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이긴 해도 봄 풍경엔 순서라는 게 있었다. 나목을 배경으로 산수유가 가장 먼저 노랑을 흘리고 목련이 손바닥 같은 꽃잎을 드리우면 길가에는 개나리가 늘어진다. 언덕과 산등성이에서 겨우 분간이 될까 말까 하는 진달래 연분홍을 찾아 헤매다 보면, 곧이어 벚꽃에 시선을 내주어야 할 시간이 된다. 바닥에서 시작한 새순의 가녀린 연둣빛은 낮은 관목에서 키 큰 교목으로 옮겨가다 결국엔 요란스러운 철쭉과 만나 본격적인 초록으로 마감한다. 그랬던 봄이, 봄꽃들이 언제부터인가 점점 더 빨리, 툭하면 순서도 없이 한꺼번에 봉우리를 터트린다. 아, 봄 너마저!
꽃이 피는 조건은 단순히 따뜻한 온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정 기간의 추위가 필요하다. 또한 습도와 영양 상태도 조건을 갖춰야 한다. 낮과 밤의 길이도 중요한데, 어떤 식물들은 일정 시간 이상 밤이 지속되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 자연의 산물이자 일부인 인간도 마찬가지로 시간과 주기를 따랐다. 계절과 절기가 있고 한 달과 일주일, 요일과 밤낮, 주말과 휴일을 따라 살았다. 하지만 봄의 그것처럼 계절과 시간의 경계, 하루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져 왔으며, 지난 2년은 그것을 더욱 심화했다.
감염병 대유행 동안 우리들은 방역을 위해 취해야 했던 물리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도 하던 일들을 계속할 방법, 즉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방법을 고안하느라 부단히도 애썼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공간뿐만이 아니라 시간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삶을 강화했다. 시간의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시간의 제약을 없애버림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체제를 굳혔다는 말이다. 9시에 닫는 영업장의 문 뒤로 심야 배달과 샛별 배송이 활짝 열렸으며, 정말 손가락 ‘까딱’ 한 번으로 무엇이든 여기에 손쉽게 가져다 놓는 “중단 없는 접근의 편리함”(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문학동네)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낮과 밤은 별다를 바 없어지고, 멈추지 않는 밤으로 잠자리도 뒤숭숭해지는 시절, 꽃들이 계절과 개화 시기를 조금 착각하는 것쯤이야 대수로울까.
회복을 향한 설렘과 두려움
몇 주 사이에 팬데믹의 해제와 일상 회복이 현실화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의 회복’이란 이전의 일상을 일컫는 게 아니라 다른 세상, 변화된 세계의 본격적인 도래를 의미함은 다들 간파했을 터. 지난 2년의 비상 체제가 어쩌면 달라지는 세계와 질서의 유예기간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처음이라, 적응하느라, 비상이라, 용인되었던 것들, 봐주었던 것들이 가차 없을 것 같다는 예감! 생산성 회복을 위한 속도전 태세가 감지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위험으로부터는 조금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더 진한 긴장감이, 달라지는 세계가 좀 나은 미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설렘에는 그 반대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깃든다.
