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이 스러져 가고 있는 한겨울 들판을 기차가 달리고 있다. 유일민, 유일표 형제는 중학생 나이에 처음으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고 한강철교를 건너고 있다. 선잠을 자던 동생이 깨면서 얼결에 “성, 여그, 여그가 워디랑가?” 하고 내뱉자, 형은 동생 입을 틀어막는다. 서울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사투리부터 고쳐야 한다는 담임선생의 말 때문이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의 첫 장면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을 꿈꾸던 전라도 아이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사투리를 버리는 일.
카페에 앉아 ‘나는 보아뱀이라카능 기 정글에서 젤로 무스븐 기라꼬 생각했데이.’로 시작하는 『애린 왕자』를 읽고 있다. 강원도 사람이 경상도 사투리로 된 글을 읽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책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 책은 시작부터 성공적이다. ‘읽기’부터 안 되어 더듬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동시에 질문 하나가 머리를 쳐든다. 나는 왜 표준어로만 글을 써왔던가?
해봐, 되잖아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말로 글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사투리로 된 『애린 왕자』『에린 왕자』는 왜 이리 낯선지. 그동안 사투리는 기껏해야 소설 속 등장인물의 말을 인용할 때 따옴표 안에 가둬질 뿐이고, 따옴표 밖의 모든 지문은 어김없이 표준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표준어를 쓰는 것은 이미 내면화된 제도이자 강령이다. 사투리는 그 말을 쓰는 인물의 출신지, 계층, 연령, 성격 따위를 현실감 나게 추리할 수 있다. 사투리는 말의 주인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육체적이고 공간적이다. 표준어는 이런 육체성이 없다. 중립적이고 건조하다. 표준어는 언어의 입체성을 평평하게 평면화하고 언어 안에 있는 다양한 차이와 격차를 지워버린다.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 문화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아비투스(Habitus)다. 개인의 생각과 태도는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회의 습속과 제도 속에서 만들어진다. 돈의 존재는 돈에 관한 생각을 만든다. 말에 대한 우리의 습속도 마찬가지다. ‘표준어’라는 사회 제도는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을 버리라고 요구한다.
독일의 틴텐파스(Tintenfass) 출판사가 『어린 왕자』 전 세계 번역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한 이 책은 경상도 판이 125번째, 전라북도 판이 154번째로 출판되었다. 『애린 왕자』는 ‘표준어 없이 전면적으로 사투리로 쓴 책’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모든 걸 빨아 삼키는 서울의 탐욕성을 누가 모르며, 표준어와 사투리 사이의 위계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말로는 보존해야 한다고 하지만, 더 이상 표준어-사투리라는 대립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사투리는 사라졌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곳은 서울이고 우리는 모두 서울사람이다. 사투리는 온전하게 쓰이지 않고 선택적으로만 쓰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된 기존의 『어린 왕자』와는 전혀 다른 책이다. 말의 독점에 항의한다. 텅 빈 구호처럼 ‘사투리를 보존하자’고 하지 않고, 사투리만으로 말글살이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얌전히 읽을 수 없다. 표준어에는 담기지 않는 억양과 장단(長短)을 섞어 소리 내어 읽게 된다. 말의 육체성과 현장성을 만끽하게 된다. 왕자도 전에 만나본 적 없던 왕자다.
“니가 나를 질들이모 우리사 서로 필요하게 안 되나. 니는 내한테 이 시상에 하나뿌인기라. 내도 니한테 시상에 하나뿌인 존재가 될 끼고.” (『애린 왕자』)
“니가 날 질들이믄 말이여, 우덜은 서루가 서루헌티 필요허게 될 거 아닌가잉. 넌 나헌티 시상서 하나밲에 없게 되는 것이제. 난 너헌티 시상서 하나밲에 없게 되는 거고잉.” (『에린 왕자』)
국가는 말을 단속할 권한이 없다
『말끝이 당신이다』도 말에 대한 국가의 개입보다 시민적 자율성과 지역적 잡종성을 강화하자고 강조한다. 800자의 짧은 글 속에 우리가 말과 글에 대해 가진 이러저러한 고정관념을 뒤집자고 제안한다. 국가는 개인의 말을 ‘맞고 틀리다’며 단속할 권한이 없다. 성문화(成文化)된 표준어와 국가 주도의 사전을 없애야 비로소 지역, 사람, 시대에 대한 관심이 살아난다. 표준어를 폐지하면 말이 민주화되고 말에 대한 사회적 역량도 강화된다. 주변으로 밀려나고 하위어 취급받는 사투리가 명실상부하게 대등한 말로 인식될 것이다. 표준어의 족쇄에서 풀려나면 말에 관한 의견 불일치와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대하는 자세도 유연해질 것이다. 말에 관한 상상력도 더 촉발될 것이다.
근대의 극복은 통일된 민족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누락시켰던 말의 다양성을 복원시키는 일에서 출발한다. 말은 균질적이지 않다. 나와 당신의 말은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말은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다르게 말하기 시작하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사투리는 보존될 게 아니라 복권되어야 한다. 잡종성으로 말을 꽃피우자.
“우리는 언어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다. 태어나자마자 따라야 할 말의 규칙들이 내 몸에 새겨진다. 여기서 빠져나오려면 언어의 찐득거리는 점성을 묽게 만들어야 한다. 시는 우리를 꼼짝달싹 못 하게 옭아맨 기성 언어를 교란하여 새로운 상징 세계로 날아가게 하는 로켓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다.” (『말끝이 당신이다』)
- 김진해
- 국어학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학교에서 실천교육센터 센터장과 생활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으며, 평화의 무술 합기도(Aikido)를 수련하면서 [한겨레신문]에 매주 <말글살이>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말끝이 당신이다』를 비롯하여, 『한국어의 규범성과 다양성』(공저), 『촛불항쟁과 새로운 민주공화국』(공저) 등을 펴냈다.
jinhae@khu.ac.kr
이미지제공_이팝,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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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다르게 말하면 정말 너무나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