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배우는 건 기술일까, 예술일까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배우던 날, 교과서에 코를 박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좋아하던 남학생이 다른 여자애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 목격한 즈음이었다. 충격과 슬픔에 잠긴 그때, 선생님은 ‘님’에 밑줄 긋고는 ‘빼앗긴 조국’이라 쓰라고 했다. 조국이고 뭐고 그때의 내게 ‘님’은 오로지 다른 여자애와 정답게 걷던 그 남학생이었다. 잃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나라 잃은 슬픔보다 그를 떠나보내는 슬픔이 훨씬 클 것만 같았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배우던 날, 교과서에 코를 박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좋아하던 남학생이 다른 여자애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 목격한 즈음이었다. 충격과 슬픔에 잠긴 그때, 선생님은 ‘님’에 밑줄 긋고는 ‘빼앗긴 조국’이라 쓰라고 했다. 조국이고 뭐고 그때의 내게 ‘님’은 오로지 다른 여자애와 정답게 걷던 그 남학생이었다. 잃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나라 잃은 슬픔보다 그를 떠나보내는 슬픔이 훨씬 클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학을 좋아해서 문학 수업 시간이 괴로웠다. 작품에 이입되는 내 감정과 해석을 억누르며 괄호 안에 정해진 답을 써넣어야 했던 경험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학교에서의 문화예술은 여전히 결과와 평가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수행평가’라는 이름으로 노래도, 악기 연주도, 줄넘기와 공차기도 시험을 본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대개 목적을 가지고 ‘타의’에 의해 문화예술을 접한다. 악기 하나쯤 연주할 줄 알아야 하니까 피아노 학원에 가고, 다른 애들한테 맞지 않으려고 태권도를 배우고, 키 크는 데 도움이 되니까 발레를 배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예술의 한 역할이라면, 자기 동기 없이 익힌 이것들이 ‘기술’을 넘어 삶 속에 ‘예술’로 자리 잡긴 힘들다. 누군가 시키는 것을 스스로 즐기기란 쉽지 않다. 어떤 것이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되면 외려 그로부터 멀어지거나, 아예 질려 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코로나19로 사상 초유의 온라인 수업이 등장했다. 학교 교육이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며, 저마다의 환경 차이가 교육의 기회와 질 차이로 드러났다. 비대면 수업은 특히 예체능 교과에 타격을 주었다. 음악 수업 시간에 노래를 시키자 집에 방음이 안 돼서 소리를 크게 낼 수 없다거나, 체육 시간에 줄넘기 숙제를 내주자 “도로가 빌라라서 할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들이 생겨났다. 나름 대안을 찾던 체육 교사가 여러 상황을 고려해 누구나 할 수 있는 ‘양말로 저글링하기’ 수업을 하자, 이번엔 “아이한테 왜 서커스를 가르치냐”고 부모에게서 항의가 들어왔다. 혹여 평가 점수를 못 받을까, 저글링을 연습하는 아이 옆에서 조바심 내는 부모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아이들 삶에 즐거움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혹은 성과로 접근해 온 문화예술교육의 한계가 더욱 두드러지는 요즘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엄격하던 때, 공간민들레 청소년들도 한동안 비대면 수업을 했다. 아침마다 온라인으로 접속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이들의 일상을 챙기는 일에 교사들은 에너지를 쏟았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 아이들은 저마다 고립감과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다. 코로나19를 통해 교사가 알게 된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삶을 가꾸어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해진 대로 살아온 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갑자기 덩그러니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몰랐다. 딱히 취미랄 것도 없었고, 그나마 생기는 여가엔 짬짬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으로 보내온 탓이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거나 향유하는 경험을 해본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자발성을 보이는 대중문화 쪽에선 주로 소비자 입장에 가까웠을 것이고, 그 외에는 강제된 생산자로서의 경험이 많을 것이다. 비대면의 일상에서 더욱 고립감을 느끼는 한 원인이 ‘주체적인 문화예술 경험의 부족’에 있진 않을까 싶다.
