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사람들’은 DMZ권역을 중심으로 사회문화리서치 기반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분단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작가·기획자들의 모임이다. 이러한 ‘비무장사람들’을 제안하고 조직한 비무장사람들 대표, 작가 진나래를 만나보았다.
보라색 별을 얼굴에 담고 다니는 사람 진나래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겨울이었다. 그해 경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에코뮤지엄 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진나래 작가는 경기도 내 다양한 지역 현장을 탐방하던 중 내가 있던 의정부 빼뻘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경기 북부지역에서 비슷한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동료 작가를 만나니 반가웠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경계의 땅이기도 한 의정부 빼뻘과 연천 신망리에서 각자 작업하고 있는 지역 현장에서의 예술, 또는 예술이라 명명하지 않는 것들의 과정을 이야기 나누며 종종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응원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태양 빛과 풀 내음만으로 충만했던 여름날 DMZ와 접경한 지역 마을박물관이 된 신망리역에서 진나래 작가를 다시 만났다. 비무장사람들의 대표로 분단을 둘러싼 경험을 연구하고 가시화하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는 그간 작업 여정에서의 질문들과 고민, 접경지역의 땅의 시간과 기억을 ‘좇은’ 일에 귀 기울여 본다.
생존을 위한 허구의 가족사
진나래 작가는 2017년 ‘연천 신망리 마을 리서치’를 시작으로 2018년 ‘실향민 공유밥상’, 2019년 ‘DMZ 내일 밥상’ 등 경기 북부와 접경지역에서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지난 2021년에는 ‘비무장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기억하는 건축, 보이지 않는 마음’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분단’을 둘러싼 경험을 연구하고 가시화하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서울에서 접경지역인 연천 신망리까지 장거리를 오가며 몇 해째 작업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저랑은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해왔던 진부한 한국전쟁이나 근현대사가 우리 모두 각자의 삶 속에 녹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작가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해,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가족사에 대해 듣게 되었다. 어머니에 의하면, 작가의 외조부는 한국전쟁 기간 중 납북되었고 일본 유학 시 사회주의를 배웠다는 소문이 돌아 일가족이 서울에서 쫓겨나 경기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가족은 이산의 뼈아픔을 가슴 깊이 함구하고 남한에서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 외조부의 존재를 지우며 생존을 위한 허구로서의 가족사를 지어내어 살아오게 된다.
작가는 “생존을 위한 허구로서의 가족사, 어떤 존재의 삭제에 주목하고 텅 빈 스케치북에서 삭제된 외할아버지의 존재를 새로 상상하며 세워보고자 했다”고 전한다. 과거의 역사로 고착되어만 가는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는 삶들, 이념의 갈등을 넘어 그저 살던 땅과 고향의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하나, 둘 별이 되고 있다. 작가는 더 늦기 전에 별이 되고 말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겹겹의 아픔과 인간의 세월을 기억하는 땅의 목소리를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아두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신망리 마을박물관
  • 전시《땅을 좇는 사람들》
뉴 • 호프 • 타운 : 희망을 품은 마을
연천읍 신망리는 해방 이후 북한의 영토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 남한지역으로 수복된 땅으로 행정구역명은 ‘상리’이며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1954년 5월 약 3만 평 부지 위에 피난민 정착지로 세워진 마을이다. 전쟁 중 폭격으로 허허벌판이 된 땅 위에 미군들이 공수해 온 자재로 가구 당 100평의 대지에 18평 크기의 집 100호를 지어 피난민들이 이주했다. 전쟁의 상처를 잊고 희망을 품고 살라는 뜻으로 미군들은 이곳을 ‘New Hope Town’이라 불렀으며, 전쟁 후 먹고 살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붐비었던 신망리는 당시 연천 일대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이라고도 한다.
“한국전쟁의 미시사적 측면, 특히 다양한 사람들의 가족사나 생애사를 더 알고 싶었어요.”
2017년 경기문화재단 북부문화사업단과 마을 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처음으로 신망리를 방문하게 된 진나래 작가는 신망리 마을의 역사를 접하게 되면서 걸음을 멈춘다. 한때 북한이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인근에 고향을 두고 온 주민들은 북한 교육과 남한 교육을 모두 받아야 하는 등 군의 치하에 있었던 수복지구가 가진 특수성은 개인의 미시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거시적 정치 지향이나 이념보다는 미시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삶 속에서의 어떤 선택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작가에게 신망리 어르신들의 살아온 삶의 이야기는 거시사로 납작해진 한국 근현대사를 온전히 우리의 이야기로 돌려놓는 일이기에 너무나 소중했으리라 느껴진다.
2017년 연천 신망리 마을 리서치 프로젝트 ‘타운. 호프. 뉴’를 시작으로 마을과 연을 맺게 된 작가는 그 해 시각예술 기반의 다양한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사전리서치 단계로 예술적 리서치를 진행하게 되었다. 당시 진행된 마을주민 대상의 구술인터뷰는 참여한 작가들 각자의 작업과 연결되는 1차 자료로써 활용되었다. 그 당시 시인이셨던 이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에 대한 애정을 키웠고 그 애정만큼이나 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프로젝트를 시작한 진나래 작가에게 마을은 접경지역이라는 딱지를 떼고 나면 오히려 도시보다 평온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곳으로 여겨졌다고도 한다. 통일이 되면 언제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정착한 이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한 신망리에는 분단이라는 시린 아픔과 동시에 자연과 공생하며 뿌리내리고 살아도 되는 어엿한 ‘내 땅’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감과 삶의 평화가 공존한다.