이런 일상의 도래에 대비하여 부각되는 것이 바로 ‘치유와 회복’의 담론이다. 특히 문화예술(교육)은 치유와 회복으로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픈 정책적 욕구가 여느 때보다 돋보인다. 문화예술이 할 수 있는 위로와 어루만짐의 역할은 독보적이며 또 중요하다. 이 시기는 분명히 아프고 고갈되고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치유와 회복의 역량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에 맞추어 역량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치유적 접근은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심리적 차원 안에서 찾기 때문에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모순이나 혼란, 갈등을 드러내는 대신 방어 전략을 앞세우게 된다. 즉, 자아를 강화해 존엄을 키우는 것이 목표가 되어 ‘당신이 옳다’라고 위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과 만나 자기 자신이 허물어지는 경험은 소거되고, 역동적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변화’나 ‘전환’을 모색하기는 힘들어진다. 자칫 문화예술교육이 치유에 힘쓰다 교육의 본성을 잃고 위로산업과 경쟁하며 스스로 고갈되는 길로 들어서진 않을까 걱정이다. 아울러 치유적 접근은 문제를 사적인 것으로 붙들어놓음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관계를 걷어내어 버리고, 세계나 현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며, 교육의 궁극적 목적의 하나인 세상의 변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아프고 지쳤으며 치유와 회복이 필요하다는 가정하에 문화예술교육의 역할론을 탐색하는 중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쳤다’라는 말은 얼마간의 진실일까. 그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일까. 힘들고 지친 양상은 어떤 식으로 동일하거나 다르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나. 확진자와 의료진, 자영업자 정도를 빼고는 팬데믹 동안 사람들이 어떤 고통과 어려움에 처했고 어떤 모색과 ‘노오력’을 했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의 상태’를 하나의 장면으로 환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따라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치유와 회복은 한 개인의 자아 강화나 존중감 회복을 넘어서 이 사회가 취해야 하는 가치의 회복을 담는 것으로 확장해야만 한다.
겹겹의 존재를 응시하기
다시 봄 풍경으로 돌아가 보자. 순서가 있다는 건 어떤 존재를 기다려준다는 것이고, 기다리는 동안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기다리는 것은 한편으론 그 시간만큼은 존재에 몰두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이해를 낳고 더 많은 세계와의 만남을 허락한다. 기다리고 바라보고 몰두하는 것은 무수한, 풍부한 이야기로 보답받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순서가 있고 그에 따라 조금씩 전진하는 봄은 그저 ‘태양의 남중고도가 올라가기 시작하여 따뜻해지는 3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 정도로 뭉뚱그릴 수 있는 개념이나 사건일 수 없다.
팬데믹은 전지구적 차원의 중단의 사건이었다. 매우 긴 겨울이었고, 밤이었다. 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많은 생명을 고통의 시간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이를 겨울과 밤을 꽃을 피우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으로 온전히 이해했다면 우리는 이 중단의 시간에 생산을 중단하고 기다림을 즐겼을 것이다. 중단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죽어라 애썼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애씀의 결과를 편리하게 소비했으며, 그 결과는 새롭게 거대한 시장의 창출이었다. 사람들은 이 새롭게 태어난 시장이 앞으로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이 엄중한 시기에 자연이 보내온 메시지를 통해 세상을 학습하는 쪽을 택할 생각이 별로 없다. 너무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가 자연을 통제하며 변화에 적응해온 쾌거에 대해 빠르게 학습한다. 그것은 몇 번의 클릭으로 손쉽게 이루어지며, 세상이 온통 그러한 학습을 지원하려고 달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회복할 것은 어쩌면 어렵게 취해야 하는 ‘학습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일고 있는 변화를 마치 봄을 바라보듯 쫓기지 않고 충분히 응시하는 태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곳 그 시간을 살아내는 겹겹의 존재들을, 그들의 무수한 빛깔, 음성, 맛과 향을 찾아내는 예리함과 집중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벚꽃놀이 하러 갈 때 그 화려함 뒤에 가려진 가냘픈 연두에 탐닉할 수 있는 감수성과 민감함을 갖춰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7일 중단없는 편리함은 적절히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지성과 각성을 현장에 접목하는 연대 속에서 가능하며, 그 과정이야말로 치유의 과정이 될 것이다. 회복하고 달라져야 하는 것은 변화-적응의 맹목적 연쇄반응이 아니라 그것을 전도(顚倒)하는 것뿐이다.
백현주
백현주
교육기획 및 연구자. 현실문화연구, 안그라픽스 등에서 잡지와 책을 만들며 성인 초기를 보내다 시각문화교과서 작업을 계기로 예술교육 관련 연구와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희망제작소와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일하면서 평생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만나 큰 배움을 얻었다. 자유인이 된 후로는 사람들의 대체불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놀고 쉬는 데 있어서 늘 비교우위에 있는 것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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