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문정희는 <한계령을 위한 연가>라는 시에서 ‘못 잊을 이와 한계령을 넘다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고, ‘갇혀있다가 헬리콥터가 나타나도 결코 손을 흔들지 않겠다’며 ‘오오, 눈부신 고립’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현실에서 고립은 눈부시기보다는 눈물겨운 쪽에 가깝다. 박유미 미술작가는 유학 시절 처음 느낀 고립감을 소수자로서의 자각으로, 배제된 자와의 협업 욕구로 고양시켰다. 그리고 고립감을 힘으로 살아온 인천 강화군 아차도의 여성 노인들을 만나 서로의 시선을 포개고 연대하는 경험 속에서 또다시 전환을 맞이했고, 삶과 작업 모두에서 또 한 번 도약했다. 인천, 홍성 등 여러 지역에서 10여 년간 노년, 신중년을 만나며 얻은 통찰은 비단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예술적 교육적 활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지역에서 노년 여성들과 작업을 해오셨다. 왜 ‘노년 여성’인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혼자 작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 미디어아트를 배우기 위해 독일에 갔다. 정체는 불확실했지만 욕망은 분명했는데, 막상 그곳에서의 공부는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새로운 언어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근본적으로 모든 걸 다시 보게 했다. 미디어도 테크닉보다는 본질을, 어떤 대상을 표현한다고 할 때도 어떤 사물이냐 보다는 의미를 묻는 식이었다. 결과물을 잘 만드는 것보다는 어떤 생각으로 임하느냐가 중요해졌고, 내가 생산하는 작업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지, 내 말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언어, 보고 듣는 것과 관계하는 것들이 특정 세대, 지역, 성별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사회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을 계속 만나왔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뭘 하는지 잘 몰랐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처음 자각하게 되었다.
유학 시절, 외지인으로 살다 보면 환영받을 일도 별로 없고, 작은 친절이나 자연스러운 호의도 바라기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나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의외로 많겠구나’ 자각하니 길거리나 테라스에 홀로 나와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디를 가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편이니까. 대부분 혼자 시간을 보내는 나와 독거노인이라 불리는 사람과의 차이가 뭔지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내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이 시기부터 사회에서 별로 관심 두지 않고 이슈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문화재단 기획 공모사업에 여러 작가와 함께 참여할 기회가 생겼고, 답사 중 우연히 발견한 ‘아차도’를 선택하게 되었다. 비무장지대의 작은 섬에, 주민도 적은 데다 1인 가구 노년 여성이 많았다. 마침 관심 두던 환경에 둘러싸이게 된 것이다. 이 활동을 시작으로 새로운 노년 여성의 이미지와 언어를 생산하는 작업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유학 시절 겪은 정체성의 변화를 통해 노년 세대에 동질감을 느꼈고, 이 관심을 구체화한 첫 시도가 인천 <아차도 프로젝트>로 보인다. 이 작업은 2012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아차도 주민과는 작가와 (수동적인) 참여자로서가 아닌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 시작은 작가 6명과 함께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마을에서 먹고 자고 일손도 거들면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거였다. 하루에 배가 두 번밖에 들어오지 않는 작은 동네에는 슈퍼마켓도 없고, 동그란 마을이 한눈에 다 보인다. 외부인의 섬 방문이 드물뿐더러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삶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니 처음엔 주민들이 손사래를 쳤다. 자기는 할 말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5분이면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대체 무엇을 한다는 것인지, 미술을 한다는데 그림은 안 그리고 얘기나 듣자 하니 ‘수상하다’ ‘간첩 아니냐’는 농담만은 아닌 농담을 몇 년 동안 하셨다.
당연하지만, 처음에 이분들은 예술을 자신과 상관없는 별개의 것으로 여겼다. 그걸 허무는 작업으로 함께 밥 먹고, 이야기 듣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금세 쌓여 있던 이야기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귀찮다, 시간 없고 바쁘다, 하면서도 우리 집엔 왜 빨리 안 오는지 기다리고, 자식한테도 하지 않은 비밀 얘기도 털어놓으셨다. 진심으로 경청해서 들은 결과다. 감사하기도 하면서 책임감이 느껴지고 또 한편으로는 행동과 말이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복잡한 상태가 되었다.
