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 죽어 가던 새싹에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적당한 물과 거름을 주거든 그 식물은 제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름다움과 향기를 얻고 배를 채운다. 올해의 수고로 어쩌면 이듬해에 향긋한 꽃과 실한 열매를 또 한 번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아이는 자기 자신은 상상도 못 할 만큼의 힘차고 긍정적인 기운을 뿜어내는데, 이는 아이를 돌보는 가족 구성원에게 있어 값을 매길 수 없는, 대체 불가 에너지로 환원된다. 아이를 돌보아 받는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 역시 여러 돌봄의 상황에 놓여왔겠지만, 뱃속에 아이를 품고 낳고, 그렇게 얻은 아이 둘과 배우자, 이렇게 넷이 한집에 살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돌봄이 품은 가치, 돌봄의 주체와 대상에 대해 유독 관심이 갔다.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이 경험하는, 육아 외에도 다양한 돌봄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취미까지 생겼다.
돌봄은 식사와 비슷하다. 집집마다 삼시 세끼의 풍경은 다르다. 가령, 밭에서 기른 채소, 인터넷 주문으로 이른 새벽 문 앞에 도착한 가공품, 직접 끓인 국과 남이 만든 반찬이 한 식탁 위에 오르기도 하고, 누구는 외식과 배달을 통해 타인이 만든 음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도 한다. 하루 두 끼만 먹는 사람도 있고, 맛집 리스트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생존을 위해서 누구나 무언가를 먹지만 언제, 무엇을, 어떻게, 왜 먹는지는 서로 다르다. 돌봄도 끼니와 마찬가지로 생존과 직결되며, 돌봄을 이루는 요소의 구성과 모양 역시도 각자의 밥상만큼이나 삶마다 천차만별이다.
개인의 삶에서 공론장으로
예술하는 삶을 살며 육아하는 사람들이 접하는 돌봄의 형태와 모습에서 타 직업군과의 공통점, 다른 지점들을 인지한 뒤로 나는 예술계 종사자이자 부모로서 여러 출판물과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다. 엄마라는 상태인 마더후드(motherhood), 예술가이자 부모라는 두 정체성의 공존, 어린이라는 소수자 등 여러 키워드와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적인 삶은 물론 내가 속한 커뮤니티와 사회, 국가 안에서 돌봄의 맥락과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습관이 들었다. 또한 예술가의 돌봄을 개인의 차원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분야의 수면 위로 계속해서 끌어올리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감의 끈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활발히 돌봄을 이야기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감사하게도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사업으로 선정된 〈제로의 예술〉의 제안으로 예술가 부모들을 직접 만나 예술계에도 존재하는 육아, 돌봄, 경력단절 등에 대해 더 살펴보며 예술가 부모들의 모임인 ‘예술육아소셜클럽’을 기획할 수 있었다.
실체 하는 연대를 이룬 우리가 처한 현실과 상황은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멤버들은 여러 만남과 대화 속에서 부모 예술가에게 필요한 ‘돌봄과 작업을 고려한 시간과 환경’에 대해 공통적으로 언급했다. 개인의 영역에서 아무리 기를 쓰더라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예술을 위한 준비와 창작의 시간과 더불어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한때는 남들보다 유연하게 시간을 썼을지 모르나 부모가 된 이후 자유로운 시간 개념과는 거리가 멀어진 예술가들의 상황을 고려하고 이해하는 인식과 분위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러한 바람은 비단 예술육아소셜클럽 멤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아, 예술가, 엄마』와 『자아, 예술가, 아빠』를 통해 만난 이들은 물론 예술계 동료들로부터 자주 접하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세계적인 염원이기도 하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예술 기획자이자 비평가인 헤티 주다(Hettie Judah)와 몇몇 예술가 엄마들은 2021년에 한 행사에서 「How Not To Exclude Artist Parents: Some Guidelines for Institutions and Residencies」(부모 예술가를 배제하지 않는 방법: 기관 및 레지던시를 위한 안내서)1)라는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선언문을 세계의 여러 언어로 알렸다.
헤티 주다는 더 나아가 2022년에 『How Not to Exclude Artist Mothers(and other parents)』(예술가 엄마들(과 여러 부모)을 배제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예술가 엄마를 비롯하여 부모인 예술가를 인지하지 못하는 현재의 예술계에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양한 참고 사례 소개와 여러 예술가 인터뷰를 통해 예술계가 변화해야 하며 부모 예술가의 요구에 세심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아, 예술가, 엄마』를 인연으로 예술육아소셜클럽를 대표해 그녀와 나눈 서면 인터뷰 중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몇몇 예술가의 몇몇 의견만으로는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 정확한 목소리와 구체적인 실천은 연대로부터 나와야 한다. 말과 이야기는 늘 있어왔지만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술계와 우리를 위해 만든 것이 예술육아소셜클럽이다.”