“마을에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세워진 마을이고 삶인지에 대해 주민분들과 방문객들이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2017년 주민들과 든든한 관계를 맺게 된 작가는 2020년 경기문화재단의 에코뮤지엄 사업을 통해 신망리 간이역에 마을의 역사를 가시화하는 작은 마을박물관을 만들고자 했다. 코레일의 파업으로 인근에 임시공간을 활용해야만 했던 어려움도 있었지만 2021년 가을 본격적인 리모델링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56년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지어진 이후 2019년 초까지 경원선이 운행되다가 영업이 중단된 신망리역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을의 관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마을 안과 밖을 연결해주던 장소, 전쟁 이후 희망을 품고 온 이방인들을 환대해 준 신망리역이 예술가와 주민들의 힘으로 마을 박물관이 되었다. 작가는 올해 좀 더 정확한 자료조사를 통해 내부를 조성하고, 주민 커뮤니티가 마을박물관을 능동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낼 계획이라고 전한다.
공공적 성격의 지역 프로젝트를 위하여
마을 주민들의 환대와 함께 순탄했던 2017년 ‘연천 신망리 마을 리서치’때와는 달리 3년 후 작가가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의 인식은 부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민과의 소통 부족은 물론 지역을 존중하지 않았던 한 예술가의 프로젝트를 경험한 주민들은 더 이상 예술가를 환대하지 않았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진나래 작가에게 연결되었다. 커뮤니티 작업이 어려워지게 된 작가는 서두르기보다는 공간 조성에 초점을 두고 천천히 주민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전에는 가능했던 노인정 숙박이 코로나 이후 어려워지게 되자 진행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커진 작가는 기관에 경기 북부 지역에 레지던시를 제안해보기도 했으나 현실적으로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결국 작가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야 했다.
“지역과 연계된 일은 분명 어떤 면에서 공공성을 띠고 있고, 그 점에서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숙박료와 휘발유 값, 차량 수리비에 허덕이다 보면 활동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게 돼요.”
지역과 연계된 일은 개인의 작업을 넘어 공공적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현실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지역에서의 창작 노동이 저평가되고 합당한 처우를 받고 있지 못함을 인식하면서도 어려움을 감내하며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들이 많다. 복지 사업만이 공공성을 띠는 게 아님에도 예술은 여전히 개인 창작으로만 인식되어 활동의 지속성을 어렵게 만드는 게 현실인 것이다.
그저 마음들이 있는, 그런 그릇
“저로 인해 공동체가 변화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신망리의 공동체는 이전부터 단단했고 저는 그저 중간에 나타난 외부인으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책 갖다주고 전시 열고 잔치 열어주고 커피 마시러 자주 오는 그런 젊은이인 거죠. 다만 제가 만든 ‘New Hope Town’ 간판을 보며 무언가 뜨거운 것을 느꼈다고 하는 주민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기뻤어요.”
지역 프로젝트는 마을과 마을 주민, 예술가 모두를 변하게 했다. 신망리마을에는 마을박물관이라는 새로운 커뮤니티 장소가 생겼고, 마을 주민들은 누구도 경청해주지 않았던 나와 공동체의 삶 면면을 마주하고 기억할 수 있는 장소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술가는 이러한 변화를 견인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힘, 소통의 힘을 키우게 된 이 모든 것이 변화인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접경지역의 땅을 좇는 동안 그곳을 발을 붙이고 살아온 주민들의 마음들을 매 순간 대면했을 것이고 그러한 마음들이 담기고 기억될 수 있는 그릇과 같은 공간이 필요했음을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접경지역에서 자신을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이라고 소개한 그녀 얼굴 위에 새겨져 있던 작은 별 문신이 떠오른다. 이미 그녀의 얼굴 안에 천공을 떠도는 자유로운 별이 있지 않은가. 갈망하지 않아도 이미 몸에 자유를 담고 있음을, 그 별 – 자유가 이미 자신의 몸이 되어 있음을 슬쩍 말해주고 싶다.
김현주
김현주(달로) Kim Hyunjoo(Dalo)
시각미술작가. 아티스트커뮤니티 클리나멘 대표. 독일 카셀국립대학교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하였고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사회론적 질문과 함께 낙후되거나 재개발을 앞둔 장소, 혹은 사회적으로 은폐된 장소를 대면해 왔다. 일련의 작품 활동들은 “역사와 개인의 상처를 화해하고 해소하려는 [임상역사]적 성격이 있다(공성훈Prof.)”라는 평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는 소외된 죽음들을 위령하고 보통의 ‘우리’를 동시대로 불러 세우는 작업을 시도한다. 《빼뻘-시공을 몽타쥬하다》(아트캠프 블랙, 2022), 《따스한 재생》(강원국제트리엔날레 2021), 《역사의 방향들 : 당신은 어떤 라인입니까》(서울시립미술관 SeMA창고, 2021)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한 바 있다.
dalohyunjoo@naver.com
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제공_진나래 비무장사람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