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살펴보면 요리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도, 후에도 내 삶을 관통했던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팜투테이블’(Farm-to-Table, 농장에서 식탁까지)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논밭에서 오는 먹거리가 우리 가족의 식사가 되었고, 캐나다 요리학교에서는 농가와 와이너리 등 지역에서 먹거리를 만드는 생산자들과 요리사의 협업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 온타리오주의 다양한 식재료와 문화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었다. 경상남도 진주의 외진 숲속 마을에서 사찰요리를 배우던 때에는 난생처음 ‘진짜 채소의 맛’을 만나 요리하는 이와 농사짓는 이의 마음 결에 따라 달라지는 맛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 팜투테이블을 통해 내 삶의 풍경도 달라졌다.
먹거리와 관계 맺기
팜투테이블은 식당과 학교 급식 등에서 지역 먹거리 활용을 장려하는 사회운동이다. 빠르고 간편하게 식사를 해결할 방법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대사회에서 식품안전과 신선도, 제철의 먹거리, 소규모 지역 농가의 지속가능성 등에 주목한다. 팜투테이블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지역 커뮤니티’를 강조한다는 점인데, 지역 주민들이 지역 농가의 먹거리를 소비하는 비중이 높을수록 농가에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더 나은 농법을 적용할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주민들이 소비한 돈이 지역 내에 머무르는 비중이 높아지고, 이를 통해 지역발전과 지속가능한 지역 커뮤니티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에 누렸던 싱싱하고 맛있는 텃밭 채소는 그 시절의 나에게는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것에 가까웠는데, 요리학교에서 처음으로 팜투테이블에 대해 배우고 내 손으로 요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어린 시절에 누렸던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헤아리게 되었다.
내가 팜투테이블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농부의 시간과 노동, 귀한 생각과 오랜 고민이 집약된 살아있는 결과물로서의 먹거리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13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팜투테이블을 경험했다. 나에게는 먹거리가 순환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고, 먹거리와 관계 맺는 방법을 새로이 터득하는 계기가 된 소중한 가르침이다. 농부님이 논과 밭에서 낚아 올린 영감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삶의 담장 너머로 상상력을 자유로이 뻗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나의 일과 삶을 더 나답게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소중한 가치들은 나처럼 요리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만 유효한 것일까? 그렇지않다고 생각한다. 팜투테이블은 먹거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삶의 방향에 관한 것이 아닐까.
먹거리로부터 받는 영감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행위를 이어간다. 한 사람이 하루 한 끼의 식사만 한다고 하더라도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식사를 하는 셈이다. 일상에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부분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다면 우리의 삶이 보다 환경과 사람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나의 일을 통해 이런 가치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그렇게 ‘홀썸’이 시작되었다. 홀썸은 이야기가 있는 지역 농가의 먹거리로부터 영감을 받은 채소요리와 디저트를 선보이는 식공간이다. 5년째 로컬푸드, 비건(우리는 Vegan이라는 용어보다 ‘Plant Based’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제로 웨이스트라는 세 가지 가치를 근간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단단하게 키워가고 있다.
홀썸 크루(홀썸의 팀 메이트)들은 매달 전국 곳곳에 있는 농가와 소통을 이어가는데, 직접 방문하여 농산물을 수확하거나 밭일을 거들기도 한다. 농사지은 이의 생각과 손길을 이해하고 그들의 작업을 함께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요리하고 이야기를 전하는 과정에 귀한 밑거름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팜투테이블의 참된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부터는 주방 밖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우리가 이야기하는 식문화를 다양하게 실험해오고 있다. 환경재단과 포드코리아의 지원을 받아 못난이 농산물을 알리고 인식을 개선하는 이벤트를 진행했고, 청년허브의 ‘청년업GREEN’을 통해 제로 웨이스트 배송시스템을 실험하는 프로젝트를 꾸려보기도 했다. 농부시장 마르쉐의 출점팀이되어 우리 땅의 지속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농가들과 협업을 이어온 것 또한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알맹이 있는 먹거리
이렇게 쌓아온 농가와의 단단한 관계가 청소년들과 함께 팜투테이블을 주제로 먹거리의 순환을 탐구하는 ‘순환랩’ 프로젝트(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를 진행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홀썸이 경험했던 많은 외부 프로젝트 중 가장 많은 마음을 썼던 것이 바로 순환랩이었다. 청소년들과 팜투테이블을 주제로 먹거리의 생산부터 폐기, 소비에 이르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살펴보고, 먹거리를 통해 우리 삶 속에 순환하는 가치를 살펴보는 작업을 함께 했다.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농산물을 만나는 방식에는 진짜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크기로 질서정연하게 플라스틱 용기나 비닐에 포장된 채소, 전자레인지로 간편하게 조리하는 레토르트 식품, 한 그릇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각각 포장된 밀키트 등 물건화 된 먹거리, 혹은 이미 조리가 완료되었거나 조리할 준비가 완료된 형태로 만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음식을 만날 때, 농산물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정성껏 가꾸어낸 농부의 삶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스며있다는 것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모든 식재료를 농장에서 직접 보고 수확해 와서 요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우리의 식탁을 채우는 먹거리가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해 누군가의 정성어린 손길과 마음, 자연의 신비로운 흐름을 통해 성장하는 시간을 거쳐온 것임을 생각할 수 있는 한 조각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것이 매일의 일상이 되기는 어렵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지켜갈 수 있는 속도로 해나가는 것. 그런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의 삶과 자연을 보다 푸르게 지탱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배서영
- 우리 농산물과 식물기반 레시피로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만드는 브랜드 ‘홀썸’을 이끌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프랑스 요리를, 졸업 후 사찰요리와 생채식을 공부하며 식재료와 문화가 우리 삶의 터전에 미치는 영향에 눈을 떴다. 내 일과 가치관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삶을 지향하며 요리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통해 이를 나누며 살고 있다.
kelly@wholesomevegan.co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2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팜투테이블, 연결과 순환, 요리하는이와 농사짓는이, 사람과 자연, 재료와 음식…. 결국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치면서 계속 연결고리가 이어지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겠지요. 마음대로 자란 가지들이 수확된 사진들을 보면서 말끔한 가지 상품보다 더 정이 가네요.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그리고 쟈연과 연대하면서 걱장한 먹거리를 추구하는 삶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사였습니다!
공감합니다.
글만 읽어도 그 곳의 푸르름과 풍성함이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