‘예술’이라는 씨앗 뿌리기
청소년의 우울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로움의 ‘강도’가 아니라 외로움의 ‘지속 기간’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길어지는 팬데믹 상황에서 반년 이상 경험한 고립과 단절은 아이들 몸과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학교가 정상화된다면 학업 성취보다 아이들의 정서를 회복하는 데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 아닐까. 문화예술교육은 단절된 삶을 연결해 서로를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아이들과 깊은 숲속에 머문 적이 있다. 일본의 생태·평화운동가 마사키 다카시 선생 댁을 방문했을 때다. 우리를 위해 선생은 서둘러 낡은 오두막에 수도와 전기를 연결해주셨지만 이튿날인가, 한 아이가 중도 하산을 선언했다. 자기는 하루라도 머리를 안 감으면 못 사는데, 온수가 안 나오는 데서 지낼 수 없다며 캐리어를 끌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르고 달래 겨우 붙들어오긴 했지만 그 아이를 주저앉힌 건 내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이었다. 잠들 시간에 몇몇 아이들이 보이질 않아 찾아 나섰더니 짙은 어둠 속에 어렴풋이 동그란 머리통 몇 개가 보였다. 아이들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와, 대박!” “개 예뻐!”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난생처음 쏟아지는 별을 보며 감탄하다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개 예뻐!”라고 외친 주인공은 낮에 보따리 싸서 하산하던 아이였다. 아이는 군말 없이 하루를 더 지냈고, 마지막 날엔 하늘이 흐려 별을 한 번 더 못 봤다고 아쉬워했다. ‘외모의 아름다움’을 포기했을지언정 아이가 ‘별빛의 아름다움’을 알아버린 것이 내심 기뻤다. 속세를 그리워하던 이 아이를 매료시킨 또 하나는 ‘차와 노래가 함께하는 문화’였다. 하루에 몇 번이든 모여 앉을 때마다 마사키 선생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고, 기타를 치며 손수 만든 노래를 들려주셨다. ‘떡진’ 머리를 감추느라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았던 아이는 어느새 후렴구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가을의 끝자락, 단풍 가득한 숲속에서의 이 낯선 경험은 아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길로 이어질 것이다.
오늘의 코로나19는 탐욕에 눈먼 인류가 자초한 재난이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우리는 새로운 재난을 맞이할 운명에 놓여 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재난 속에서도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가는 힘’이다. 삶에 스며드는 문화예술교육은 서둘러 가르쳐지지 않는다. 당장 열매를 탐내기보다, 아이들이 다양한 아름다움에 눈뜰 수 있도록 도처에 씨앗을 뿌리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세상 곳곳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미적인 눈’을 기르기 위해선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
- 장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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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제천간디학교 교사로 지내다 지금은 민들레출판사에서 격월간 교육지 [민들레]를 만들며 공간민들레 청소년들과도 만나고 있다.
97free@hanmail.net
민들레출판사, 공간민들레 mindle.org
사진_필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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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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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재미있어 잘 읽었어요. 그래서 댓글로 칭찬해 주고 싶네요~~^^
안녕하세요 독자님,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이야 말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글인 것 같아요.
보내주신 응원으로 더욱 알찬 콘텐츠를 만들겠습니다!
저두요. 읽기 쉽고 , 재밌고, 현재를 다시 되돌아 보게 하는 글이었어요.
너무 아름다운 글이네요. 일상을 되돌아보게 되네요
민들레 장희숙선생님 글은 언제나 따뜻하고 좋습니다. 공부만 강요하는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네요 ㅠ
안녕하세요 안나. 우주, 김미경 독자님
장희숙 선생님의 칼럼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독자님들도 같은 마음이셨나 봅니다.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체적인 문화예술 경험의 부족’ 이라는 구절이 크게 공감이 가는 칼럼이었습니다. 루즈한 일생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주변환경에서부터 작은 미적감각을 일깨우고 그 속에서 흥미과 관심을 키워나감과 더불어 문화예술을 통한 풍요로운 삶의 개척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는 기대를 심어주는 아이들의 체험이 인상 깊게 다가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