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현장’이다. 현장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인식하는 ‘관점과 태도’는 사업을 운영하는 방향이나 방법을 결정한다. 그리고 결국 ‘어떤 일이 생긴 자리’로 존재하게 된다. 일상적 관계의 중요성이 계속되는 요즘, 여전히 정책적 필요나 굵직한 연구보고서를 그대로 적용하여 사업을 설계하거나 공급자 역할만을 하는 곳이 있다. 그럴 경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대상화되거나 구체적으로 호명되지 못한다. 어린이와 예술교육가는 더더욱 그렇다.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이하 ‘창작놀이터’)가 남긴 것을 사업 우수사례나 노하우보다는 미처 표현되지 못한 ‘사람을 대하는 공간’의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2020 예술로 부모 플러스 <아트맘>
공간이 어린이를 만난다는 것
2010년 12월 서울시 컬처노믹스 정책의 일환으로 옛 은천동 동사무소를 리모델링하여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가 문을 열었다. 전략적으로 어떤 부지 안에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장소 한가운데 자리 잡다 보니 어린이의 일상 곁에서 그 삶의 영역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공간을 반복해 드나들고 반복해 만나던 아이를 ‘초등학교 고학년’ 이런 식의 교육대상으로 서술하기에는 모른 척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주체적이고 반응적으로 사업을 기획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이들에게 창작놀이터는 그냥 우리 동네 공간으로, 우리에게 아이들은 교육대상이 아닌, 그냥 우리 아이들이 되었다.
[시민의 이야기]
“6살부터 다닌 우리 아이는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고 사진 속에는 늘 창작놀이터가 있어요. 아이와 사진을 보며 친구에게 여기를 소개한다면 뭐라고 할 거야 물어보니 한참 생각하더니 ‘그냥 이름 그대로 창작놀이터야’ 하더라고요. 아이가 부모 손에 이끌려서 오는 것이 아닌 스스로 즐기고 있다는 것, 이 말 안에 많은 것이 포괄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창작이라는 말을 교육에 많이 붙이고 엄마들이 혹하기도 해요. 대부분 아이들이 프로그램 안에서 움직여야 되는데 여기는 뭘 하든 의견이 존중되고, 정해진 것을 배워 성취도를 높이는 게 아닌 아이들 안에 담긴 것을 스스로 표현하게 해줘요. 자꾸 안에 들어가서 뭔가를 꺼내는 것, 그게 좋았어요.”
  • 2017 예술로 상상극장 <시르릉비쭉할라뽕>
  • 2018 예술로 놀이터
공간이 만만하게 여겨진다는 것
보이는 공간 자체가 ‘사람’을 배려할 때가 있다. 딱딱한 바닥의 강의실이 아닌 소박하지만 신발 벗고 뛰고 눕고 뒹굴며 놀 수 있는 따뜻한 온돌이 놓인 1층과 2층 방(아이들은 워크숍 룸과 북카페를 이렇게 불렀다)은 신기하게도 예술교육, 공연, 전시 등 다양한 예술 경험이 가능하였고 학교 끝나고 잠시 들려 책을 읽기도,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며 친구들과 한껏 예술을 논하기도 했다. 언니 오빠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어린 동생은 가장 편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고, 어른들은 옥상정원에서 바쁜 일상 차 한잔하며 숨을 돌린다. ‘사람’을 위해 공간의 문턱을 낮추다 보니 재미있는 상황도 있었다. 할머니가 머리에 펌 롤을 말고 와서 손자를 맡겨 놓고 가기도 하고, 뛰어 들어온 아이는 책가방을 던지고 안내데스크 전화로 엄마에게 전화한다. 어디냐고 묻는 물음에 “여기 창작놀이터야” 이 한마디에 엄마는 안심하고 전화를 끊는다.