첫해를 그렇게 보내고 이듬해에는 반년간 매주 2~3일 이상 만나며 모여서 대화를 하고 뭔가를 만들거나 게릴라성 퍼포먼스도 하면서 조금씩 활동의 폭을 넓혔다. 아차도에 머무는 동안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하루가 시작되는 마을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걸 유심히 지켜보신 한 분이, 작가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마음이 움직였다고 하셨다. 두 해가 지나고 관계가 깊어지면서 어떤 분들과는 서로의 삶을 건드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팀 프로젝트가 끝나고 독립적으로 이분들이 주체가 되는 사진 모임을 만들어 촬영과 비평을 틈틈이 하면서 그분들의 첫 창작물로 전시도 열었다.
이분들에게 예술에 대한 거창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대신 “대체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물어오면 조금씩 알려드렸는데, 궁극에는 “아 그런 것도 예술이 되는구나”라는 말이 그분들 입에서 나왔다. 예술에 관하여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걸 처음 확인하는 흥분된 순간이었다. 작가인 내가 나서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최대한 수동적인 존재로 두고 흐름에 맡기는 것을 새로운 도전이자 실험으로 삼았다. 프로젝트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아차도 프로젝트>는 내 삶의 전환점이 되는 경험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분들이 창작자이자 생산자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노년들 이야기는 들을 기회가 적고 정형화되어 있다. 그 이미지를 깨고 싶었고, 개별적인 서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주제가 더 뾰족해졌다.
노인 여성 일반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 놓인 분들을 만나셨다. 작은 섬에 사는 노년의 여성은 어떤 분들이었나.
도시에서만 살아서 섬의 공동체 생활이 조심스럽고 낯설어 실수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아차도 주민들은 무례한 농담이나 과한 호기심 없이 나를 존중해주셨다. 우아하면서 솔직한 태도가 매력적이었다. 한편 배우지 못함에 사무치는 한이 있었다. 고립되기 쉬운 환경에서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도 컸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의 특성상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힘들고 무슨 일이든 다 같이 하거나 다 같이 안 하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다. 특히 90대가 되어도 몸이 허락하면 밤낮으로 일한다. 물때에 맞춰 바다에 나가느라 잠도 줄이면서 일 중독에 가깝게 사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자신이 생계를 책임지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에 활력이 넘치고 당당하다. 오히려 제가 그 기운을 못 따라갈 지경이다. 이제는 일을 쉬거나, 하지 못하실 때 그림을 그리는 분들도 생겼다. 놀라운 변화다. 아차도 분들을 만나고 있으면 자연과 함께하는 삶과 노동을 통해 삶의 이치를 터득한 분들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눈이 탁 트여서 그런지 아주 세밀한 것도 잘 보신다. 감각이 발달한 거다. 그래서 그림이나 사진, 글로 포착한 것들을 보면 작가로서 자극이 된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수용도 더욱 자연스러웠을까? 도시에 사는 분들과 비교되는 면도 있나?
도시에서는 주로 50~60대 초반 신중년과 작업했고 나이 외에도 경제적 환경 등의 개인에 따른 편차가 크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힘들다. 다만 제 경험 안에서 어떤 경향성은 느꼈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도시 분들은 확실히 예술에 대한 호의나 예술 활동 참여 의사는 매우 높았지만, 자꾸 학습과 평가의 틀로 접근하는 분들이 있었다. 이게 그럴듯한 그림이 될까 하는 조바심이 느껴졌다. 잘 그려진 그림에 대한 나름의 명확한 기준을 고집하는 분도 있었다. 반면에 작업을 촬영해서 지인과 가족에게 보내주는 등 작품에 대한 애착이 컸다.
