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에서 대체로, 감각의 새로운 가능성

예술 경험의 장벽을 넘어서

얼마 전에 나는 친구와 삼청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나는 미술관에 다니는 건 좋아하지만 정작 작품을 감상하는 법은 잘 모른다. 최준도 아니면서 맘에 드는 작품 앞에서 할 줄 아는 말이 ‘어? 예쁘다’뿐인 나는 친구에게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을 발견했다. 얼룩덜룩한 회색 바닥에 하얀색으로 헤드셋 모양과 QR코드가 있고, 그 위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이라고 적혀 있다. 쪼그려 앉아 사진을 찍고 있는 그림자가 보인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재난과 치유》(2021) 전시 중 한 작품 아래의 바닥을 찍은 것이다. 직원에게 문의한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을 감각하기

배희관밴드 장애인을 위한 음악교실 <비비웨이브랩>

우리는 음악을 어떻게 감각할까. 청각을 통해 들리는 소리로?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로? 음악을 처음 배우던 순간은 어땠는지 떠올려보자. 계이름과 악보 보는 법을 먼저 익히기도 하고, 혹은 악기를 다루는 손 모양을 통해 음악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음악을 감각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감각하는 사람에게는 불친절한 방법으로 음악을 안내하기도 한다. 가령, 영화 속에서 음악이 나오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비장애인은 영상 속에서 음악이 나오는 순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고 느낄 수 있겠지만, 청각장애인에게는 고작 폐쇄자막에 [음악] 또는

작은 시도로 장벽은 허물어진다

어쩌다 예술쌤③ 장애물 제거하기

장애인 미술교육 활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사이길 바랐다. 수업이 신나고, 재미있고, 새로운 차별화된 수업이 되게 하려고 수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고민하며 노력했다. 여력이 되는 한 다양한 상황에 도전하였고, 2018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하 진흥원) 글로벌 문화예술교육 탐방 프로젝트 ‘A-round’에 선발되어 일본의 장애인 미술교육 현장을 탐방하면서 더 큰 생각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어떤 변화를 해야 하는지 어렵기만 했다. 장애인들과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나는 가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흔들려 버린 모습이었을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서, 즐겁고 보람있게

백현호 학교·사회 예술강사(국악 분야)

맹자는 세 가지 즐거움 중의 하나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라 했다. 가르치고 나아지고 달라지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백현호 예술강사가 소리꾼으로, 연구자로, 대학 강사로, 방송인으로, 국악 아카펠라그룹 토리스의 동인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예술교육만큼은 놓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가르치는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음악을 배우는 것이 즐거워서 차근차근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전공으로 택하게 되었고, 그 즐거움을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소리를 배우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눈매는 그대로

접속과 접촉, 감각의 교차와 연결

코로나 이후의 미술 소통의 변화와 《경험적 감각》전

코로나19 팬데믹은 ‘비대면’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온라인을 통한 감각적 변화에 직면하게 했다. 21세기 포스트휴먼 시대의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부속개념이 아닌, 그 자체로 거대한 하나의 세계, 접속과 접촉이 교차하는 두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길을 재촉한다. 지금 세계는 학교도 회사도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으로 시각적 감각을 보다 확장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각적 감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지적인 반면 만족도는 가장 낮다. 그 이유는 맛있는 음식을 눈으로 보고만 있어야 할 때나 특별히 교육받지 않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문자, 악보, 추상미술)을 보고 느끼는 당혹감 때문이다.

