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렉티브 뒹굴(이하 ‘뒹굴’)을 처음 만난 곳은 화성이었다. 지구 밖, 화성. 2019년 뒹굴은 화성 탐사 로버에 관한 공연을 했다. 작품은 연극축제 ‘화학작용 4:오프-스테이지 편’에서 진행된 워크숍 공연 〈화성 탐사선, 오퍼튜니티〉에서 출발하여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19 참가작 〈오퍼튜니티〉로, 또 인사미술공간 “막간극” 〈오퍼튜니티: →→ort→→〉로 나아갔다. 로버들은 멸종에 처한 지구를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희망을 개척하는 의무를 맡고 있다. 앞서 화성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임무를 이어갔던 스피릿과 오퍼튜니티를 떠올리며 로버가 된 인간들은 뒤늦게 화성에 도착한다. 무의미한 동작의 반복과 끝을 알 수 없는 그들의 임무 사이에서 인간이 지금껏 쌓아온 신자유주의의 가치들은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반복되는 신체의 움직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고, 그렇게 ‘뒹굴리안’들은 미세하지만 새로운 대화의 영역을 열어가는 일을 하고 있다, 뒹굴거리면서.
‘ㄱㅎ ㅈㅇ’ 창작집단
그리고 2021년 봄, 지구에서, 그것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뒹굴의 성지수 대표를 만났다. 창문 밖으로 바로 큰 도로가 이어져 있어 쉭쉭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가득하다. ‘화성’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지구로 돌아온 뒹굴은 2020년 세계 환경의 날을 맞이하여 기후 정의(Climate Justice) 창작집단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노동자성(姓)조차 인정받지 못한 도시 빈민이었을 때조차 예술을 무기로 사회의 부조리와 싸워 온 우리는 가만히 주저앉아 기후난민이 되는 길을 택하기보다 생태적이며 정의로운 사회 전환을 위하여 예술의 생태적-공적 가치와 정의로운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예술적 발화를 이어갈 것이다.”
– 뒹굴의 ‘기후 정의 창작집단 선언’(2020.06.05.) 중에서 발췌
2012년 7월 ‘뒹굴의 약속’을 만든 지 8년이 조금 안 되는 시점이었다. ‘뒹굴의 약속’은 2018년 4월 다시 ‘작업 수칙’이라는 이름으로, 또 2019년 2월 ‘자치규약’이라는 이름으로 개정되었다(2019.03.31. 3차 개정). “공연보다 자치규약이 유명한 팀”이라고 뒹굴리안들이 먼저 이야기할 정도로 이 자치규약은 공연예술계에 잘 알려져 있다. 규약에는 지속가능한 예술 활동과 미적 가치 추구를 위한 작업자의 권리와 운영 방식 등이 세심히 적혀 있다. 뒹굴의 자치규약이 여기저기 알려진 덕분에 누군가의 작업 현장은 조금 더 안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간혹 누군가는 뒹굴을 딱딱한 ‘윤리주의자’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이제는 ‘환경운동가’ 아니냐는 오해까지 얻었다.
뒹굴은 조금 억울하다. 뒹굴은 자신들을 ‘예술지상주의자’라고 칭한다. 이것이 정말 오해라는 것은 기후 정의 창작집단 선언문 원본과 이에 잇따른 뒹굴의 ‘8돐 기념’(영상보기) 행사를 확인하면 알 수 있다. 보란 듯이 ‘궁서체’로 쓰인 선언문, 그리고 영상을 통해 함께 공개된 ‘ㄱㅎ ㅈㅇ’의 의미 또한 모두가 그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걸 알게 되면 뿅망치로 얻어맞은 듯 싱거운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기후위기’라는 무거운 짐을 마주하며 뒹굴은 또 그렇게 힘을 빼는 법을 찾는다. 수많은 모순을 깨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대화의 시도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뒹굴의 태도는 기존의 자본주의 구조가 요구하던 경쟁과 성장, 착취와 투쟁 중심의 흐름에서 다른 감각을 자극한다.


