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게 모여 만드는 따뜻한 결속

책으로 읽는 문화예술교육

『문화와 예술 마을을 만나다』는 마을에서 새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 봐야 할 좋은 지침서이자 따라 걷고 싶은 든든한 선배 같은 책이다. 이들이 어떻게 모여 무슨 일을 만들고 이뤄내는지 들여다보고 있으면 ‘공탁’이라는 드라마 한 편이 재생된다.
  • 『문화와 예술, 마을을 만나다』
    (공유성북원탁회의, 민들레, 2020)
서로의 어미새가 되어
서울시 성북구에서 지속가능한 지역문화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공유성북원탁회의(이하 공탁)’는 2012년 준비모임을 시작으로 2014년 자율적인 모임으로 공식화해 현재 3백여 명이 함께하는 지역 내 대표적인 민·민, 민·관 협치형 커뮤니티다. 공탁은 ‘동네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망으로부터 시작됐다. 처음엔 평소 알고 지내던 가까운 동네 사람을 만나 관심사를 나누는 정도였으나 이에 머무르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을 향해 뻗어 나갔다. 지인들을 적극 마을로 초대하고, 부동산에 집을 알아봐 주고, 일자리까지 마련하는 등 서로의 어미새가 되어주면서 전에 없던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한다.
공탁에서 함께한 ‘지니야, 브라질, 로마노, 봉봉, 희왕, 곰살구, 제이, 만평, 하마귀’ 등 9명의 저자는 저마다 마을에서 겪은 시행착오와 노력의 과정을 진솔하게 풀어낸다. 읽고 있으면 마치 마을의 일원이 되어 함께하는 듯 그림이 그려지면서, 내가 발 딛고 있는 선미촌이 떠올라 멈칫하는 순간도 있었다. 성매매 집결지였던 전주 선미촌은 많은 이들의 오랜 노력으로 대체할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이웃은 없는지 소통과 협치 과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돌아보면 아직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사례이자 시원한 환기가 되어주었다. 특히 하마귀(하장호)가 쓴 <쓰레기장과 문화예술공간의 만남>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왜 이상한 곳에서 장터를 여냐?”
지하 소굴 전화기 너머 이름 모를 주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힌다. ‘이상한 곳’은 미아리 고개 고가도로 아래 재활용 쓰레기 수거 공간을 활용한 문화공간 ‘미인도(彌人道)’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라는 뜻이지만, 얼핏 술집 이라는 오해를 받기 일쑤다. ‘예술이 지역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미인도는 민간이 주도하되 공공의 가치와 지역적 정체성을 담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공식화했다. 프로그램 개발이나 공간 정체성의 열쇠를 쥐는 사업은 워킹그룹에서 맡고 관리와 운영은 기관에서 담당하는 ‘공동 운영 방식’을 꾀한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곳에서 불만이 터졌다. 미인도로 바뀐 이 공간은 원래 청소도구를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미인도가 생긴 후로는 청소노동자들이 청소 장비와 도구를 100미터 이상 떨어진 창고로 매번 옮겨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그날 이후 청소노동자들과 적극적인 공생을 생각한 그들은 벤치 겸 사물함을 설치해 청소도구를 미인도 앞에 보관할 수 있도록 했고, 다과를 준비하는 날이면 청소노동자분들의 음료수도 따로 챙겨드렸단다. 그랬더니 행사 날이면 늘 쌓여 있던 재활용 쓰레기가 말끔히 치워져 있는 게 아닌가. “행사 있는 날엔 작업 시간을 늦출 테니 미리 귀띔해 달라”라는 청소 반장님의 말.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는 마음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수고와 불편함조차 살피지 못한 채 우리만의 그림을 그리면서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편함을 덜어내고, 지저분한 것을 감추고, 나와 다른 이들을 외면하는 마을에서의 삶과 활동이란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부끄러운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주민이 만드는 문화예술
제이(이종찬)가 쓴 마지막 챕터도 인상 깊다.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에서 ‘누구나’의 문화예술로>라는 글에서 ‘주민(으로서의) 예술가’의 존재에 관해 고민하는 부분으로, ‘해당 지역에 직접 거주하는 주민이거나 또는 적어도 그 지역을 자신의 활동과 생활의 주된 기반을 삼고 있는 이들’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이 골자다.
“공간이 없으면 정신이 담기지 않아요.”
월장석친구들 봉봉(유영봉)의 말은 ‘특색 없이 방치되어 있던 공간을 예술가들이 여러 차례 숙의과정을 거쳐 지역 극장으로 재탄생시킨’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제이는 주민 예술가 모델이 현실적으로 잘 작동되지 않고 있는 경우를 꼬집으며 ‘지역 연계 문화예술사업이 소위 지역 활성화를 위해 예술가를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공탁의 구성원들은 이 같은 위험성을 무게감 있게 인지하고, 무엇보다 예술가들의 안정적인 창작 환경 및 토대 마련이 곧 지역 문화의 활성화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라는 전향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공탁의 견지와 더불어 지역 문화재단의 성찰에도 공감이 간다. 제이는 재단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도중에 그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들은 말을 돌아본다. “담당자인 내가 지역의 문화예술가들을 이용하거나, 심한 경우 부지불식간에 착취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역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문화예술 생산물의 성과를 재단이 가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재단의 권한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직원들의 상당한 수준의 윤리의식을 되짚어보는 필자는 “지금의 재단 사람들이 과거 한때 민간 영역에서 활동했던 이들이기도 하다는 점”을 “느슨한 근거”로 꼽는다. 그가 노트에 급하게 옮겨 적었다는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순간적인 메모가 가리키는 방향은 뭘까.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자리에서 지역의 다양한 문화예술 주체들을 매개하고 자신들은 기꺼이 무대 뒤로 사라지는 이들. 사라지는 매개자, 곱씹을수록 그들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싶다.”
되짚어보면 보이는 것들
이 책을 덮으며 내가 서 있는 다양한 생태계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되었다. 앞으로의 동네, 지역 문화예술계 모습, 3주년을 앞둔 책방, 함께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이질적인 존재들의 따뜻한 결속을 보여준 ‘공탁’의 탄생 과정과 좌충우돌 이야기를 세밀하게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관 주도의 마을 살리기가 아닌 주민들의 자발적인 추동력과 관의 정책이 호흡을 맞춘 민관 협치의 드문 본보기를 ‘공탁’이 보여준 것이다. ‘도시 속 마을 민주주의를 위한 낯선 실험’이라는 이 책의 부제에 덧붙이고 싶은 말은 ‘답은 없지만, 이야기는 있다는 마음으로’이다. 좋아하는 것을 향해 몸과 마음을 직행하는 힘,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들처럼 둥글게 모여야 한다.
어떤 일은 되돌아 짚어볼 때 의미가 따라오곤 한다. 막상 일할 땐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한눈에 펼쳐지곤 한다. 책방에서 가을에 어울릴 시집을 고르다 신용목 시가 눈에 들어왔다. 골목 생각이 났다. 뜬금없는 조합일지 모르지만 뜨거운 기록을 담은 책과 차가운 시집을 번갈아 눈에 담았다.
(…전략…)
모든 의미가 뒤늦게 따라오는 것처럼
어떤 이유도 되돌아 짚어보면 되니까
(…후략…)
– 신용목, 『나비(Tatto)』 중
임주아
임주아
시인, 물결서사 대표. 201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전주 선미촌에서 창작자 동료들과 예술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고 있다.
zooalim@naver.com
이미지 제공_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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