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가을 색이 완연한 어느 날, 노란 들판을 지나 속리산 자락 법주사와 정이품송을 향해 난 길로 한참을 따라가니 작고 아담한 초등학교가 보인다. 1930년 개교하여 93년 역사를 자랑하는 속리초등학교다. 오늘은 월요일, 전교생이 다 함께 뮤지컬 수업하는 날이라 여울마루(강당)가 떠들썩하다. 속리초등학교가 만든 창작 뮤지컬 <1893.보은의 봄> 연습이 한창인데, 사또와 양반 역을 맡은 2학년 동생들이 숨바꼭질하는 동네 꼬마 역할을 하는 6학년 언니들에게 시끄럽다며 혼구녕을 낸다. 성별도 나이도 개의치 않는 젠더프리(gender-free)에 에이지프리(age-free) 캐스팅이다. 괜히 거들먹거리며 훼방을 놓는 사또와 양반들에게 동네 꼬마들은 양반이니 평민이니 하는 신분 따위는 모른다고 해맑게 대꾸한다.
“아니, 사또 나리를 모른다고?” “난리(나리) 아저씨라고요? 우린 몰라요, 메롱!”
지역의 역사를 뮤지컬로 배운다
연습 장면을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 내뱉는 대사가 예사롭지 않다. 땅을 빌려주고 높은 소작료와 고리대금을 받는 양반 지주와 양반 편만 드는 사또, 신분의 차이가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아빠, 아빠를 찾아서 동학군이 모인 보은으로 떠나는 주인공 등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썩 와닿지 않거나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 수는 있지만, 그 뜻을 헤아리고 새기다 보면 또 다른 배움을 얻을 만한 이야기였다. 예술꽃 새싹학교를 담당하는 김욱동 선생님께 어떻게 이런 내용으로 뮤지컬을 만들게 되었는지 여쭤보니, 작년부터 예술꽃 새싹학교와 함께 ‘학교예술교육을 통한 지역 역사 감수성 기르기’를 주제로 충북교육청 지정 문예체교육 연구학교를 겸하면서 지역의 역사를 뮤지컬로 경험하게 하고 있다고 답했다. 작년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사적인 보은 삼년산성의 설화를 바탕으로 <삼년산성 이야기>를, 올해는 동학군의 ‘보은취회(報恩聚會)’ 1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1893.보은의 봄>을 만들었다.
연기 연출 선생님, 소품 선생님, 그리고 노래 율동 선생님 세 분께서 지금 각각의 파트에서 중요한 부분이나 미진한 부분, 보충해야 할 부분을 아이들과 연습하고 있어요. 10월부터는 아이들 모두 여울마루에 모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연습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 4번 정도 전체 연습을 하고 나면 11월 7일 보은문화예술회관에 올리게 됩니다. – 김욱동 예술꽃 새싹학교 담당 교사
<행복한 보은씨> (2020)
[출처] 속리초등학교 유튜브
[출처] 속리초등학교 유튜브
뮤지컬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린 지 벌써 6년 차. 2018년 <라이언킹>과 <브레멘 음악대>의 일부 장면을 구성하여 발표한 것을 제외하고는 매년 새로운 주제로 창작 뮤지컬을 만들고 있다. 2019년 <소확행>이나 2020년 <행복한 보은씨>처럼 아이들의 꿈에 관한 솔직한 생각을 담기도 했고 2021년 <미래를 찾아서>는 오염된 지구의 모습을 학생의 시각에서 재밌게 그려내기도 했다. 뮤지컬을 만드는 과정은 대강 이렇다. 먼저 올해의 주제와 소재가 정해지면 대본을 의뢰한다. 이때 아이들의 생각과 의견이 반영되기도 한다. 대본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오디션을 치른다. 작년엔 ‘쇼미더속리’, 올해는 ‘팬텀속리’라는 이름으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치열한 오디션을 열었다. 각 역할과 대사, 지문 등을 제시한 후 약 3주간 여유를 두고 오디션을 치르는데, 극 중의 노래를 골라서 부르기도 한다. 지원자가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3지망까지 제시하고 그래도 배역을 정하기 어려울 때는 선생님들이 다 같이 모여서 협의하여 역할을 나눈다. 여름 방학에는 3일간 캠프를 열어서 다 같이 모여 집중 훈련을 한다. 전교생이 모두 여울마루에 모여 합을 맞추는 첫 시간인 캠프는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2학기 시작과 함께 본격적인 무대 준비가 이뤄진다. 이렇게 월요일마다 뮤지컬 하는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어떤 느낌일까?