이해와 공감, 연대와 응원을 향해
예술육아소셜클럽은 작고 가벼운 사교 모임이다. 사는 지역과 아이들의 나이가 다 달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모이기가 좀처럼 쉽지는 않다. 헤티 주다의 책에서 나는 ‘이런 그룹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멤버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라고 대답했다. 현재까지도 활발한 예술육아소셜클럽의 단톡방을 보더라도 정말 그렇다. 지난 몇 년 동안, 일로나 사적으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우리의 단톡방은 바쁘고 정신없는 예술과 육아의 소용돌이 가운데 편안함과 위안을 주는, 이해와 공감을 기대할 수 있는 예술계 동료이자 육아 동지가 있는 환대의 공간이 되어 주었다. 우리끼리 나눴던 농담처럼 가늘고 긴, 느슨하고 유연한 연대로서 각자의 활동을 응원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예술과 육아를 마음 놓고 병행할 수 있는 날을 따로 또 같이 살아간다. 그렇게 각자의 삶에서 맡은 돌봄을 수행하며 서로를 돌보는 중이다.
나의 경험상, 돌봄은 미지의 세계도, 블랙홀도 아니다. 이미 누군가 닦아놓은 다양한 경로가 있고, 수많은 단계와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다. 물론 이따금 돌봄의 현장이 혼돈의 도가니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세심한 관찰과 주의는 물론 집중력과 지구력을 요구한다. 이 밀도 높은 과정을 겪으며 돌봄 내 당사자는 존재 이유, 타자와의 관계, 노동의 가치, 감정의 굴곡 등 인간과 삶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골똘히 사고하게 된다. 물론, 노력을 기울이거나 진한 성찰로 이어지기 어려운 상황에도 자주 부딪힌다. 때와 장소에 따라 돌보는 주체와 대상이 뒤바뀌거나 대체될지언정, 돌봄의 시계는 24시간, 365일 멈춘 적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 지금까지 지구에 살아남을 수나 있었을까.
돌봄은 주로 ‘정책’과 ‘노동’이라는 단어 앞에 붙여 개인의 영역에 놓아둔다. 그런데 돌봄이 예술과 연대를 만난다면 어떨까?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의식주 그 기저에 자리 잡은, 인간과 자연이 공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돌봄이 예술을 만나 더욱 다양한 언어와 맥락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연대의 힘과 돌봄을 품은 예술이 인류가 봉착한 인구절벽, 기후위기, 경제불황, 차별 등의 문제를 재해석하고 주제의 폭과 깊이를 구체화하고 확장시키지는 않을까? 그리하여 예술-돌봄-연대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길, 그 이야기의 가치가 돌보아지고 돌보는 사람들에게 가닿기를. 그런 내일을 바라며 오늘도 돌봄의 하루를 마감해 본다.
1) 원문은 artist-parents.com에 올라가 있으며, 예술육아소셜클럽(김다은, 민경영, 박주원, 신승주, 이경희, 임유빈, 정유희)이 한글 번역한 전문은 『제로의 예술』(돛과닻, 2022)에도 수록되어 있다.
- 김다은
- 예술공간 팩토리2, 문화예술기획그룹 다단조, 문화복합공간 코스모40에서 기획자로 전시, 워크숍, 교육 프로그램 등을 펼쳐왔다. 한편, 여성, 엄마, 기획자라는 세 개의 정체성을 단단하고 건강하게 지키고 지속하려는 노력과 기획력을 엮어, 단행본 『자아, 예술가, 엄마』 『자아, 예술가, 아빠』 『서울의 엄마들』을 선보인 바 있으며, 부모 예술가의 연대를 꿈꾸는 예술육아소셜클럽의 멤버이며, 현재 팩토리2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단행본 『돌봄과 작업2』에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self.artist.motherhood - 프로필 사진 ⓒ황예지
썸네일 사진: 제로의 예술 홈페이지 (사진 ⓒ현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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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이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과 연대를 만나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전파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는 글이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안그래도 건강에 대한 고민으로 돌봄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차라 더 반갑게 와닿는 것 같네요 ^^
가꾸고 돌보며 찾아낸 공존의 언어
예술가의 삶과 돌봄
공감이 갑니다
가꾸고 돌보며 찾아낸 공존의 언어
예술가의 삶과 돌봄
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