  • 〈오퍼튜니티: →→ort→→〉(2019, 인사미술공간)
‘찢어짐’을 감각하기
뒹굴이 기후위기를 확실히 인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018년. 그때는 “공연으로 화를 낼” 정신과 에너지가 있었다고 성지수 대표는 회고한다. 그러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사랑하는 존재들의 아픔과 죽음을 경험하며 그것마저 쉽지 않아졌다고 한다. 그때 뒹굴은 비로소 기후위기가 ‘내 안에 있는 서울의 도시성’에서 왔음을 깨달았다. 너무 빠르고,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고, 공공의 영역에서조차 경쟁을 부르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이 도시는 너무도 당연하게 기후위기를 맞이했다. 이것은 기후위기가 단순히 ‘날씨를 예측할 수 없어지는 상황’이 아니라 ‘약자부터 죽어가는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는 팬데믹 속의 지금, 서울 사람들이었던 뒹굴은 ‘탈서울’을 시작했다. 서울 토박이들이 연고도 없이 새로운 도시에 적응하기 쉽지 않을 터인데 성지수 대표는 “깨지는 과정에서 치유가 있겠다”라고 전망한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뒤집어 보고, 어딘가로 나아가는 대신 그냥 머물러 보고, 무의미한 듯 보이는 일을 반복해 보기도 하고, 그런 과정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화성에 도착한 로버처럼.
‘탈주’와 더불어 뒹굴은 신자유주의와 소비주의 속에서, 또 페미니즘의 연결 안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 고민은 자신 안에 끓어오르는 혐오와 미움, 또 그 외 다양한 감각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후위기 앞에서 모순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는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고깃집 간판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돼지는 실제로는 몸을 돌릴 수도 없는 공장식 축산 농가의 좁은 스톨(금속제 틀)에서 채 1년도 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40분을 기다려 버스를 탈 것인지, 자가용을 몰고 빠르게 움직일 것인지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것을 뒹굴은 우리 안의 모순들로 인해 우리가 ‘찢어진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뒹굴은 이 ‘찢어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경험을 마주하며 감각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이러한 감각을 자조와 함께 공유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뒹굴이 지금 전하고자 하는 감각은 ‘돌봄’의 감각이다. 뒹굴리안들은 예술은 돌봄이라고,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경험하고 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문화예술 환경이 얼마나 착취적이었는지 질문을 던져 본다. 우리를 돌보아준 이들 없이 예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비인간’도 존재한다. 우리가 자연을 착취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고 과연 예술을 상상할 수 있을까? 『파란하늘 빨간지구』의 저자 조천호 박사는 “우리 모두는 자연의 일부이며 공동체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경향신문], 2021.4.18.)라고 말했다. 올해 지구의 날 발표된 여성환경연대의 에코페미니즘 선언문에서도 돌봄과 공공성을 강조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돌봄의 정치’를 만들기 위해 행동하고 실천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즉 기후위기에 이어 팬데믹까지 이 모든 결과가 인간이 서로를, 또 비인간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착취를 일삼았기 때문임을 시사하는 바이다.
  • 기후위기 세미나
  • 기후위기 세미나 약속문
위기 시대의 청년 예술가
돌봄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뒹굴의 질문들은 단순한 작업의 소재를 넘어서서 예술가의 삶과 노동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특히나 뒹굴은 ‘청년’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동료 예술가들의 목소리에도 주목해 왔다. 지난해에는 ‘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처 펠로우십(AYARF)’에도 참여했으며, 전국 청년 연극인들을 만나는 자리에도 뒹굴이 있었다. 코로나로 바뀐 일상 속에서 청년들을 위한 많은 지원 기반은 이전보다 더욱 흔들렸다. 뒹굴이 일하던 공간인 ‘청년청’도 팬데믹으로 인해 문을 닫고 말았다. 닫힌 문은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공적 영역에 의지하고 있던 수많은 청년 예술가들은 떠밀려 나갈 뿐이다. 지난 가을로 2회째를 맞은 뒹굴의 ‘기후위기 세미나’ 또한 같은 위기에 처했다.
