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기가 아무리 날카로울지라도, 설령 황소가 무거운 걸음으로 느릿느릿 걷는다 해도, 쟁기는 황소 뒤에 매다는 편이 낫다”는 말이 있다. 새로운 일이 정신없이 일어나고 변화를 요구하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지역문화재단의 기본 역할인 ‘지원’과 ‘향유’라는 두 축을 기본토대로 삼는 것이 황소 뒤에 쟁기를 매다는 것이 될 것 같다.
나는 작년 8월 1일부터 김해문화재단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코로나19가 지속되는 동안 예산이 줄어들어 일이 많지 않을 텐데 월급은 꼬박꼬박 받는 문화재단’ ‘공무원보다 더 형식을 따지는 관료성과 애매한 행정으로 일하는 문화재단’이라는 말을 들었다. 전국에 116개의 기초단위 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있으며, 지난 20여 년 동안 문화재단들이 열심히 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일에 대해 무얼 알고 있나 싶었다. 그래서 문화재단이 해왔던, 지금도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일의 절차에 대해, 일의 방식에 대해, 마음가짐에 대해, ‘왜 그래야 할까’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생각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 시간성과 긴급성을 기준으로 ‘정책의제의 우선성’을, 인력 및 재원 투입 정도의 ‘동시성의 선택’과 효과성을 기준 삼아 내내 해왔던 ‘지원’과 ‘향유’의 방식을 살펴보았다.
우선 김해문화재단 직원들에게 지금까지 해 왔던 예술지원 방식에 대해 ‘왜 그래야 할까’라는 질문과 ‘그래야 했다면’ ‘과연 그러한가’를 냉정히 토론해 보자고 했다.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의 방식에 대한 전복이 가능할까’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불가사리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재단에 질문하기-‘과연 그러한가’

  • – 재단 설립 후 지금까지 지역 문화예술을 위한 지원을 해왔는데 ‘과연’ 지역의 예술가(단체)가 지원을 통해 성장했는가, 김해시민은 ‘과연’ 문화재단이 제공하는 문화예술서비스를 제대로 향유하고 있는가
  • – 재단은 문화생태계의 근간인 지역예술인에게 ‘과연’ 성장을 위한 건강한 토양이 되었던가
  • – 재단은 코로나19라는 위기를 만났을 때 지역의 문화예술계 회복을 위해 한 역할이 ‘과연’ 효과적이었던가
  • – 재단은 김해시 역사전통 가야 2000년의 자원이 미래의 김해 2000년으로 만들어 가는 길목에서 ‘과연’ 기반을 만드는 일에 제대로 동참했는가
과연, 왜 그래야 할까
우리의 질문은 작은 주제에서 큰 주제로 오갔고, ‘과연’이라고 질문하면 ‘글쎄요’라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했다.
‘과연 그러하지 못했다면, 무엇을 왜 그러하지 못했는지 성찰하자’
‘성찰했다면 실천하자’
‘실천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인 제안을 하자’
‘다짐이 될 기준을 먼저 만들자. 그리고 그 기준은 예술인과 소통‧환류하여 수정‧보완을 지속적으로 하자’
이러한 토론과정을 거쳐 탄생한 ‘김해 예술인 지원 사업 불가사리 프로젝트’는 송무백열(松茂栢悅)의 마음으로, 김해문화재단이 김해 예술인의 ‘벗’이 되고자 하고, 김해 예술인은 김해문화재단을 ‘벗’으로 삼아, 그동안 ‘과연’ 제대로 했던가에 대한 자성을 바탕으로 ‘김해, 우리들의 해법’을 찾아가기 위한 첫걸음이 되었다.
2021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불가사리 프로젝트의 과정은

  • 1) 직원들과 허심탄회한 회의(재단 직원들은 ‘형식에 갇혀있지 말고 창의적으로 한번 해 봅시다’라고 제안했고, 나는 이 말에 힘을 얻어 불가사리 프로젝트 시작을 알리기 시작했다)
  • 2) 지원대상인 김해 거주 예술인(단체) 현황 조사
  • 3) 현황 조사를 기반으로 그동안 김해에서 활동해 왔던 예술단체 대표들과 간담회(‘그동안 문화재단이 예술가 지원을 썩 잘한 것 같지 않다’는 것으로 말문을 트자 김해 예술인들은 오히려 직원들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지금부터 잘하면 되지’라고 했다)
  • 4) 12월 21일 ‘예술인 정책포럼 : 듣는 자리’ 개최, 김해 예술인들에게 재단의 지원철학과 방향을 먼저 설명하고, 간담회 때 나온 의제를 사전에 정리, 이를 중심으로 토론 진행, 참여한 예술가들은 의제 별로 제안된 의견을 발표, 공유하고,
  • 5) 포럼에서 제안된 의견을 반영하여, ‘2022년도 불가사리 프로젝트 기획안’의 초안을 만들었다.