한계에 맞선, 새롭고 소소한 접근

[해외리포트]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영미권 예술교육 프로젝트

성공적인 백신 개발과 높아지는 접종률로 코로나19 회복 가능성이 엿보였던 시기도 잠시, ‘델타 변이’로 대표되는 끊임없는 변종 바이러스로 인해 팬데믹은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로 인해 변화한 일상이 더는 새롭지 않은 지금, 단순한 비대면이 아닌 보다 새로운 방법으로 현재 상황을 돌파하는 영국, 미국의 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급식과 함께 배달하는 예술교육 키트 코로나19 확산으로 대면의 위험성이 높아지자 대부분 국가의 학교에 임시 폐쇄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학습 기회는 비대면 수업으로 대체되었으나, 학교에서의 예술교육, 방과후교실 등을 매개로 이어졌던 지역사회와 예술단체, 예술가의 연결성은

투명한 진실이자 진실된 허구로서 감각하기

비대면 문화예술교육이 마주해야 할 것

이상한 비 – 대면 비대면 상황이 이어지면서 ‘비대면’이라는 말에 대한 의심도 길어진다. 비(非)대면을 직해하면 ‘대면이 아니다, 대면이 아닌 다른 무엇이다’이므로 비대면 수업은 대면 수업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된다. 무엇일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똑바로 마주 앉아 서로를 뚫어져라, 보지 않았는가? 이것이 왜 대면이 아니라 비대면일까? 사실 팬데믹 이후 비대면 수업은 대개 온택트(ontact) 방식의 ‘간접 대면’으로 이루어졌다. 말 그대로 간접적으로, 직접 대하지 않고, 중간에 무엇을 두고 대면하는 수업 말이다. 그런 탓에 우리는 서로를 만났다고도 할 수 없고 만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상상을 자극하는 새롭고 깊은 생각

애이비씨랩 ‘프로젝트 42 : Z플래닛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특별히 SF소설 팬이 아니라면,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모를 것이라고 짐작한다. 더구나 컴퓨터 ‘깊은 생각(Deep Thought)’이 칠백오십만 년 고민 끝에 내놓은 삶과 우주에 대한 해답이 ‘42’라니. 스토리의 힘은 꽤 많은 상상을 자극하는 데 있다. 삶과 우주에 대한 해답이 고대 철학자 누군가가 내놓은 관념의 정수이거나, 개념으로 정의 내려져야 한다는 생각은 단지 편견이었나 싶다. 대체로 그런 해답은 논리적으로 설득되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진부하거나 식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허나 ‘42’라는 그 엉뚱+모호성은 생각을 환기하고 묘한 끌림을 발생시킨다. ‘프로젝트42 :

파국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자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시인 이문재와 소설가 최성각은 생태·환경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 예민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생태·환경 문제를 단순히 소재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얕은 생태학을 지향하지 않는다. ‘파국’이 임박한 지구적 기후위기 문제를 비롯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를 예민하게 의식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다. 물론 두 사람의 기질은 다르다. 시인 이문재가 『지금 여기가 맨 앞』(2014)에 이어 최근 『혼자의 넓이』(2021)에서 ‘세계감(世界感)’을 강조하며 지구를 걱정하는 시를 쓴다면, 소설가 최성각은 ‘환경운동 하는 작가’를 자처하며 환경책을 깊이 읽는가 하면 생태적 삶을 직접 살고자 고민하고 싸우는 작가이다. 그런 두

그들의 눈으로 만나는 지구

오늘부터 그린② 보다

지난해 화천 예술텃밭에서 진행된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에 참여하면서 산책을 자주 했다. 텃밭 위쪽으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농장이 하나 나온다. 비탈길에 서서 농장의 축사를 내려다보는데 소들과 눈이 마주쳤다. 소들은 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하며 시선으로 나를 쫓았다. 심지어 축사 기둥 사이로 고개를 쭉 빼더니 더 잘 보려고 애를 쓰는 듯했다. 내가 소를 보는 줄 알았는데 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존 버거는 그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그 한 가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미지의 가능성을 여는 창조적 감각

[대담] 뉴노멀 시대, 새롭게 마주하는 감각에 대하여

뉴노멀 시대 감각의 변화 감각과 접촉의 열망이 향하는 곳 원초적 감각에 집중하는 창조적 고립 멈추지 않는 울림 코로나19 이후, 연결의 방식이 달라지고 만남과 접촉, 감각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문화예술(교육) 분야 역시 기존에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던 것에서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고민이 많다. 단순히 비대면-온라인-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활용이라는 틀에 박힌 방식이 아니라, 어떤 만남과 연결을 추구할 것인지 성찰이 필요한 때다. 아르떼 아카데미 ‘창의적 예술교육 프로젝트’ 기획자로 참여하는 양혜정 연극놀이전문가와 이윤정 안무가를 만나 뉴노멀 시대를 살아갈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무엇이며

