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강제 전환
나는 운전을 잘 못 한다. 끼어들기는 특히 쥐약이다. 산만하여 빠져나갈 교차로를 늘 뒤늦게 확인한다. 몸이 둔해 고양이처럼 쏙 껴들지도 못하고, 담이 작아 싸움소처럼 마냥 머리를 들이밀지도 못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끼어들기가 쉬워졌다. 내게 틈을 내어주는 차 안에는 늘 희푸른 불빛이 감돌았다. 그 차 안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카톡 화면이 브레이크 불빛 가득한 붉은 길을 갈라 주었다. 운전은 우리 일상 중 가장 흔하게 반복되는 위험이다. 죽음과 일상이 가장 가깝게 마주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그 생사의 순간을 쪼개 누군가가 나를 확인해 주었음을 확인한다. 이미 통화와 음악과 영상으로 충분히 나뉘어 있던 운전의 시간은 인스타와 카톡 그리고 줌(ZOOM)으로 더 쪼개진다.
나는 사무실이 없다. 일이 생기는 곳이 회의실이 되는 프리랜서다. 물론 혼자 하는 작업은 대부분 집 컴퓨터 앞에서 이루어진다. 코로나 이전까지 컴퓨터 모니터에 어떤 형태의 일이 떠 있어도 화면 건너편은 온전한 나의 공간, 내 집이었다. 줌의 시대가 도래하고 집은 더 이상 온전한 나의 공간이 아니다. 줌은 모니터를 넘어 나의 공간 전체를 강의실로, 회의실로 강제 전환시킨다. 줌은 나의 이동시간도 삭제하였다. 목적과 목적지에 맞춰 나의 마음을 준비할 시간, 여유도 함께 삭제되었다. 집을 나서 회의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중심이 되어’ 준비하던 시간은 사라지고, 모니터 화면 전환에 따라 새로운 장소와 상황에 던져진다.
어릴 적 외할머니댁 김장 날이면 잔치가 벌어졌다. 이모와 고모, 옆집 아줌마와 건넛집 삼촌이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였다. 그곳에는 기획자도 플래카드도 없었지만 커뮤니티와 문화예술교육, 생활과 문화가 일상과 함께 있었다. 최근에는 사업 이름이 담긴 포스터가 붙어있는 김장 ‘행사’를 더 많이 보는 것 같다. 김장도, 낙서도, 놀이도 공공의 것이 되고 모임도, 수다도, 간식도 정산의 대상이 된다. 공공은 생활문화, 문화도시, 도시재생, 마을공동체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우리의 모든 일상을 기획하고 연결하고 아카이빙하여야 한다고 보챈다. 시민‘성’이 아닌 시민‘력’을 키우라 한다. 일과 놀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점점 더 많은 사사로워야 할 일들이 공적인 일로 전환된다. 공공의 사업이 된 일상을 우리는 여전히 일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파편화된 개인들로 구성된 총체적 사회
시간과 공간이 점점 더 자주 전환되고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으로 끊임없이 전환되면서 우리가 삶의 순간마다 켜두어야 하는 현실 윈도우 창의 개수는 끝없이 늘어간다. 늘어난 창의 개수로 인한 과부하를 막기 위해 각각의 용량은 낮추어야 한다. 피아노로 소나타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물레로 찻주전자 한 점을 빚어 올리기 위해 몇 개월을 보내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하여 점점 많은 사람이 오카리나로 <섬집아기>를 연주하고, 만들어진 찻잔에 채색한다. 물론 그 과정은 원데이 클래스라는 교육 ‘사업’을 잠시 ‘소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각자의 윈도우 창은 늘어났지만 각 창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비슷해지기 때문에,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윈도우 창의 총합은 오히려 줄어든다.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고 시위를 즐기는 사람들은 줄고, 같은 피켓을 들고 효율적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늘어간다. 그 와중에 오카리나 최다인원 합주 기네스북 세계기록은 우리나라가 지속적으로 자체 기록을 경신해 나아가고 있다.
  • 각양각색의 시위 깃발
  • 검찰개혁 촛불문화제
  • 2016 남구민 오카리나 대합주
전환에 저항하는 삶의 예술
모든 전환은 에너지를 지닌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충격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우리는 ‘전환의 시대’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채 좌측 끝에서 우측 끝까지 횡단하며 자신의 직함을 무한 반복하며 상대의 관등성명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상행동을 보인 한 정치인의 사례를 통해서도 전환이 유발하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엿볼 수 있었다.
세상과 시대의 전환만큼 일상에 반복되는 전환의 순간들도 스트레스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그 스트레스에 맞서기 위해 ‘소확행’이라는 카드를 뽑아 들었다. 그런데 소확행은 결국 또 작은 윈도우 창을 하나 더 연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소확행은 대부분 소비일 것이고, 그 소비의 대상은 모니터 너머의 슈퍼컴퓨터가 당신의 데이터를 분석해 당신이 소비하도록 계획한 물건일 것이다.
화면 너머 슈퍼컴퓨터와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이 손을 잡고도 계획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세상이 강제하는 전환에 Alt+Tap(윈도우에서 창을 전환하는 단축키) 되지 않는 삶은 순간은 어떤 것일까? 나는 샤워하다가 흥얼거리는 노래 몇 곡이라고 생각한다. 기획도 계획도 정산도 아카이빙도 없는 충동적인 여행이거나 갑자기 탁구에 미쳐서 백드라이브를 완성하기 위해 허비하는 몇 년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왜 샴푸가 머리에 가득한 채로 효율적인 동작으로 샤워를 끝내지 않고 뜨거운 물을 낭비하며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끊임없이 흥얼거리는지, 왜 관절도 안 좋은 40대 중반 프리랜서가 강원도 인제에 출장을 다녀와서 저녁도 거르고 세 시간 동안 탁구를 치는지. 슈퍼컴퓨터가 가장 늦게 연산해낼 영역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각자의 ‘사사로운 예술’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소확행이라는 새 창을 열기 전에 코드를 뽑고 ‘총불행’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총체적이고 불확실한 행복을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공이, 예술이, 문화예술교육이 그 전환당하지 않는 사사로움을 ‘지원’했으면 좋겠다.
arte365
주성진
㈜메타기획컨설팅에서 8년간 배우고 일하며 조직을 덜 고상하게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후 독립하여 7년간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자신의 명칭을 고민하다가, 용역으로 가득한 프로필을 보고 <문화용역 주성진>으로 사업자를 등록했다. 최근에는 다수의 문화기획 교육과정에 관여하며 멘토를 사칭하고 청년들에게 문화기획을 배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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