왜 사업명이 ‘불가사리’냐고 묻기도 한다. 2천 년의 가야는 철기 문명, 즉 야금(冶金)과 제련(製鍊)의 문명이 꽃피었던 ‘철의 왕국’이었고, 또 ‘철을 먹는 불가사리’의 설화가 있는 점을 활용, ‘철의 왕국 김해에서 철을 먹는 김해 예술인’이 불가사리처럼 무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뜻을 담았다.
예술인의 무한 성장을 지원하기
2021년 하반기 사전 조사에서부터 예술인 간담회를 거쳤던 불가사리 프로젝트는 2022년 1월,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조례에 의하면 김해문화재단은 ‘지역의 자율적인 문화예술 활동 진작’ ‘시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설립되었고, 궁극적으로 김해시민의 ‘문화복지 증대 구현’이라는 임무가 명시되어 있다. 알다시피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영역의 삶이 위축되었고, 김해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더불어 ‘김해 예술인들에게 너무나 높은 문화전당의 문턱’이라는 말도 있었기에, 재단 직원들과 함께 문화재단 설립목적을 상기해 보았다.
“그동안 한정된 예산과 기존 지원시스템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 우리가 발상을 바꾸면 김해 예술인들 모두 매년 재단의 공간, 무대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했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움직였다. 물론 재단 사업의 많은 부분은 주어진 예산 속에서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지원을 결정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수월성을 시민의 문화예술 향유에 기여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불가사리 프로젝트는 김해의 조건에 맞는, 기왕에 확보되어 있는, 조례에 의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지역 문화예술인(단체) 지원 예산을 활용하여 기획되었다. 다시 말해 예산을 더 투입한 것이 아니라 지역 문화예술인에게 연간 지원되었던 기존 재원을 한데 모아 사용했기 때문에 기존 사업을 흔들지 않아도 가능하였다.
그동안 예술인(단체) 지원은 ‘소액 다건’이냐 ‘선택과 집중’이냐로 고민이 많았다. 김해만의 지원체계를 만들어보겠다고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풀어야 할 과제가 계속 생기고 있다. 현 제도상에서 실현하기는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지원시스템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지 등의 과제가 뚝뚝 떨어진다. 아무튼 불가사리 프로젝트를 시작, 진행하면서 재단이 존속하는 한 예술가 지원은 임무이며 어떻게 해서든 지속가능성을 담보한 지원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예술가와 문화재단이 각각 주체로서 만나 협력하고 동반 성장해야 한다는 것 등,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마법이나 기적이 아닌, ‘소통’(communication)과 ‘합의’(consensus)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김해 예술인(단체)과 솔직한 의견을 나누었던 ‘듣는 자리 포럼’에서, 김해문화재단은 그동안 ‘관리자 중심의 공간 운영을 했으며, 단발성 지원으로 예술인의 경쟁을 유발했다’고 자백했다. 우리는 그동안 지원심의의 객관성과 공정성 확보를 위한 공모절차의 강화와 외부 전문가 심사를 통해 수월성이 확보되었다고 여겨왔고, 문화재단 직원들이 문화예술 기획자로서의 전문성을 갖고 입사했다는 사실을 잊은 채 행정절차만 외치는 관료처럼 군 것은 아니었던가를 반성했다. 이에 대해 김해 예술인들은 ‘예술인의 삶과 성장이 뒤따르는 지원’이어야 하며, ‘지원을 통해 지속가능한 경험과 축적으로 예술인의 창의성이 만개할 때 비로소 건강한 예술생태계가 조성’되고, 이를 통해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재단은 이 의견에 적극 동의했다.
우리는 완전한 기획이 아니더라도 불가사리 프로젝트를 빨리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김해 예술인의 1차 제안을 중심으로 사업의 얼개를 짜기로 했다. 앞으로 사업 진행 속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문화재단이 혼자 끙끙거리는 것이 아닌, 김해 예술인과 함께 의논하면서 해결점을 찾기로 했다.