“여기가 좋은 게 번화가에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동네 안에 있어 친근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학교 끝나고 정말 편하게 드나들었거든요. 아이들 스스로 언제든지 와서 놀 수 있었어요.” (시민)
“시간 맞춰 들어가는 교육실만 있다면 아쉬웠을 것 같아요. 위층에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의미 있었던 거 같아요. 예술가란 사람과 지나가다 마주칠 수도 있고, 애들이 항상 있으니 예술가 입장에선 막히면 물어볼 수도 있고 그 공존이 되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가)
이렇게 드나드는 사람이 공간을 만만하게 여긴다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이것은 최고의 장비와 시설이 있고 세련된 서비스 제공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공간의 구조는 물론 공간 안팎의 일상과 분위기를 수용할 때 비로소 공간은 ‘사람의 자리’가 된다.
  • 2018 공간기반 예술프로젝트
  • 2019 예술로 프로젝트 <아버집>
예술교육가가 어린이를 만난다는 것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예술을 만나게 해주고픈 마음은 어디고 다 같다. 하지만 예술교육가가 어린이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 하는 물음이 우선되는 곳은 많지 않다. 창작놀이터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은 프로그램이 형식을 갖추기 이전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한 호감과 아이들 스스로 생각을 표현하는 시간이 녹아있는가를 먼저 고민했다. 그리고 어린이의 거절도 표현인지라 거절, 불참, 망설임, 딴짓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관점을 기억한다.
[예술교육가의 이야기]
“미래라는 키워드로 상상해 보는 시간이었는데 과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상상하는 친구도 있고 철학적인 얘기를 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지금 초가 흐르면서 미래가 들어오고 있으니 현재도 미래와 다름이 없어요.’ 앞니가 빠진 상태로 한 아이가 이걸 왜 몰라 너무 당연한 거지 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상상조차 정형화한 제 편견이 깨지며 어리다기보다 그냥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저보다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얘기 나누는 게 즐거웠어요.”
“아이들에게 질문하면 이렇게 대답할 거야, 그럼 이렇게 하고 이렇게 끝내자하면서 진행자 위주로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창작놀이터에서 어린이를 만나며 이게 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저를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거절도 이 아이의 표현이다. 창작놀이터에서 가장 많이 나누는 이야기에요. 어른들에 의해 모집되어 온 아이들 혹은 활동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온 아이들에게도 각자의 의사가 있거든요. 어떤 아이는 엄마가 신청해서 왔다며 몸을 꼬아요. 나는 네가 같이 참여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하면 ‘엄마가 그냥 신청했단 말이에요.’ ‘그럼 좀 속상하겠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얘기해’ 했더니 알겠다고. 시간을 주면 마음이 열려요. 어린이도 거절할 수 있는데 그것도 표현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죠.”
  • 2019 어린이극 창작을 위한 예술가 워크숍
  • 2021 예술로 상상극장 배리어프리 공연 <콧물끼리>
공공(관)과 예술가가 만난다는 것
간혹 예술가에게 자신의 콘텐츠로 교육대상에게 ‘시키는 활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트랜디한 사업이 많아 보기에는 세련됐지만 예술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범위가 좁고 ‘미션 수행’이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의 감각과 본질이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에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공공(관)의 언어로 더 완고해진 계획(서)을 힘들게 채워간다. 하지만,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는 조금 다른 태도를 행했다.
창작놀이터의 태생은 창작공간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가 창작활동 중심의 예술교육이 이어졌다. 과정으로서의 창작,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의 예술, 삶에 관한 질문 등이 중시되다 보니 예술교육가(단체) 선정 과정부터 그 의지를 보였다. 촘촘한 강의계획서나 완성된 작품이 아닌 예술가의 창작활동이 담긴 포트폴리오와 예술적 철학, 상상과 아이디어가 더 중시되었다. 선정 후에는 개발과 운영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 참여자 모집, 현장 운영까지 전 과정을 함께 하며 지원했다. 프로그램 시작 전 참여자 오리엔테이션에서도 예술가 소개가 우선이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이것이 어떻게 프로그램에 스며들었는지, 아이들과 어떤 작업을 할 건지 이야기 나눈다. 그러다 보면 참여자는 더 이상 예술가를 강사로만 보지 않는다.
