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다. 2020년 3월 ‘사회적 거리두기’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우리가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한 달이면 충분할 거야’란 막연한 믿음이 두 달이 되고, 반년이 되고, 한 해가 되고, 2년이 될 것이라고는.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다. 사람 사이도 그랬다. ‘잠시 떨어져 있으면 괜찮을 거야’란 믿음은 마치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타인의 현존을 잃은 예술가
그래도 우리는 나름 훌륭했다. 그 긴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도 서로를 보살피기 위해 노력했다. 마스크가 일상이 되었고, 온라인을 통해 오프라인에서 고립되어 외로워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특히 예술의 힘이 컸다. 많은 예술가가 온라인을 통해 이웃에서 그리고 세계의 곳곳에서 외로워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렇게 예술가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예술이 꼭 필요한 시간에 그 역할을 다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나 머물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온라인에서도 소수의 예술가만이 그 위로의 일에 함께할 수 있었다. 플랫폼이 거대할수록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네트워크 효과’라는 속성 때문에, 소수에게 집중적으로 분배하는 디지털 기술은 그 위로의 자리마저 대중적으로 유명하거나 강력한 후원 기관을 가진 예술가들에게 집중적으로 분배했다. 많은 예술가가 공연장이라는 자신의 터전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 전전해야만 했다.
이렇게 타인의 현존을 잃은 예술가들을 떠올려보라. 예술은 자신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 표현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늘 타인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무대가 필요한 공연예술이라면 타인의 현존은 작품 그 자체의 일부이기도 하다. 더하여 타인의 현존이 없는 예술가는 사적인 개인일 뿐이지만, 타인의 현존이 있을 때 예술가는 사적인 존재를 넘어 이 세계를 함께 공유하는 존재가 된다. 예술가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건 타인의 현존으로서 관객뿐만이 아니다. 무대 자체 역시 예술가에겐 존재의 의미다. 작품을 공연하고 전시할 무대가 있는 배고픈 예술가와 무대 없는 배고픈 예술가를 생각해보자. 같은 배고픔이라도 그 차이는 극단적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터전이 있는 삶은 배고픔을 견디게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삶은 배고픔을 단지 생존의 문제로만 남는다.
2020년 3월 25일,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내놓은 「코로나19 사태가 예술계에 미치는 영향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짧은 시간에 취소되거나 연기된 현장 예술행사가 2,500여 건에 이르렀고, 2019년 1~4월과 대비하여 2020년 같은 기간 동안 예술인의 88.7%가 수입이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2021년 4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발간한 「코로나19, 예술지원의 성찰과 방향성」 보고서를 보면, 이런 피해가 단지 무대가 필요한 예술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문학 분야에서도 창작인 69.9%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예술인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은 극히 적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경영 또는 운영상 피해를 경험한 예술기관이 82.4%에 이르렀던 반면 정부 지원 경험률은 14.8%에 불과했다. 이런 수치들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서 상당한 타격이 있었음을, 예술인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수입을 유지할 수 있는 소수의 집단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집단이 갈리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더하여 정부가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다수의 예술인이 적절한 국가 제도의 보호 없이 사실상 버려진 처지였음을 드러낸다. 코로나19로 인해 예술인 대다수가 ‘표현활동’뿐만 아니라 ‘생존 활동’ 양자의 터전 모두를 잃어버린 처지였다.
2022년 4월 18일, 사회적 거리두기가 2년 1개월 만에 종료되었다. 이제 많은 이들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회복과 전환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었으니 다시 예술 활동의 장이 예술작품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열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코로나 이후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대다수 예술가에게 ‘버려진 이들’로서 코로나의 상처는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있다. 만약 누군가 예술에서 회복과 전환이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버려진 이들로서 받은 예술가의 상처 난 내면의 치유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보호망이 있는 공동체
니체는 ‘위대한 예술가란 결국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했다. 『비극의 탄생』에서 밝히고 있듯 위대한 예술가는 늘 시대적 변화를 알리는 이들이었다.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위대한’이란 표현은 떼어 버리자. 핵심은 예술가에 의해 예술이 철학이 되고 철학이 예술이 된다는 데 있다. 이 말이 어렵게 들린다면, 예술가란 자신과 세상을 잘 이해하는 존재란 의미로 보면 된다. 예술가들은 이런 자신과 세계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우리 삶으로 표현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존재다.
지난 2년간 실시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런 변화의 역할을 하는 예술가들이 ‘버려진 자’로서 세상과 불화하는 경험을 만들어냈다. 그 불화의 실체가 ‘외롭게 버려진 자’라는 점은 더 심각한 문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듯 ‘외로움’ 속에 버려진 자들은 언제나 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다.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에 답을 못할 때 자아를 잃어버리고(자아상실),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답하지 못할 때 이 세계를 잃어버린다(세계상실). 지난 2년의 시간이 예술가들에게 보여준 태도는 예술가들이 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잃기에 충분했다.
누군가는 예술이 그런 불화를 드러내는 일이라 할지도 모른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는 불화와 그렇지 못한 불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소통을 만들어낸다. ‘회복과 전환’이 더 나은 상태와 세계를 말한다면 자신과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대한 의미를 회복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예술가들이 무엇보다 자신부터 돌보는 일,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는 일에서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이후의 시간을 시작했으면 한다는 부탁을 드린다. 더하여 사회적 거리두기의 경험에서 얻은, ‘자신을 돌보는 일이 공동체의 보호’와 분리될 수 없음을 기억하고 ‘보호망이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달라고 부탁드린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지배적인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각자도생의 발상이 예술에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고립되지 않는 삶, 보호가 있는 삶, 그래서 외롭지 않은 삶은 공적 세계에 발을 딛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처럼 이런 글을 쓰는 정치철학자에게도 할 일은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닥쳤을 때 우리 예술가들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프랑스의 엥테르미탕 같은) 제도를 짓는 일에 함께하는 것이다. 지난 2년간 아무런 보호망도 없이 표현과 생존의 터전을 모두 잃었던 예술가들이 너무 많았다. 여러분의 등을 어루만지며, 수고하셨다고, 정말 고생이 많으셨다고, 이제 여러분에게도 보호망이 있는 세계를 짓는 일에 함께하겠다고 말씀드린다. 이 어루만짐과 약속이 우리의 회복과 전환의 시작이었으면 한다.
- 김만권
- 땅에 발 딛고 선 철학을 하고파서 정치철학을 한다. 그러고 보니 생각으로 현실에 세상을 짓는 게 직업이다. 그래서 학교 밖에서도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늘 배우고 산다. 올해 6살이 된 아이의 아빠로, 이 아이에게 물려줄 세계에 대해 고민이 많다. 지은 책으로는 『새로운 가난이 온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호모 저스티스』 등이 있다.
mankwon@gmail.com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2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예술가 옆의 시민으로서 예술가가 회복과 전환에 응원을 보내봅니다. 몇주 전 나온 예술교육가 좌담을 보니 지난 3년 작업을 아카이빙하거나 자신(작업)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내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시간이 쌓여 이제 좀 더 큰 숨으로 시민과 주민과 다시 힘내어 만나지길 바라봅니다.
누가 보호망이 있는 세계를 지을 것인가
회복과 전환의 시작점
정말 너무나도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