차별과 혐오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약

2021년 6월 문화예술교육 정책 동향

연일 예상치 못한 소나기와 무더위와 함께하고 있는 6월. 문화예술교육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먼저 문화를 통해 혐오와 차별에 맞선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창의와 혁신의 문화국가’를 만들기 위해 「제1차 문화다양성 보호 및 증진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 콘텐츠들을 확대하고, 국가 간 협력을 통해 문화다양성의 가치를 확보하고자 한다. EBS에서는 교육 콘텐츠를 인공지능(AI)과 결합하여 유·초·중·고등학생, 장애학생, 취약계층 학생에 따른 맞춤형 자기 주도 학습 콘텐츠로 개발한다. 또한, 기후·환경·생태 교육을 함께 고민하고 추진하는 중앙지원 협의체가 출범했다. 교육부와 11개 관계부처가 힘을 합쳐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의

돌아갈 것인가, 다른 길을 걸을 것인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한 포스트휴머니즘의 감수성

머지않아 코로나 위기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번 여름휴가를 위해 경쟁적으로 제주도 호텔을 예약하고 있으며, 심지어 2021년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낼 외국의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기도 한다. 그동안 친구들도 못 만나고, 수업도 못 하고, 맘껏 여행도 못 가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언제 마스크를 벗어야 할지 눈치를 봤지만, 백신이란 마법 같은 해법이 나오면서 이런 ‘비정상’(abnormal)의 시대에 작별을 고하고 즐거운 만남과 여행과 식도락이 만개하는 ‘정상’(normal) 세상으로의 복귀가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로, 노멀로, 일상으로의 복귀가 모두 좋기만

꿀잼 수업을 이끄는 경험과 노하우

어쩌다 예술쌤② 연구모임 활용하기

안녕하세요. 저는 광주와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7년 차 만화애니메이션 분야 학교 예술강사입니다. 올해는 광주에서 고흥까지 왕복 300km 이상의 거리를 운전하면서 출강하느라 애쓰고 있지요. 많은 예술강사님이 그러하듯 저 역시 예술강사 지원사업이 꾸준히 유지되고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학생의 만족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여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을지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마다 시스템이 다르고 학생의 성향도 다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양질의 수업을

남겨진 것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쓰레기를 남긴다> 속 만남과 연결

‘팬데믹과 기후위기 그리고 쓰레기 문제’라는 대전제를 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이때, 2021년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행사에서 이와 같은 주제로 문화예술교육을 염두에 둔 워크숍 기획을 제안받고 나서 사실은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무력감이 들었다. 그동안 보았던 환경교육은 대부분 경각심을 일으키는 콘텐츠를 나열하고, 그래서 “너 때문에 북극곰이 곧 멸종될 지경”이라는 죄책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버려진 것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것으로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내는 듯 마무리되는 사례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콘텐츠와 방식을 제외하고 우리가 ‘교육’이라는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린이의 ‘무한한’ 세계와 만나려면

어린이 문화예술교육이 놓치지 않아야 할 것

나는 그림일기 숙제를 싫어하는 어린이였다. 그림 부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림 칸은 글 칸보다 훨씬 넓은데 어떻게 채워야 할지 늘 막막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도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소풍을 가서 돗자리를 펴고 친구들과 배를 깔고 누워 놀던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는데, 일기에 그린 그림은 내가 봐도 영 어색했다. 엎드린 사람을 어떻게 그린담? 어쩔 수 없이 그림을 지우고 단체 사진 찍는 장면으로 바꾸었다. 글도 그에 맞추어 써야 했다. 내가 실제로 말하고 싶은 것을 담을 수 없어서 속이 상했다. 글로 쓰면 되는데 왜 그림을 그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