‘기후위기 세미나’는 기후위기 시대에서 예술가의 역할과 생존, 작업을 논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그 시작은 기후변화의 원인과 결과를 이야기하는 조천호 박사의 도입 강연이었다. 10명 정도의 참여자로 시작한 1기를 지나 2기에는 약 40명의 예술인이 함께하였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2기에는 기후위기를 어떻게 언어화하고 예술작업으로 연결할 것인가에 관해 좀 더 초점이 맞춰졌다. 인류를 둘러싼 생태계의 생존을 논하는 거대한 담론 앞에서 같은 일을 해나가는 동료의 강연은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기후 우울(climate depression)’에 관한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우울 속에서 뒹굴의 세미나는 예술가들이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의 장 역할을 해냈다. 이러한 만남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공공적 차원의 지원이 중요하다. 뒹굴은 지금까지의 세미나 자료와 전국 청년 연극인들의 이야기를 모아 여기저기 지원사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직 다음 세미나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한편 최근 많은 지원사업이 ‘기후’라는 키워드를 달고 나타났다. 창작 지원사업에서도, 또 예술교육 관련 사업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성지수 대표의 경험에 의하면 문화예술계 밖에서도 여러 기후위기 전문가들이 문제 해결을 위한 예술인의 참여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들은 예술인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그린뉴딜’을 홍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기후위기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기회에 마냥 반가워할 수 없다. 예술은 기후위기 속에서 공공기관이나 정부, 더 나아가 사회와 어떤 관계 맺음을 해나갈 것인가 능동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성지수 대표는 이처럼 세금이 들어가는 큰 작업에서 기후와 관련된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 기획 의도와 목적이 공개되고 이에 적합하게 방법론이 작동하고 있는지, 과정 내에 시민 모니터링이 있는지, 사업 자체에서 탄소 중립을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등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후위기가 사업이나 작업의 소재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작업의 방식 안에서 밀접하게 고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3〉 포스터
  • 연극의 무덤 앞, 예술가들의 배회
다시 잘 만나기 위해
2020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서 뒹굴은 2050년의 이야기를 했다. 바로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3〉라는 작품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공간은 “기후위기와 팬데믹 파시즘 때문에 사망한 ‘연극’의 무덤 앞”이다. 연막 속에서 그들은 이전과는 같은 방식으로 예술을 할 수 없음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의 뒹굴은 착취하지 않는, 돌보는 예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찢어짐’ 또한 감각하면서. 뒹굴은 새로운 방법론이 필요해졌다고 했다.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타자를 착취하지 않는 작업, 그리고 기후위기 속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위한 언어를 찾기 위함이다.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전환을 위해 단순히 작업 내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뒹굴은 ‘삶을 전환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서울을 벗어난 뒹굴은 “각자와 그 각자를 둘러싸고 있는 서로에 대한 관심” 속에서 여전히 뒹굴거릴 것이다. 그리고 그 ‘별 것 아닌’ 뒹굴거림 속에 기후위기를 함께 살아낼 힘이 있다.
이혜원
이혜원
다국적 공연예술컴퍼니 블루밍루더스의 공동예술감독으로 놀이와 오브제, 움직임을 통해 연극을 만들며 지구의 다양한 울림, 만남의 감각을 전하고자 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벨벳토끼>, 멧돼지들을 위한 <바위가 되는 법>, 여성들을 위한 <남의 연애>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요즘에는 기후위기 속에 태어난 아기들을 위한 소리극 <환영해>를 만들고 있다.
www.bloomingludus.com
영상_박영균 영상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제공_콜렉티브 뒹굴 www.facebook.com/doingle.ar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