1학년 때부터 뮤지컬을 했고, 뮤지컬 활동을 하는 우리 학교가 정말 좋아요. 그중에서도 3학년 때 했던 <행복한 보은씨>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제가 주인공도 아니고 악역을 맡았었지만 노래도 대본도 우리의 꿈을 담아서 그랬나 봐요. 내년에 중학교에 가면, 음, 여기 와서 엑스트라로 돌멩이나 해야죠. – 6학년 유하랑
모든 활동이 다 재밌지만, 그중에서도 그림 그리고 소품 만드는 게 제일 재밌었어요. 올해는 사또 역할을 맡았는데 비중은 작아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11월에 큰 무대에 올라간대도 하나도 안 떨려요. – 2학년 이동혁
다양한 예술 경험으로 깨운다
속리초등학교는 왜 연기뿐 아니라 노래와 춤, 무대 배경과 소품도 갖춰야 하는 뮤지컬을 선택했을까? 원래 있는 뮤지컬 작품을 연습해서 무대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게다가 ‘창작’ 뮤지컬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김욱동 선생님과 예술강사 세 분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여러 이유 중에서도 다양한 아이들의 관심과 요구를 다 담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컸다. 뮤지컬은 종합 예술인 만큼 모든 예술 분야를 다 경험해 볼 수 있는 데다 연기와 노래, 율동, 그림과 만들기 등 아이들이 각자 원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아줄 수 있어서 선택했다는 것이다.
다른 학교에서는 기존에 있는 노래를 연습한다거나 학예회처럼 반별로 혹은 아이들 몇 명씩 나눠서 연습하는 경우가 많은데, 속리초등학교는 전교생이 다 같이 학년 구분 없이 참여한다는 게 특별한 점인 것 같아요. 대본도 새로 창작된 대본을 받아서 작업하고 소품도 아이들이 직접 만들고 노래 가사도 노래 선생님이 아이들이랑 직접 써요. 배역이 정해지면 아이들이 직접 캐릭터 분석도 하고 연기에 관한 의견도 많이 내요. – 김지원 연극 뮤지컬 예술강사
오전에는 학년별로 나눠서 도서실에서 소품 만들기를, 5, 6학년 교실에서 노래와 율동을, 여울마루에서 연기와 동선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만드는지 궁금해서 도서실을 기웃거려 보니, 임금의 어좌 뒤편에 놓이는 ‘일월오봉도’를 4폭으로 나눠서 그리는 데 열중하느라 구경꾼이 들어온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함께 그린 그림은 무대의 배경으로 사용될 것이다. 소품과 무대 배경을 담당하는 이지혜 예술강사는 속리초 예술꽃 2년 차부터 함께했다. 처음엔 뮤지컬 소품이라는 걸 본 적도 없어서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움직이던 아이들이 이제는 신문지 안에 옷걸이로 심을 만들면 더 단단한 형태를 만들 수 있다거나, 소품을 더 크게 만들어야 객석 뒤에서도 잘 보일 거라는 등 재료를 제안하고 아이디어를 내놓는 게 뿌듯하다고 하셨다.
