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시내 곳곳에 헝클어진 2인용 침대의 모습이 담긴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의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부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안겨줬습니다. 연인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과 그 이후 작가가 내놓은 작품들은 상실과 부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과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그가 어떤 위안을 받았을까요? 사랑의 부재에 대처하는 하나의 자세에 대하여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의 작품을 통해 정수경 미술이론가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1992년 5월 16일, 뉴욕시내 곳곳의 빌보드 24곳에는 누군가 막 자고 나간듯한 새하얀 2인용 침대의 헝클어진 모습이 담긴 커다란 사진이 전시되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무제>(1991)로 전시된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1957-1996)의 이 사진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쓸쓸함에 젖어들었다. 사진작가이자 큐레이터인 W.L.헌트는 이렇게 탄식했다. “무엇인가 사라졌다. 부재… 저 침대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는 쿠바 출신의 미국 이민자이자 동성애자 미술가였다. 그리고 그의 연인 로스는 그보다 먼저 에이즈에 감염되어 생을 마감했다. 로스가 죽을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곤잘레즈-토레스에게 예고된 상실과 부재, 즉 연인의 죽음은 중요한 작품 주제가 되었다. 비슷하게 동성애라는 주제를 사진으로 담아내었던 동년배 사진작가로 낸 골딘(Nan Goldin, 1953~ )이 있지만, 동성애 연인들과 친구로 지내면서 그들의 생활을 당황스러우리만치 솔직하게 담아내었던 낸 골딘의 작품들과 달리 곤잘레즈-토레스의 사진들은 매우 시적이고 은유적이다.

 

 

예컨대 그의 초기작 무제(완벽한 연인들)(1987-1990)은 두 개의 벽시계로 되어 있다. 똑같이 생기고, 시침과 분침까지 똑같이 움직이는 서로 꼭 붙어있는 두 개의 시계. 제목은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해준다. 완벽한 연인들이란 이런 걸까? 딱 달라붙어서는 같은 시간을 나란히 함께 흘러가는 사이. 생명(건전지)이 다할 때까지 줄곧 저렇겠지. 생김마저도 똑 닮아지고… 이러한 조금은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연상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사뭇 짠해진다. 그런데 실상 이 두 시계의 똑같은 생김은 곤잘레즈-토레스의 완벽한 연인이 동성임을 암시한다. 작품의 연대기인 1987년부터 1990년은 그의 연인 로스의 투병시기였다. 그러나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어도, 혹은 애초에 그 사실을 알고 보아도 작품이 주는 울림이 변질되거나 수그러들지는 않는다. 이질감보다는 공감이 마음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스의 죽음 이후의 작품인 침대도 비슷하게 다가온다. 작품에는 곤잘레즈-토레스의 성적 성향이나 연인의 죽음의 원인, 즉 에이즈를 암시하는 것이 전혀 없다. 헌트가 느꼈던 바와 같이, 이 작품이 주는 첫 인상은 상실과 부재, 그것도 이제 막 벌어진, 그리하여 아직 마음의 정리가 채 되지 않은 상실의 느낌일 따름이다. 이 느낌은 사랑의 상실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굳이 연인의 상실이 아니더라도 가슴 저미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허전함, 실감나지 않아 가슴이 더욱 쓰라린 외로움이다. 보는 이들은 제각각 침대 빈자리의 임자를 떠올리며 자신의 슬픔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순간,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는 ‘라틴아메리카계 동성애자 미술가’라는 수식어를 지우고 ‘사랑의 서정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이미 예고된, 피할 수 없는 연인의 상실과 부재를 곤잘레즈-토레스는 어떻게 감당해내었을까? 그는 그의 작업들이 ‘이별 연습’이었다고 고백했다. 1987년부터 1990년을 거쳐, 그 이후에 만들어진 여러 작품들은 연인의 임박한, 심지어 이미 일어나버린 상실과 부재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가는 과정이었다. 무제(완벽한 연인들)은 다른 시계들로 찍은 작품도 있었고, 침대를 찍은 <무제>는 동시에 24곳에나 걸려있었다. 이러한 반복이 그의 마음에 어떤 위안이라도 주었던 것일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고통을 곱씹으려는 반복충동에서 깊은 충격과 상처를 극복하려는 정신의 노력을 보았다. 의식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경악스러운 사건을 당할 때, 의식이 채 감당하지 못한 충격은 무의식으로 침잠해서 고통으로 남는데, 우리의 정신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견딜만한 것으로 바꾸려고 애쓴다고 한다. 그를 위해 우리의 정신은 그 고통을 다시 느껴지게 하는 대상이나 이미지에 그 고통을 투사한 다음, 그 대상이나 이미지를 납득할 만한 것으로 의미화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투사와 의미화의 반복이 고통을 온전히 치유하지는 못하더라도 고통을 감소시킬 수는 있다고 보았다.

 

성큼 다가와 버린 연인의 죽음의 충격 속에서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가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만들어낸 아픈 작품들. 그 앞에서 어쩌면 나도 언젠가 오고야 말 사랑의 상실을 연습하며 부재에 대처하는 마음의 자세를 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수경

글쓴이_ 정수경 (미술이론학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우리의 삶에서 미술이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또 무엇이면 좋을지에 대해 미술현장과 이론을 오가며 고민하고 있으며, 고민의 결과를 글과 강의로 풀어내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 관심이 많으며, 최근에는 국내의 젊은 작가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