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할배 쫌 웃긴다! 말인즉슨 멋지다는 거다. 이빨이 다 빠졌으니 직접 보지 않아도 합죽이 얼굴일 게 뻔한 그는 오물거리는 입으로 연애소설을 한 줄 한 줄 읽는다. 틀니가 있지만, 아름다운 사랑 언어에 빠져서 틀니 끼우는 것도 잊었을 것이다. 물론 내 추측이요, 주장이다. 나로선 틀니도 없이 음절과 단어 하나하나를, 문장을 오물거리며 음미하는 노인의 모습이 훨씬 더 멋지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주인공 이야기다. 자신이 글을 쓸 줄은 몰라도 읽을 줄은 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 이 노인의 낮과 밤은 연애소설 읽기에 풍덩 빠져버렸다.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다. 연애하는 주인공들의 심장 박동을 고스란히 자기 심장에서 느낀다. 울고 웃고, 가슴이 두근거려 안절부절못하다가 벌떡 일어나 짐짓 태연한 척 먼 구름을 바라보며 큰 숨을 내쉬기도 한다. 이것은 나의 다소 범속한 상상이다. 정치적 투쟁과 풍자에 깊은 언어철학과 생태적 삶이 안감을 대고 있는 이 책에서 노인의 연애소설 독서는 훨씬 더 진정성이 있다.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그는 읽고 또 읽는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정성껏, 진지하게 음미하고 또 음미한다. 그 문장이 빚은 생각과 느낌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웃기고 멋진, 남다른 노년의 형상
이 소설을 쓸 때 루이스 세풀베다는 마흔 살이었다. 이미 20대부터 그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었다. 피노체트 정권에 맞서고 갇히고 형을 선고받고 도피하고 방랑하고, 그리고 아마존 원주민과 함께 한 시간은 이 소설의 모든 곳에서 발언하고 있다. 언어는, 특히 ‘아름다운’ 언어는 생명과 생태를 파괴하는 독재와 자본의 야만에 맞서는 힘이라고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말하고 싶어 한다. 왜? 아름다운 언어는 읽는 이들을 감동케 하고, 이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디로? 해야 할 결단과 행동으로, 공생과 공진화로. 가장 아름다운 언어, 가장 강력하게 이동시키는 언어는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 사랑의 언어다. 그 언어를 한 음절 한 음절 음미하듯 읽음으로써 읽는 이도 사랑의 언어를 함께 말하고 듣고, 사랑의 힘을 함께 생성한다.
수없이 많은 예술가가 ‘사랑하는 노인’을 창조했지만(물론 거의 다 남자가 쓴 남자 이야기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그 어떤 소설보다 혁명적이다. 혁명과 에로스와 언어의 근본적 얽힘 자체는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세풀베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에 주목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언어를 행한다. ‘들린 상태’에서 수행하는 언어하기다. 김혜순 시인은 여성의 ‘시하기’가 바로 이 들린 상태에서의 언어하기라고 말한다. 세풀베다의 노인은 이 들린 상태에서 발화되고 있는 사랑의 언어를 제대로 맛보고 싶어 한다. 그래야 파괴와 폭력(의 언어) 너머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쓸 줄은 몰라도 읽을 줄은 아는, 이빨 빠진 노년 남성. 이빨이 몽땅 빠졌으니 그에겐 공격적으로 정복과 약탈을 향해 질주하는 거친 남성성이 없다. 상징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다분히 그렇다. 쓸 줄은 모르고 읽을 줄만 알기에 그는 청자로서 언어 행위에 참여한다. 그러면서 연애소설 읽기에 진심이다. 이런 노년 남성의 형상화, 의미심장하다. 세풀베다는 이후 지속해서 환경문제나, 인간을 비롯해 서로 다른 종 간의 평화로운 공생, 공진화(共進化)를 탐색한다. 어떤 노년 이미지를 형상화하는가는 우연한 일회성 발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향해 살 것인가를 창작자의 자리에서 질문하고 답하는 문제임을 그의 예에서 확인하게 된다.
기억할 만한, 거듭 되돌아가 만나고 싶은 노년 형상은 너무나 드물다. 젠더 요소를 괄호 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다. 창작자는 세상에 없는 것을 상상의 힘으로 보이고 들리고 맛보고 만지고 냄새 맡게 하는데 남다른 열정과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AI가 갖지 못한 게 이 열정과 재미 아닐까. 사회가 천편일률적인 표상과 감각을 강요할수록 우리에게는 창작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뜬금없고, 비논리적이고, 매우 기이하며 특이한 상상의 파장이 그립다. 지금처럼 고령자나 노년의 이미지가 ‘성격(character)’이 아닌 ‘성공’의 조명 아래 나열되고 전시된다면, 노화와 노년에 대한 상투적인 이해, 아니 오인은 더욱 손쉽게, 더욱 지배적으로 재생산될 것이다. 그 결과는? 매 순간 늙어가는 모두, 청년이든 중장년이든,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도둑맞거나 모욕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마지막 단계는 이전의 어떤 단계보다 길다.
