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딸만 내리 아홉이 태어난 집안에서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겨우 두 해 남짓 학교에 다니며 익힌 히라가나가 배움의 전부였던 그녀는 해방하고는 그마저도 다 잊어버렸다. 그 시절의 숱한 여성들처럼 어려운 세월을 보내며 일찌감치 결혼하였고,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내조하며 열심히 살아냈다. 평생이 분주해 글을 모르고도 잘 지냈다. 그러다 나이 80이 되던 해에 문해학교를 나가기 시작했다. 기역, 니은, 디귿을 꾹꾹 눌러 자꾸 써도 진도는 더디게 나갔다. 지난 세월은 그녀의 기억력과 손 근육의 힘을 약하게 했지만 배움의 시간은 즐겁기만 했다.
그러다 놀라운 일이 생겼다. 문해학교에서 함께 나간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덜컥 상을 탄 것이다.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았던 것처럼 그림을 배운 일이 없었고, 그려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 벌써 5년째, 그녀는 딸이 사준 그림 도구로 하루도 빠짐없이 두서너 장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의 주제는 매일의 일상, 살고 있는 동네, 옛 기억 등이다.
증평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지금도 살고 있는 이종국 ‘그림기록가’의 이야기이다. 어떤 이는 우연히 얻어진 시골 할머니의 취미생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림기록 활동’이 증평에서는 대단한 지역 역사 쓰기가 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록해야 의미 있는 기록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와 관련하여 평범한 시골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기록 활동은 증평기록관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누가 기록하는가
증평에는 다양한 시민기록가가 있다. 증평기록관의 아카이빙 프로그램에 참여한 24명의 증평기록가, 7명의 어린이기록가, 형석중학교 100명의 청소년기록가 등이 그들이다. 이종국 그림기록가처럼 프로그램에 참여하진 않았어도 기록관에 수집, 생산한 기록을 기증한 ‘사랑스러운’ 아카이버(archiver)도 활동 중이다. 오래도록 기록은 소수의 힘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었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대다수 시민은 기록되지 못하여 역사 속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증평에서는 시민이 기록하기 시작하니 바로 그들의 이야기가 지역의 역사를 채우기 시작했다.
한편, 증평에는 사진, 그림, 영화로 기록 활동을 하는 예술가도 있다. 증평 사람들은 기억을 더듬어 옛 증평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지금의 삶과 활동을 보여주고, 때로는 카메라 앞에 서서 주인공이 되면서 이 예술가와 소통한다. 문자 중심의 딱딱한 기록과 달리 시민과 예술가가 함께 만들어가는 기록에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더해지고 증평기록을 다채롭게 한다.
무엇을 기록하는가
만들어지는 기록, 남겨지는 기록, 기록을 이용할 권리에는 권력이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래도록 기록은 소수의 힘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권력이 차츰 시민으로 이동하고 기록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근대 이후에도 대개는 행정기록 중심으로 남겨졌고, 1999년 우리나라에 「기록물관리법」이 제정된 후에도 여전히 그 전통은 이어져 왔다. 소수에 집중하고, 법에 따라 기록을 남기는 일은 해오던 것이라 오히려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는 시대에 이제 다수 시민을 더 잘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을 기록해야 하나’는 늘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기록되지 못하였던 시민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증평에서는 우선 시민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나와 내 가족, 우리 마을과 학교, 우리의 활동은 내가 전문가니까. 주체이자 대상이 되어 나의 눈높이로 기록하는 것이다. 바쁘게 사는 속에 그냥 지나치고 사라지던 일상에 가치를 부여하고, 내가 주인공이 되는 기록으로 포착해 내니 매일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시민의 삶이, 활동이, 살아가는 동네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마법이 생겨났다.
어떻게 기록하는가
기록의 역사를 배우면 대개 자연 속의 사물을 활용해 기호나 그림을 새겨두던 것부터 시작한다. 그러다 문자와 종이가 발명되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도구와 매체가 생겨나는 수순이다. 기록하는 방법이 시대와 기술에 따라 발전하고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글로 이루어진 오래된 문서를 더 가치 있는 기록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많이 보았다. 이미 존재하는 기록물을 발굴하여 ‘수집’하고, 어떻게 잘 보존할 것인가를 더 많이 고민해 왔다. 그러나 증평에서는 글뿐만 아니라 그림, 사진, 영상, 영화, 구술기록, VR로 기록을 ‘생산’하고 ‘채록’하는 활동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기록을 ‘생산’하는 활동은 바로 지금을 기록하여 미래의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그 일을 위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연대하고 협력한다. 사진을 찍고, 옛 공간을 그림으로 복원하고, 지역의 이야기로 기록집이나 영화를 만드는 등의 일에 증평사람들은 함께 한다. 인터뷰와 구술을 통해 기억을 기록으로 만드는 ‘채록’은 누군가의 삶을 특별하게 만든다.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소중한 지역의 역사로 보존되는 경험은 소통하고 치유되며 인정받는 과정이다. 애정 어린 시선을 주고받고, 서로의 삶에 공감하고, 박수치고 환호하며 우리 모두가 위대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추앙한다. 그 결과물인 기록은 따뜻하고 생동감 있다.
함께 만드는 기록의 힘
증평은 2019년부터 <증평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증평기록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시민이 지역 아카이빙의 주체가 되어야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시작했던 이 실험에서 생각지 못한 큰 선물을 얻었다. 증평기록가들은 살아온 삶은 물론, 지금을 살아가는 활동의 가치를 깨닫고 스스로를 기록으로 남기는 활동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 이 활동으로 기록이 차곡차곡 쌓이고 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미래의 증평역사도 만들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록관은 증평전문가인 기록가들에게 증평을 배우고 있다. 시민과 함께 기록하는 활동을 경험하며 아카이빙 방법론도 성장시키고 있다.
지난 4년 과정의 결론은 ‘누구나 기록하고 기록되는 세상’이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기록 활동 과정에서 자신과 지역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고, 누구나 주연이 되는 경험으로 자부심과 떳떳함도 생겨난다. 거기에 풍성하고 입체적인 기록과 역사는 덤이다. 이 즐겁고 행복한 도전의 일은 2023년에도 증평에서 계속될 것이다.
- 신유림
- 증평기록관 기록연구사. 경제학, 문헌정보학, 기록학을 전공하고 라디오자료실, 도서관, 기록관 등에서 20년을 넘게 일했다. 현재는 2010년부터 근무해온 증평군청에서 지역 아카이빙과 시민기록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shine@korea.kr
사진·이미지 제공_필자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5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나의 삶을 기록하며
서로의 삶을 추앙하며
누구나 기록하고 기록되는 세상
잘 보고 갑니다
나의 삶을 기록하며
서로의 삶을 추앙하며
누구나 기록하고 기록되는 세상
기대만점입니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역사를 만드는 것…. 화이팅 하세요.
그림 기록은 역사를 더욱 즐겁게 기억하게 하네요.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평생을 통해 반복되곤 하는 것 같습니다 증평의 기록가 분들은 기록가양성프로그램을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심도있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셨을 것 같아요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건 굉장히 좋은 일이니까요 !
무형의 시간을 기록을 통해 손에 잡히는 유형의 자료로 만들어내는 것 , 정말 멋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