팀을 모으게 되었고 점점 판이 커졌다. 어쩌다 시작했지만 서로 다른 창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너무 좋았고, 그들도 우리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기에 계속해서 플리마켓의 형태를 키워나갔고, 영상 작업으로 번 돈을 공간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좀 망해도 괜찮아
당시 지역에는 아트 플리마켓 플랫폼이라 할 만한 모델이 없었기에 맨땅에 헤딩하듯 공간을 구상하고 셀프인테리어로 꾸려나갔다. 1층에는 80여 팀 작가들의 물건을 판매하고 2층에는 전시나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했다. 위탁판매와 수익구조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덤벼들어, 애정으로 2년을 버텼다. 세어보니 그 짧은 기간 동안 진행한 프로그램만 230여 개가 넘었다. 부단히도 열심히 했었다. 그렇게 지금껏 공간에 대해 시도해 온 것만 7~8번이 넘는다. 대구 동성로 노른자 땅에 매장을 내 보기도 하고, 대형서점에 입점하기도 했다. 망할 때마다 영상이나 디자인작업을 해서 번 돈으로 메웠다. 매번 공간을 정리하면서 멤버들과 찍은 사진은 지금 봐도 짠하다. 시작과 끝이라는 마디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작년에 <실패박람회>를 준비하면서 돌아보니 이제까지 저희가 시도했던 것들이 정작 ‘진짜 실패’라는 느낌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유머러스하게 ‘망했다’라고 얘기한 적은 있는데, ‘실패했어, 나 어떡하지?’ 이런 생각은 조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돈을 많이 날리긴 했지만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하는 거죠.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재미를 잃진 않았으니까. 우리 스스로를 ‘실패전문가’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 과정들을 별로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 거 같아요. 왜냐하면 그 뒤가 있었으니까요.
사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기준은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잣대와 달리 어떤 대상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에 얼마만큼 다가갔느냐에 달려있다. 계속 넘어진 채로 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이에게 고정된 실패값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는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하는 바에 의해 유동적으로 호명되어 훌륭한 경험과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 2022 대구 실패박람회 홍보용 카드뉴스

  • <만남의 광장> 시각장애인 혜경 편 [출처] 대화의장 유튜브
실패 모아 자산, ‘대화의 장’
몇 번의 공간실험이 망(?)하고, 임대료로 날려 먹은 돈을 계산해 보니 만만치 않았다. 계속 이렇게 전전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북성로 부근, 어르신들이 주로 가는 노포가 즐비한 좁은 골목길 사이에 자리한 공간을 찾았다. 입구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만큼 엉망이었지만, 이를 헤치고 그곳에 들어선 순간 매료되고 말았다. 서로 다른 근대건축물과 한옥 그리고 창고가 한데 어우러져 묘한 아우라를 풍겼다. 어딘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 같았다. 이곳이 1920년대 지어진, 과거 ‘대화장 여관’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멤버들과 장난스레 ‘대화의 장’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말을 주고받다 현실이 되었다. 때마침 받은 우수마을기업 경진대회 상금과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도시재생씨앗융자를 통해 드디어 쫓겨날 걱정 없는 공간을 마련했다.
당시 용역이나 지원 시스템, 행정 관계에 대해 지친 상태였어요. 눈치 보며 못 했던 일들도 맘껏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오롯이 담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그간의 콘텐츠, 플리마켓 창작자 인프라와 노하우, 공간운영 경험 등이 ‘대화의 장’을 브랜딩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장르나 매체를 가리지 않고 하이브리드한 방식으로 경계를 오가며 했던 일들이 새로운 길을 터준 거죠.
형식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방법들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과정이 늘 유쾌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영상만 하지 않고 왜 이렇게 다양한 걸 하냐는 질문을 받기도, 때론 일부러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를 건드리는 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콘텐츠를 만들다 보니 대부분의 경우 편견에서 출발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다 우리는 왜 편견이 적을까 생각해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자리들이 많았더라고요. 예술가, 시민운동가, 장애인, 비건, 성소수자, HIV감염인 등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훨씬 더 쉽게 오해가 이해로 바뀌고 편견이 발견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돼요. 그 어떤 콘텐츠보다 위대한 게 대화라는 걸 느꼈죠. 그래서 이 공간을 구상할 때 다양한 대화가 펼쳐질 수 있는 유기적 구조를 고민했어요.