노년과 함께 있기/함께 하기
“그러니까 서양에서 돌 만드는 여자 이야기이구먼.”
“용하네. 돌을 줍거나 쌓기만 했지, 만들 생각은 못했는데.”
“아무나 막 돌로 만들면 그것도 곤란하지.”
“왜 접때 미선 형님네서 돌판에 고기 구우니까 안 좋든가.”
한 젊은 여성 문화기획자/창작자가 할매들과 문화예술로 놀고 배우고 생각하고 말하는 시간을 꾸린다. 이번 주제는 ‘메두사 신화’다. 인생을 꽤 길게 살아낸 여자들이 모였으니, 욕망하는 여성에게 퍼부어지곤 하는 저주와 처벌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그런데 할매들이 즉흥적으로 쏟아낸 말들은 메두사를 처벌받는 불행한 여자에서 돌 만드는 여자로 변신시킨다. 그렇다면 막강한 위력의 소유자 아닌가? 이 위력의 결과물인 돌에서 할매들은 고기 굽기에 딱 맞춤인 돌판의 쓰임새를 발견하기도 한다. 기가 막힌 환유의 고리다! 저자인 김지승처럼, 책을 읽던 나도 파안대소했다. 그야말로 깔깔깔 클클클 웃었다. 웃음의 끝자락에선 눈꼬리에 눈물도 맺혔다. 심각하고 중요한 주제를 두고 할매들과 토론할 때 어떤 말이 튀어나오는지, 어떻게 의도된 해석의 지평을 뒤흔들며 전복적인 해방의 길을 여는지, 그것도 얼마나 통쾌하게 가볍게 한방에 해내는지! 김지승의 『술래 바꾸기』는 할매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할매의 세계에서 자신을 계속 새롭게 다시 만나는 한 젊은 여성 문화예술인의 이야기다.
『술래 바꾸기』는 그가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단순히 만난 게 아니라) ‘겪은’ 할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겪었다는 것은 할매의 시간 속에 자신의 시간을 풀어놓았다는 뜻이다. 그는 할매들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빠짐없이 기록하려 애쓴다. 그 말을 지탱하고 있는 살아낸 삶의 너비와 깊이를 온전히 만나고자 조심스레 더듬이를 뻗는다. ‘늙는다는 건, 기억이 머리에서 내려와 더 깊은 거처로 옮겨지는 거야. 그래서 손이 떨리는 거지.’ 이런 말은 몸으로 사는 인생의 비밀스럽고 또 범속한 의미 속으로 은밀하게 열리는 길이다. 노년이, 특히 할매가 들려주는 말이 얼마나 비밀스러우면서도 범속한 의미로 가득한지 노년들과 비교적 자주 만나는 나 역시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끊어지기 쉬운 실 같아서 주의 깊게 잘 당겨야 한다. 범속한 외관이어서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늙어감은 특히 시간의 이야기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김지승의 글은 단지 할매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게 아니라, ‘할매와 함께 있기/함께 하기’가 ‘나로 있기/나로 하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는 할매 한 명 한 명과 온전히 함께 있으려, 함께 하려 한다. ‘함께’의 형태는 나의 준비와 할매의 반응 사이에서 조율되고 협상한다. 이 조율과 협상의 리듬에는 침묵 속에서 전달되는 부탁도 있다. 인생을 앞서 살았으니, 내가 지금 처한 이 혼돈에서 붙잡고 나갈 수 있는 실이 되어 주세요, 할매. 나의 아리아드네가 되어 주세요, 할매.
노년을 ‘위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여기저기서 많이 기획된다. 그러나 노년 한 명 한 명을 하나의 특이한 세계로 만나지 못한다면, 이 위한다는 건 얼마나 헛되고 위협적인가. 사회가 행정적으로 범주화한 집단으로서의 노년에게 그냥 친절하거나 다정하거나 잘하려 애쓰거나 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각성과 훈련이 필요하다. 노년을 무엇보다 친절함이 필요한 외롭고 약한 ‘늙은 어린아이’로 ‘대접’하는 건 선량한 비노년이 빠지기 쉬운 덫이다. 문화예술 작업자들이나 노년과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 덫을 직시하며 넘어서는 방법을 탐색할 것이다. 나로선 노년과의 만남을 삶과 죽음에 관한 나의 질문과 연루시키는 것이 이 덫에 빠지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게 노년과 내가 서로를 비추는 시간의 거울이 됨으로써 삶의 전망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65세가 되는 나는 이제 노년 당사자의 자리에서 더 많은 더 새로운 더 특이한 상상력의 시도를 기다린다.
김영옥
김영옥
늙어감에 관한 페미니스트 성찰과 지각의 언어를 정교하게 만들고 다원화하는데 관심이 많다. 돌봄을 인권의 관점으로, 인권을 돌봄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로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이미지 페미니즘』 『노년은 아름다워』 가 있고, 공저로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제로의 책』 등이 있다.
daimon3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