함께 의논하며 해결하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증명 등록 통계와 예술경영지원센터 전문예술법인·단체 지정현황을 보면, 김해 거주 예술인은 980명, 전문예술법인·단체는 15개다. 당연히 통계에 잡히지 않는 예술가와 단체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지원대상 기준을 ‘김해에 주소지를 두고 실제 거주, 활동하고 있는 전문예술인’으로, 개인의 경우 예술활동증명, 단체의 경우 전문예술법인·단체를 1차 기준으로 제시했다. 공모 기간에 신청서를 받아 지원 기준에 부합한 서류를 순서대로 선정하였으며, 만약 올해 신청자(단체)의 수가 재단 지원의 예산 범위를 넘어설 경우, 그다음 해에 별도의 신청 절차 없이 자동으로 우선 선정되도록 하였다.
이런 방식에 대해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재단이 예산을 기준 없이 사용한다’ ‘전문가 심사가 없으니 질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김해에 이사 가면 다 지원해 줄 것이냐’ 등의 문제 제기도 있었다. 또 불가사리 프로젝트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이유와 과정보다는 ‘선착순’이나 ‘무심의’라는 표현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예술활동증명과 전문예술법인·단체가 신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아무나’ 신청하기 어려운 높은 장벽이었다. 신청서에 단체나 개인의 ‘사회적 기여’(예컨대 탄소중립, 지속가능발전 등)에 대한 목표 제시, ‘예술인 권리 보장, 공정보상 등의 가치’에 동참, ‘중대재해처벌법 등 관련 안전교육 이수, 성인지 감수성 교육 이수’ 등도 조건이었다.
사업수행 기간으로 제시한 1월에서 3월은 대관이나 기획 사업이 많지 않은 시기이자 예산 집행이 낮게 이루어지는 시기, 즉 재단 입장에서 보면 사업비 지출이 활발하지 않은 연초이고, 예술가(단체)의 입장에서 이 시기는 일종의 춘궁기다. 기본적인 운영원칙으로 불가사리 프로젝트는 ‘공간지원’(공연장, 연습실, 회의실, 분장실, 아트살롱 등)과 공연기획파트와 무대예술 파트의 문화재단 ‘전문인력 지원’, 그리고 창작활동을 위해 보상금으로 ‘실경비 지원’이라는 세 가지 지원을 토대로 ‘총액 소진제’를 적용하였다.
선착순으로 신청서 접수, 선정된 예술인(단체)은 최초 제출한 신청서를 재단 직원들의 기획안 및 예산서 작성 가이드를 받아 최종계획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신청기관의 지원액은 재단이 상한선을 정한 것이 아니라 규모와 내용에 따라 예술인(단체)이 직접 작성하도록 했다. 재단 직원들은 기획자로서의 전문성을 활용, 선정 예술인(단체)이 객관적인 기준을 두고 적정한 예산 수립과 함께 사용할 공간의 선택, 재단의 공연장 전문인력 활용, 공연 및 전시 시기 등을 협의하였고, 예술인(단체)이 창·제작 등 예술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후정산은 문화재단 담당 부서에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지원자를 떨어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와 예산 산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지키면서 한 푼이라도 예술가(단체)의 몫으로 가도록 하면서 지원액의 규모 등 예산액과 시간, 공간, 인적자원의 지원 범위는 협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이 불가사리 프로젝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해와 존중으로 만나기
2022년 사업에는 총 43건의 신청 중 42건을 추진하여 김해 예술인 615명이 참여했고, 총 6,069명의 관객이 공연을 관람했다. 불가사리 프로젝트를 통해 문화재단은 김해 예술인의 열정과 역량을 확인하였고, 김해 예술인들은 문화재단의 조건과 상황, 행정행위에 대해 이해하면서 재단 직원들이 문화기획자로서, 공연 감독으로서의 전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사업을 하면서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인식에서 지역 문화예술인을 만나야 한다고 여겼다. 재단 직원들은 사업 종료 후 김해 예술인과 함께 5회의 간담회를 진행하며 올해 사업수행을 통해 제기된 문제와 기준을 정비하여 2023년에 적용하기로 합의하였다.
참, 김해 예술인들의 지원시스템이 불가사리 프로젝트라면, 시민에게 최상의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기획, 초청의 ‘거북이’ 프로젝트, 김해 예술인이 다른 지역으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교류하는 ‘봉황’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다. 내년의 불가사리를 준비하면서 김해문화재단은 예술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김해다운 지원체계가 모양새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손경년
손경년
김해문화재단 대표이사
dodoson@gmail.com
사진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