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남매 큰딸이자 엄마와 아내와 주부였고, 사회운동 판에서 35년여간 여성 활동가로 살고 있고, 그중 10년은 임금노동 시장에서 최저임금 시급 돌봄 노동자로 밥을 벌어왔으며, 최근 10여 년은 “돌봄”에 대해 글 쓰고 강의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아니 그래서 더더욱, 나는 돌봄이라는 단어와 계속 불화 중이며 여전히 재해석 중이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통과하며 “돌봄”이 더 중요해졌다지만 오히려 더 문젯거리가 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돌봄에 관한 숱한 담론과 전망이 왈가왈부 되는 판에 숟가락 하나 얹은 사람으로서, 우선 나부터 인식보다 먼저 닥치는 느낌은 말초적 거부감이며 불화니 재해석 이전에 일단 지긋지긋하다. 요행히 독거노인이 되어 예순일곱인 지금, 가부장제고 가족이고를 다 떠나 나 하나만 끓여 먹고 치우고 사는 초간단 살림살이조차도 때론 지겹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굼떠지는 몸 탓 이전에 여자라는 이유로 생애 내내 내게 떠넘겨졌던 돌봄 노동이나 역할들 때문이리라.
더럽고 징그러운 노동에 관한 기록
“돌봄”이란, 발음이 주는 느낌처럼 매끄럽거나 착하지도 않고, 균일하거나 순환적이거나 상호적이지도 않다. 징그럽고 불가해하지만 불가피하며, 뒤죽박죽이고 좌충우돌인 지난한 과정이다. 살덩어리와 늘어진 살 껍데기, 근육과 뼈, 피와 오줌과 똥, 검버섯과 살비듬, 깊은 주름 골과 그 속 씻겨내 지지 않는 때와 냄새, 역겨움과 구역질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해봐야 하는 노역이다. 족(族)과 권력관계와 돈으로 엉킨 상처를 다시 덧내 소금을 뿌려대는 일이다. 낡은 사진과 묵은 기억과 켜켜이 얽히고 꼬인 족들 간의 애증, 짜증과 원망과 기껏해야 동정, 자책과 후회의 뒤엉킴에도 불구하고 또 다짐하고 시작하며 다시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기를 반복하는 폐색(閉塞)의 고역이다. 특히 노인 돌봄은 성장이나 새로움은 없이 죽음을 향한 노쇠와 추락 곁에서 같이 지치고 늙어가는 일이며, 피고름을 계속 짜내도 심해지기만 하는 욕창과 씨름하다가 드러난 뼈가 삭고 썩어도 아직 숨이 붙어 있다가, 드디어 어느 날숨 후 들숨이 오지 않아야 끝나는 막장이다.
생산성도 효율도 보람도 없고 자국도 안 나지만 무급이나 최저임금으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어서, “사랑”이라는 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추상명사로 포장해 버린 유령 노동이다. 물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매 가능한 노동들이다. 구술생애사 작가로서 내가 기록한 늙은 여자들 대부분의 생애는, “돌봄”이라는 사회적 명명이 없던 시대부터 “착한 여자”라는 미명으로 몸과 감정과 능력을 착취당하고 채굴당하다 마침내 진이 빠지며 죽어갔다. 그들과의 구술생애사 작업 목적 중 하나는, 성별과 계급으로 인한 불평등에 대한 개인과 시대의 한계 속에서라도 그녀들의 욕망과 성공, 실패와 배반이 뒤엉킨 성취와 한계를 찾아내고 분별하여, 기록으로라도 남겨 당대와 후대의 사람들에게 고발하고 복수하자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챗GPT가 논문과 칼럼, 예술과 학문, 문학과 구술 인터뷰도 야금야금 장악해 들어오는 시절이다. 하지만 발달장애·정신장애·인지장애인들의 앞뒤 없고 와해된 말들, 못 배운 사람들의 문법과 맞춤법 따위와 상관없는 어눌해서 더 간절한 말들, 숱한 폭력과 억압으로 심한 말더듬이가 된 사람들의 말들은, 그 쓸모없음과 해석 불가능으로 인해 인공지능의 관심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소수자성이 깊고 켜켜이 겹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섣부른 기록 이전에 우선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자질구레하고 흔해빠진 일상과 말과 움직임을 흘려버리지 않고 관찰하며, 그 내면의 흐름과 분열과 혼돈을 얼버무리지 않고 뒤져 의미와 처지를 탐구해야 한다. 정상성의 구태와 폭력을 향해 생생한 날것의 쌍욕으로 대항하지만, 시끄럽다며 쓰레기로 취급되어 쓸어 내버려지는 “비정상”의 말·말·말들을 세세히 주워 모아다, 그 말들 안에서 그들의 진실과 사회적 사실들을 찾아나가야 한다.