[예술가의 이야기]
“여느 공간과는 달랐어요. 완성된 프로그램을 제출해야 지원해주는 시스템에서 계획만으로도 선정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저희 같은 작은 단체는 과정을 지켜봐 주고 협력해주는 것도 엄청난 도움이죠. 공간이 지원되고 기획 부분을 맡아주시니 저희는 창작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만들어 보고 싶은 게 있어도 장애물이 많은데 그런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게 협력하는 역할을 해주었어요. 실패하는 예술교육가도 환대해주는 곳이었어요.”
“예술가로 존중받은 경험을 했어요.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것을 하는 우리도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코로나로 우리 단체가 어려웠을 때도 어떻게든 해내라는 것에 목적에 두기보다 무엇이 예술가에게 좋은 것인지 함께 생각해 주었지요.”
“굉장히 예술가 중심이었어요. 대부분 현장 컨설팅이 평가인지 모니터링인지 혼재되어 있고 그 초점이 예술가보다는 참여자에게만 맞춰지기가 쉬운데 여기는 예술가의 아이덴티티에 초점이 맞춰져 그 정체성과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던 것이 기억납니다.”
창작놀이터의 문화기획행정가(직원) 또한 예술가가 공간에서 맞닥뜨리는 현장 경험을 함께하기에 협업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프로세스가 형성될 수 있었고 장기적인 사업도 함께 해보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현실적인 기획을 실천해갔다.
[문화기획행정가의 이야기]
“매주 예술가들이 교육하고 연습하는 모습을 계속 피드백하고 얘기 나누기 때문에 내용상 굉장히 깊숙이 관여하게 돼요. 정서적으로 교감을 많이 하고요. 그래서 함께 기획하는 느낌을 계속 가졌던 것 같아요.”
“한편에선 새로운 예술가와 프로젝트 기획을 시도하되, 한편에선 동일한 예술가 그룹과 3년 정도 사업을 심화해나가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들도 프로그램을 운영해보면서 내면에서 새로운 것들이 도출되는 것 같아요. 예술가 스스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고민으로 회귀하는 것 같은.”
“(예전에는) 지원과 모니터링 위주로 예술교육가와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고 어떻게 보면 공지와 안내 같은 식으로만 만났거든요. 창작놀이터에 와서 일하는데 시스템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내가 이렇게 예술교육가랑 대화를 많이 해본 적이 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질문과 논의를 해볼 수 있었고 그런 걸 통해 이해가 생겼고. 존경까지 가는 거예요. 근데 이런 것들을 물려받는다고 해야 하나, 창작놀이터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예술가에게 질문해도 돼. 그래도 돼’ 계속 그러시는 거예요. 또한 예술가분들이 스스럼없이 받아주시고 답해주시고 의견을 제시해주시는 과정이 저한테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각자가 서로를 질문할 수 있는 주체로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는 2021년 12월에 11년간의 운영을 마치고 문을 닫았다. <예술로 놀이터> <예술로 상상극장> <예술로 부모플러스> 등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예술교육 사업을 이어가며 긴 시간 지속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대상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라 그 필요성이 뚜렷하였고, ‘사람’을 대함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관점과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술가에게는 예술교육의 실험과 실행의 장을 지원하는 ‘자리’로, 어린이에게는 스스로 신나는 ‘자리’로 존재한 것 같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예술교육 정책과 사업에 새롭고 멋진 이야깃거리가 많겠지만, 이런 관점에 관한 이야기가 누구나 다 아는 거라며 행정적인 자리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찌 이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있을까.
* 이 글은 관악어린이창작놀이터가 운영을 종료하며 발간한 아카이브 북 『관악, 어린이, 창작, 놀이-터』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이유나
이유나
서울문화재단에 입사한 후 긴 시간 서울예술교육지원센터와 예술교육 공간에 근무하였고, 현재는 문학 기반 예술가를 지원하는 창작공간(연희문학창작촌)에 근무 중이다.
happy5739@sf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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