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집단, 사람을 만나 매력을 느껴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출판해야겠다는 욕구는 어쩌면 원초적이다. 연애처럼. 내가 느낀 것을 함께 나누고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 닮았다. 기획 단계는 썸이라면 리서치 단계(콘텐츠 제작)는 연애 초반이고 완성 단계는 연애 끝자락이다. 주제 대상과 어떤 연애를 했는지는 결과물에서 알 수 있다. 어떤 매력을 느꼈고 얼마나 집중했는지, 얼마큼 애정을 쏟았는지가 모두 책에 드러나니까.
나 또한 연애하듯 지난 9년간 8권의 책을 만들어왔다. 지역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도, 특정 집단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도, 식물과 동물에 관심이 많아 그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작업하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 언제였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기획 단계인 것 같다. 매력 있는 주제를 찾은 설렘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창작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친다. 이때 느꼈던 강렬함으로부터 리서치 하고, 원고를 만지고, 책을 다듬을 에너지를 얻는다.
발견과 설렘
기록물을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매력 있어 보이는 주제를 발견했다면, 일단 가볍게 만나면서 썸을 탄다. 1차 리서치 단계다. 내게 익숙한 것과는 조금 다른, 특별히 눈에 띄는 것들을 발견하고 수집한다. 이때 수집용 도구는 그때그때 빠르게 메모하고 찍어둘 수 있는 스마트폰 정도면 충분하다. 관찰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다양하거나 복잡한(전문적인) 도구를 가지고 다니면 오히려 수집을 방해할 수 있다.
1차 리서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수집한 재료들을 늘어놓고 목차(혹은 구성)를 생각해본다. 고백하는 시간이다. 내게 당신의 어떤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고, 이 책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떤 흐름을 갖고자 하는지를 적는다. 주제에 대해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대한을 상상해본 뒤, 1차 리서치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을 추려낸다. 이때 정하는 목차는 추후 바뀔 수도 있지만, 앞으로 진행할 세부 리서치의 뼈대가 되어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절차다.
목차 정리가 끝났다면, 그것을 토대로 세부 리서치를 한다. 연애의 시작. 주제가 갖는 매력에 대해 깊이 파보는 시간이다. 이 과정에서는 각자가 가진 기술과 능력에 맞게 수집용 도구를 고른다. 이때 모으는 재료로 책을 만들어야 하므로 조금 더 정성스레 담을 필요가 있다. 또 중요한 것은, 내가 담고 싶은 이야기보다 조금 넘치게 재료를 모으는 것이다. 재료가 적은 것보다는 언제나 좀 넘치는 게 좋다. 그 안에서 새로운 생각이 피어오르기도 하고 추후 편집할 때도 재료가 넉넉해야 고생하는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세부 리서치를 하면서 목차는 몇 번이고 바뀌기도 한다. 그렇게 책 모양을 잡아간다. 세부 리서치가 끝날 때쯤이면 목차는 확정되고, 책 제목도 정해지거나 후보가 생긴다.
비움의 미학
리서치의 과정이 모두 끝났다면 재료를 다듬는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연인을 어루만져주는 시간이다. 재료를 충분히 준비했다면 보통은 더 써야 하기보단 아주 많이 쳐내야 한다. 비움의 미학이 발휘되어야 하는 순간이다. 책 만들기 수업을 해보면 버리는 것을 매우 아까워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창작이 그러하듯, 책 또한 정도가 과하면 주제와 논점을 흐릴 뿐이다. 이미 주제에 대한 애정은 충분하니, 객관성을 가질 차례다. 기록이 탄력을 가질 수 있도록 편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료 다듬기, 즉 콘텐츠 제작이 끝나면 연인을 떠나보내기 전 편지를 쓴다. 시작글과 맺음글이다. 이 부분은 선택사항이지만, 나는 꼭 쓰는 편이다. 기획자의 생각과 의도가 조금 더 분명히 적혀있고 이 기록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이기도 해서 시작글과 맺음글이 있을 때 기록물의 가치는 배가되는 것 같다. 또, 그간 고생하며 작업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에게 좋은 영감을 준 지역, 사람, 생명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는 시간이다.
책의 모든 내용이 나오면 교정 교열을 맡긴다. 내가 만든 콘텐츠는 내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실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비문을 정리하고 맞춤법을 바르게 고쳐줄 수 있는 제삼자가 필요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기왕이면 프로젝트를 잘 이해하는 분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언어는 한 끗 차이로 느낌이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리 어떤 프로젝트인지 서로 대화를 충분히 갖고, 기왕이면 뜻이 비슷한 분을 찾아보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제목 정하기와 책 디자인이 남았다. 콘텐츠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제목과 디자인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책 주제가 재치 있게 전달되는 마무리를 위해 디자인을 충분히 고민하고, 책 제목은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 좋다. 친구에게 연애 상담을 하듯 말이다. 기록자는 너무 오랫동안 콘텐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남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제목에 넣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가치가 제목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꼭 내가 원하는 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결정하는 것은 나이니, 객관적인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고 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기억을 견고히 하는 의미
기록물과의 한바탕 연애가 끝이 났다. 연애가 끝나면 꼭 다시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왜 연애할까? 왜 기록해야 할까? 얼마 전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 <알쓸인잡>에서 천문학자 심채경 씨가 이런 말을 했다.
“일기가 생존에 도움이 돼요.”
무슨 말인지 궁금하여 계속 들어보니 또 다른 패널이 이렇게 말했다.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건 미래를 생각하는 거거든요.”
기록물은 창작자의 일기다. 지금의 기억을 견고히 하여 다음을 생각하는 것, 경험을 통해 또 다른 창작을 기대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존을 위한 일. 특히 지금 한국의 문화예술교육은 독자적이기보단 지원에 의존하는 것이 대부분이니, 미래를 생각하기 위한 기록은 더더욱 필요하다. 사실 내가 만든 책들은 ‘작업(artwork)’의 성향이 더 크지만, 문화예술교육에 관련한 기록물 또한 그 제작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 프로그램을 창작물로 생각한다면, 기록물 또한 제2의 창작물이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발판이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기록물과 연애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필자의 기록물]

  • 『장롱다방 : 대화집』

    『장롱다방 : 대화집』
    영등포노인복지관에서 3개월 간 팝업공간
    ‘장롱다방’을 운영하며 나눈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담았다.

  • 『방산어사전』

    『방산어사전』
    서울 중구 방산시장에 가면 볼 수 있는
    외계어 같은 전문 용어 150개를 정리하였다.
     

  • 『문래도구사전』

    『문래도구사전』
    문래동의 철공인과 창작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을 인터뷰하여 담았다.
     
이연우
이연우
환경과 동물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예술노동자. 원래는 시각예술·독립출판 창작자인데, 어쩌다 보니 글도 쓰고 디자인도 하고 문화기획자로도 활동 중이다. ‘피스오브피스’의 멤버이자 인쇄 매체 기반 예술가그룹 ‘해방해방’의 대표를 맡고 있다.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기록집 『장롱다방 : 대화집』 『방산어사전』 『문래도구사전』 외 다수를 기록·제작·출판했다.
개인 인스타그램 @yeonurhee
피스오브피스 인스타그램 @pofp_studio사진·이미지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