화자와 청자 / 주와 객 “사이”가 계속 밀고 당겨지며, 뒤엉키고 헷갈려다가 겨우 진전되다가 수시로 퇴행하면서,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친밀감을 쌓아가면서, 무수한 반복과 무심한 듯 끈기 있는 대화로 다시 묻고 뒤집어 깊게 질문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떨리고 느려터진 말과 말 없음과 고갯짓과 표정을 통해 그들의 생애 경험과 상처의 내력들이 조금씩 보이고 혹 소통도 가능해진다. “미친 여자”의 깨진 말들, 의미가 되지 못하지만 의미를 찾아 헤매는 그, 저기, 긍께, 거시기, 머시냐 류의 말들, 흐트러지고 웅얼거리는 소리와 말들 속을 함께 헤매면서라야, 그들의 말과 의미와 생애를 차차 알아듣게 되어 글이나 여타 수단으로 기록해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사고팔기 위한 상품이 아니고 상품이 될 수 없는, 늘 과정 중에 있는 작업이다.
예술의 향방
노인 혹은 돌봄 관련 작업을 하는 청장년 예술가들이 강의나 기획 회의에 가끔 필자를 부르곤 한다. 나, 나의 사회운동, 나의 글들을 예술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지 않던 사람으로서 그들의 부름에 응하는 내 쪽 질문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막연하고 막강한 문장이다. 혹은 작가가 된다거나 문학을 한다는 생각 없이 어느 날 작가가 된 사람이 문학을 넘어 연극, 미디어, 미술, 공연 등 여타의 예술 쪽에 불려 다니다 보니,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가는 누구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 말고는 예술가들과 만날 접점이 거의 없었다. 이런 질문과 접점 찾기는, 예술이든 문학이든 사회운동이든 일상의 삶이든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으로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늘 품고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버릇이리라. 예술에 대해 그것 이외의 세세한 질문이나 지식은 내게 없다. 다 늙어서 예술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 관심도 돋지 않는다. 다만 예술의 쓸모 중 하나라 할 “내가 즐길 수 있는” 면들을 가능하면 싸게 즐기는 것으로 예술과 나를 연관 짓고 산다.
뒤집자면 노인과 함께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진 청장년 예술가들을 만나면서 내가 제언하는 것은, 당신들이 해왔던 예술을 넘어 노인들의 일상과 마음과 몸과 관계 속에 이미 있는 신바람과 흉터, 그들의 몸과 말과 표정과 움직임 속에 이미 있는 생명력과 노쇠, 욕망과 포기, 대항과 굴종과 전략, 슬픔과 기쁨, 예쁨과 미움이 뒤엉킨 내면과 외연의 우여곡절과 뒤죽박죽을 찾아 되살려내고 재해석하여, 우선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 계층과 함께 즐기도록 해보자는 말 이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다. 섣부르게 희망이니 아름다움으로 회칠하지 말고, 차라리 복수를 작심하고 절망과 추함이라 느껴지는 것들을 냉혹하게 기록하며, 대체 이 사회의 무엇이 희망과 아름다움, 절망과 추함을 갈라치며 차별과 억압을 만들어 내는지를 통찰하려 노력하면서, 그럼에도 몸소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힘을 피차간에 깨달아 갈 일이다. “착한 사람”은 바보이거나 관계나 구조를 망치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돌봄 현장이든 예술 현장이든 개인의 어떠함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하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과정에서도 결과물로도 예술의 중요한 가치는 공공성이다.
최현숙
최현숙
1957년생. 노인돌봄 현장에서 요양보호사로 7년간 일함. 구술생애사 작가이자 소설가. 저서로 『할매의 탄생』 『할배의 탄생』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작별 일기』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와 장편소설 『황노인 실종 사건』이 있으며, 공저로 『이번 생은 망원시장』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여자가방에들어간다』(가제, 근간) 등이 있다. 최근 3년여 서울역 근처에 살면서 홈리스 관련 활동과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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