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라는 사치
지금처럼 예술가에게 어려운 시대가 있었을까? 제4차 산업혁명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닥칠 것이라는, 대비하지 않으면 예술가도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위협 속에서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코로나19라는 복병이 등장하여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주문하고 있다. 관객은 스마트기기 앞에 존재하(고 있다고 여겨지)거나, 마스크로 인해 온전한 소통이 어려운 채로 객석에 앉아있다.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려면 발 빠르게 영상에 적합한 공연을 만들라고 한다. 아니면 꼭 공연장을 찾을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 영상이 대세가 될수록 공연장 공연은 더욱더 귀하게 여겨질 거라는 전망도 있지만 그게 내 공연일지는 알 수가 없다. ‘관객’은 더욱 빠르게 ‘소비자’에 흡수되고, ‘예술’은 더욱 빠르게 ‘콘텐츠’에 흡수된다. 사회의 모든 가치 기준이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가성비’가 되었다는 점은 예술가를 더욱 난감하게 한다.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토큰)를 통한 예술품의 부분소장과 투자, 차익 실현 등의 개념은 판단을 망설이는 사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예술품뿐 아니라 자신의 ‘셀카’를 NFT로 판매해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대학생의 일화도 기사로 소개된다.(“왜 구매하는지 나도 몰라”…NFT 셀카 사진으로 돈방석 앉은 인니 대학생, 서울신문 2022. 1. 19.) 예술작품을 쪼개어 소장하면 작품의 철학과 세계관도 나누어 소장되는지, 아니면 그것은 나눠지지 않고 온전히 나에게 오는지, 애초에 그런 것은 상관없고 상품으로써의 가치만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는 동안 자본의 흐름은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이제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인 주체가 ‘상품’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사고판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의 본질 따위를 묻는 일은 오히려 사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 사치는 집어치우고 이 흐름에 몸을 맡겨보자.
초연결 시대의 예술 체험
변화된 세상에서는 예술에도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없다고 한다. 양방향 소통이 중요하고 누구나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초연결’ 개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단다. 초연결이란 정보 기술을 통해 물리적 거리나 사회적 고립을 초월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촘촘하게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정리하다 보니 묘한 기시감이 든다. 모두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상황,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의 연결을 생각하는 자리. 바로 우리의 ‘풍류’가 아니던가!
오늘날 ‘풍류’의 사전적 정의는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또는 ‘전통음악의 한 갈래’를 가리키는 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풍류’라는 말은 <삼국사기>의 화랑도와 관련한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며 산수를 찾아 심신을 단련하는 화랑의 수양 방법은 고대의 제천의식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풍류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우리의 문화로,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다양한 사상을 융합하여 더 넓은 세계관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해나가는 문화적, 예술적 체험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풍류는 기본적으로 ‘놀이’이다. 조선 시대에는 풍류 문화가 보다 대중화되었는데 시(詩), 서(書), 화(畵), 금(琴), 주(酒) 등을 한자리에서 즐기고 작품을 공유하면서 서로 예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여기에서는 예술가와 관객이 구분되지 않는다. 참여자가 전문예술가일 필요도 없다. 오늘날 갖가지 미디어 도구와 SNS를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유통하며 ‘재미’를 통해 서로 공감하는 시민의 모습과 같다. 그러면 우리의 풍류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놀았을까?
풍류 모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를 짓는 ‘시회(詩會)’가 있다. 매화를 사랑했던 율곡 이이의 시회에서는 시를 짓는 행위 자체보다도 ‘매화 피는 소리’를 함께 듣는 것에 의미를 두기도 했다고 한다. 매화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자연의 흐름과 인간을 생각하는 시간을 즐긴 것이다. 시회나 풍류회와 같은 모임을 통하지 않고 혼자서 풍류를 즐길 수도 있는데, 이때 선비들은 주로 거문고를 타거나 혹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사유의 시간을 즐겼다. 거문고 소리가 잦아든 이후의 여백과 빈 공간을 통해, 들리지 않는 소리의 움직임을 상상하고 이를 우주의 에너지와 연결하거나, 세속적인 욕심을 내려놓는 삶의 지향을 상기하고자 했다. 시를 짓고, 글을 쓰며,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가운데 생산자와 소비자, 예술가와 관객이 구분되지 않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예술의 의미와 철학을 삶 안에서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간 것이다.
풍류로 만드는 예술적 삶
오늘의 시민은 예술을 어떻게 가지고 놀 수 있을까?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의 풍류 문화가 가지고 있는 방법이 오늘날 변화된 사회의 요구와 흐름에 맞닿아 있다면 이를 통해 다시 예술의 본질과 역할을 소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콘텐츠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등장한 시민에게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예술적 도구, 예술의 방법, 예술의 철학을 든든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예술가가, 예술교육자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은 작품 그 자체가 아니고 예술의 역할은 위안이나 즐거움의 제공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예술로써 인간과 자연, 사물과 세계를 사유하며 그것을 통해 삶의 태도를 규정 짓게 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과 역할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예술은 사치가 아니라 다시 삶이 되지 않을까?
대선(大選)이 코앞이다. 급변하는 세상은 예술과 예술가에게도 변화를 요구하는데 유독 정치권에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들만의 세상은 여전히 굳건하고 누가 되든 똑같다는 자조도 만연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은 예술이 정치에 좌지우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가올 세상에서는 예술이 정치의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 건축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여 ‘예술을 건축했다’고 일컬어지는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Isadore Kahn)은 “예술의 창조는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더욱 이상을 욕망할 것이다. 풍류의 방법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조율하고, 예술의 철학 아래서 합의해 갈 것이다. 변화의 변곡점에서 예술이 극장과 미술관에만 고고하게 존재하기보다 풍류의 방법으로 시민과 함께한다면 ‘돈’을 향해 흘러가는 물길을 ‘삶’을 향하도록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다음 대선에서도 예술로 사유하는, 풍류로 살아가는 후보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역시 상관없다. 풍류는 제왕적 지휘자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각자가 서로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본인의 개성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시나위’이기 때문이다.
김준영
김준영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거문고주자로 활동하면서 예술창작그룹 거인아트랩의 대표를 맡고 있다. 예술과 삶, 예술과 사회, 전통의 현재적 가치 등에 관심을 갖고 이를 다양한 방법으로 펼쳐 보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유튜브 김준영 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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