대화의 장을 단순히 카페나 식당이 아닌 ‘다양한 이들이 한데 모여 낯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한 이유다. 대화의 장은 ‘낯선 대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 익숙하지 않은 대화가 일어나도록 비일상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으로 연출했다. 대화빌라, 대화광장, 대화의 꽃, 대화주방, 대화강당, 대화살롱의 주제별로 구성해 이곳에 오는 누구나 이 공간에서만큼은 실컷 고정관념을 벗고 대화를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 ‘대화의 장’ 굿즈 대화카드

  • 대화의 장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이유
실패로 여겨질 수도 있었던 경험들은 또 다른 순간에 활동을 확장해 나가는 자양분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나가는 것, 없던 길을 만드는 과정에 그 어떤 경험도 무용한 것은 없었다. ‘그때 우리 되게 부끄럽고 좀 짠했다.’라며 동료들과 웃어넘길 수 있는 이유다. 지역을 떠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건 함께 하는 동료들과 다음 단계의 ‘우리’를 만들어 가고 있어서였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멤버십이 변하지 않은 채 함께해 온 동료들이야말로 레인메이커의 유니버스를 확장하는 과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지금도 자주 의견 차이로 치열하게 싸우지만, 한 번도 분배 문제로 싸워본 적은 없다. 각자의 것을 따지기보다는 함께 만들어 가는 세계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시도와 과정들을 돌아보면 어떤 세계관이 형성되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사실 새로운 걸 시도한다는 게 부담감이 없을 순 없죠. 물론 시도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시도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겠죠. 어떤 것들은 다른 무언가와 만나 다시 쓸모가 생기기도 하거든요. 그걸 다음에 또 다른 사회적 문제랑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흥미롭고 재밌어요. 앞으로는 어떻게 나아갈지, 어디까지 뻗어갈지, 어떤 사람들을 더 만나게 될까 궁금해요.
최근에는 대구시로부터 공간을 위탁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37년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자본에 맞서 민족자본으로 지어진 대구 최초의 백화점인 ‘무영당’을 시각예술, 공연예술, 미디어아트, 그리고 브랜드의 접점에서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넘나들며, 로컬문화와 대중문화를 새롭게 정의하고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는 ‘복합문화백화점 무영당’으로 리브랜딩했다. 복합문화공간 플랫폼으로 비건카페, 팝업스토어, 쇼케이스 공간, 라운지와 루프탑 등으로 구성했다. ‘협동조합의 협동조합’이라는 개념으로 여러 지역문화 주체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회적 모델을 실험 중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개척자’ 같은 느낌으로 일을 하는 것 같아요. ‘개척자’라는 게 멋진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사실 되게 불안해요. 그런데도 일단 지르는 거죠. 우리 지역사회와 예술가, 청년들이 다 같이 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으니까요.
오늘도 그들은 지역을 떠나지 않고 지역에서 청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있다. 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처럼, 그들이 내딛는 곳마다 무지개가 피어오르기를, 그리고 새로운 싹이 트고 꽃이 피기를. 친애하는 동료이자 동네 이웃이기도 한 그들의 다채로운 행보를 응원한다.
안진나
안진나
도시의 다양한 레이어를 파고들며, 잊혀진 기억을 불러들이고 사라져가는 문화를 기록하고 현재와 이어 나가는 일을 한다. 이를 통해 지역이 총체적으로 읽히고 해석되며 다시 이야기되길 바라고 있다. 현재 대구 북성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도시야생보호구역 훌라HOOLA’의 디렉터를 맡고 있다.
인스타그램 @rageyen
사진·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제공_레인메이커 협동조합 @rainnnaker
레인메이커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