다른 데선 내 그림, 내 종이접기를 한다면, 속리초 아이들은 다 같이 완성하는 경험을 해요. 소품을 하나 만들 때도 1학년이 그림을 그리면 2학년이 색칠하고 3학년이 뼈대를 만들고 4학년 5학년이 또 다른 재료를 덧붙이고 6학년이 마무리해요. 별것 아닌 것도 모두 함께한다는 게 가장 다른 점이죠. 그래서인지 배려가 아이들 몸에 배었어요. – 이지혜 공예 예술강사
노래와 율동을 연습하는 아이들도 웃음기를 쫙 빼고 진지하게 막바지 연습에 임하고 있었다. 1막에 참여하는 2, 4, 6학년은 오후에 다 같이 여울마루에 모여 동선과 합을 맞춰볼 예정이다. 영상 촬영도 하면서 세세한 부분을 점검하고 더 연습이 필요한 부분은 꼼꼼하게 피드백한다. 뮤지컬에서 노래와 율동을 이끄는 김수현 예술강사는 예술꽃 첫해부터 지켜본 원년 멤버다. 해마다 정해진 주제에 따라 아이들의 꿈과 희망, 미래와 환경, 역사를 담은 노래 가사를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왔다.
1, 2학년 때 눈에 띄지 않았던 친구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게 보였어요. 소극적이던 아이들이 조금 더 활발해지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보통 4, 5학년쯤 되면 배역에 대한 욕심도 커지고 ‘이제 나도 한 번 할 때가 되었구나’ 싶어지는 것도 있어요. 소규모 학교라고 해도 비슷한 학년끼리 어울리는 법인데, 여기선 선배가 후배를 돌보고 챙기는 게 당연한 것처럼 분위기가 잘 만들어졌죠. – 김수현 음악 예술강사
이처럼 숨 쉬듯 뮤지컬을 접하는 속리초 아이들의 표정은 무척 밝았고 낯선 구경꾼들 앞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혹시 예술을 통해 아이들이 변화한 점이 있는지 김욱동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예술꽃 4년 차에 부임했던 터라 아이들은 그때도 이미 달라 보였다고 한다. 체육 시간에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친구를 놀리고 약 올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며 일으켜 주러 달려가는 아이들이 요즘 몇이나 되겠냐고 되물었다. 발표할 때도 누구나 다 들을 수 있을 바르고 정확한 말투로 자신감 있게 했다. 뮤지컬을 하면서 자기 표현력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액션과 리액션 연기를 해보면서 나 혼자만이 아니라 상대방을 살피고 배려하는 태도를 깨우친 것 같다고도 했다.
개인적으로 예술을 새롭게 여기게 되었어요. 속리초에 있으면서 예술의 힘이 아이들을 새롭게 바꿀 수 있구나, 아이들이 정말 행복해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범주를 벗어나서 새로운 것들을 바라보게 되고, 아이들을 위해서 다른 것에도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 김욱동 예술꽃 새싹학교 담당 교사
지역사회와 함께 자란다
속리초등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 뮤지컬 수업을 팬데이(FAN DAY)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속리 가족(Family)과 함께, 예술(Arts)이 있는 교육과정, 이웃(Neighbor)과 함께하는 문화예술’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학부모뿐 아니라 이웃과 지역사회에서도 속리초등학교의 학교문화예술교육 활동을 지지하고 있다. 벌써 6년째 이어오는 ‘속리 판타지 뮤지컬 발표회’는 보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공연장인 보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만큼 전교생 가족뿐 아니라 인근 학교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지역 어른들을 초대하고 있다. 병설 유치원 동생들도 찬조 출연으로 귀여운 모습을 뽐낸다. 이렇게 큰 무대에 서서 친구들과 합을 맞추고 박수를 받는 경험은 이제껏 연습한 고생을 모두 잊고 또 다른 도전을 향해 설레는 마음을 갖게 한다.
속리초등학교 예술꽃 새싹학교는 학교 인근 산업단지에 새로 이전한 기업에 근무하는 직원과 가족들이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후에 이곳 주민과 함께 어울리고 문화적인 수요를 채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속리 판타지 뮤지컬 발표회’를 계기로 지역 어른들이 장학금을 내놓기도 한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네 어르신이 “아이고, 노래 참 잘하더라!” 하시며 아이들에게 칭찬을 건네기도 한다. 무대 분장은 학부모님들이 담당해 주신다. 예술꽃 첫해부터 학부모 동아리를 운영 중인데, 틈틈이 새로운 예술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분장 연수도 받으면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삼년산성 이야기>를 할 때 아이들 얼굴에 그려진 주름살과 흰머리도 학부모 동아리 회원 작품이다. 처음에 머뭇거리던 것과 달리 지금은 수준급의 분장 실력을 자랑하며 오는 11월 7일에도 과감한 붓 터치를 선보일 예정이다.
아이들은 가정과 학교 울타리뿐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지역사회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을 자연스럽게 경험하며 자라야 다른 사람들이나 지역사회에 감사하고 베풀 수 있을 테니까요. 내년에 예술꽃이 끝나도 예술교육을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 선생님들이 여러 공모사업에도 신청하고 애를 많이 쓰고 있어요. 작은 학교에서 인력지원도 없이 다양한 활동을 만들어 내느라 힘들지만 그만큼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니까요. – 문은경 교장
예술꽃 새싹학교 지원이 끝난 후에도 속리초등학교의 학교문화예술교육이 지속될지 궁금했는데,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안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에 선생님들이 힘을 내서 공모사업에 지원하고 예술교육을 이어갈 방안을 만들었다. 예술꽃 씨앗학교를 시작한 후 담당 교사가 두 번이나 바뀌고 교장 선생님도 새로 부임하셨지만 아이들을 위하는 선생님들의 마음은 달라진 게 없다. 어느 한 사람의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 다 함께 모색하고 합심해서 만들어 온 학교의 특색이다. 그러면서 2018년 전교생 31명에서 올해는 52명으로 학생 수도 많이 늘어났다. 여전히 전학 문의도 많이 온다. 예술꽃 씨앗‧새싹학교 지원사업은 이렇게 학교를 튼튼히 하고 풍부한 교육과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른 봄 심은 씨앗은 싹을 틔워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다. 속리초등학교가 키우는 예술꽃 나무도 새콤달콤한 향기를 내는 크고 작은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중 가장 크고 좋은 열매는 아직도 익어가는 중일지 모른다. 더 빨리 수확의 기쁨을 안고 싶은 어른들의 덧없는 마음과는 달리 천천히 제 속도로 영글며 속을 꽉꽉 채워가고 있을 것이다. 예술꽃 나무의 뿌리가 튼튼하고 줄기가 시원하게 뻗어 모양 좋게 잘 익어가고 있으니 틀림없이 좋은 열매가 될 거라는 믿음은 변함없다. 이 열매가 무르익으면 그 속에 깊이 새겨진 예술의 DNA로 새로운 씨앗을 품고 꿈을 펼칠 것이다. 아이들은 초등학생 시절 매주 월요일을 뮤지컬과 함께 신나게 보냈던 추억을 품고 씩씩하게 자랄 것이고, 삶의 어느 순간엔가 오늘의 기억이 힘이 될 것이다. 정성스레 키우고 가꾸며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이 될 뿐이다.
- 남은정
- 프로젝트 궁리 기획자
페이스북 @archive0721 - 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프로그램 사진 제공 _ 속리초등학교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3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예술이 꽃을 피워 알찬 열매를 맺기까지
속리초등학교 예술꽃 씨앗‧새싹학교 6년의 성과
공감이 갑니다
예술이 꽃을 피워 알찬 열매를 맺기까지
속리초등학교 예술꽃 씨앗‧새싹학교 6년의 성과
기대만점입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진지한거 같아요~
오랜 연습을 통해서 한편의 뮤지컬이 만들어질텐데, 매일같이 연습하는것도 힘들었을텐데, 잘 이겨내고, 멋진 공연을 한거 같아서, 미소가 지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