도시 분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셨던 반면에, 농어촌 지역 분들은 일일이 관계를 맺으면서 오시라고 난리를 쳐야 할까 말까 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면 집중도나 관심도는 매우 높고 진지했다. 시작하기 전엔 팔자 늘어지게 그런 걸 하고 있냐고 역정을 내기도 하셨다. 방문판매원처럼 오랜 기간 ‘밀당’을 하다가 결국 “난 정말 하기 싫은데 저 작가가 안쓰러워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며 참여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누가 봐도 창작의 기쁨에 빠진 행복한 모습으로 몇 시간씩 꼼짝 않고 그림을 그리시곤 하셨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때쯤 “이렇게 잘하실 거면서 왜 그동안 그렇게 싫다고 하셨냐”고 물으니, “더 잘하고 싶은데 못해서 그렇지”라고 대답하셨다. 그 말이 너무 멋있었다. 더 잘하고 싶은데 성에 차지 않아서 화가 나셨었구나, 들끓는 욕망이 당연히 있었구나, 나이나 어디서 사는지와는 상관이 없구나, 그런 것에 감동했다.
이런 집중도는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나?
공동체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고유성, 개별성이다. 공동의 경향성은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각자가 다 너무 다르다. 내 예상은 늘 빗나가고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너무 어렵고 또 그래서 계속하게 된다. 결국 개별 서사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각자의 상황, 건강 상태, 주변 관계, 기질 등이 다 반영되는 거다. 함께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분은 후다닥 10분 만에 하고 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집에 돌아가신 후에도 깊이 몰입해서 하루 이틀 만에 이만큼 그려오시기도 한다. 이제는 다름의 결을 보여드리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공동체 미술을 하는 것도 제 고유성을 인정받고 싶어서다. 관계 안에 내가 있는 거지, 고립된 개인으로 있을 수 없다. 그러려면 공동체 안에서 해법을 모색해야 하잖나. 모두가 한데 모여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몰입을 통해 자신을 만나게 된다. 저도 전환을 맞고 있고, 지금은 개별자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크다. 그 결을 섬세하게 접근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별자에 대한 집중, 격하게 공감한다.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오히려 점점 더 소외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개인성이야말로 예술의 생명 아닌가. 뭉뚱그려진 개인, 공통으로 묶여 있는 개인들 속에서 고유한 개인을 빼내는 작업이 예술교육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예술가나 예술강사가 그것을 어떻게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 꼭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놓치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분은 수채화가 너무 잘 맞고, 처음 접하는 재료의 물성을 다 이해하는 천재 같은 분도 있다. 또 어떤 분은 언어가 발달해 시적 표현이 풍부하다. 즉흥으로 춤을 추는 분도 있다. 예술가나 예술강사는 참여자 각자에게 맞는 표현 방법이나 매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제안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참여자나 공동체와 분리하지 않고 자신을 개인화 작업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정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이러한 활동과 작업을 통해서 ‘나’라는 개인을 더욱 섬세하고 정교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작업에 참여하는 주민-시민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하나, 혹은 그런 것을 마주한 경험이 있는가?
<아차도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민분들을 기자와 함께 형식을 갖추어 인터뷰한 적이 있다. 평소에 저랑 허물없이 말할 때와는 달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고 자기의 깨달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분들의 성장과 통찰에 새삼 놀랐다. 그중 80대 후반의 한 분은 아들과 차를 타고 가다가 차를 세우고 길가에 심어진 나무를 한참 보고, 집에 돌아와서 그 나무를 그렸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목적지를 가다가 차를 세워 나무를 한참 들여다보는 일은 전에 없는 일이었다. 만날 보던 풍경을 나의 시선으로 다시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엄청났던 거다. 몰입하게 되고 편안해지고, 예술이 삶에 들어올 때 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구나, 다들 그렇게 얘기했다. 자신이 이제 곧 쓸모없어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알게 되었다고, 성장을 계속하는 것에 대한 성취감을 자기식대로 표현했다.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을 수년째 하는 한 기획자가 “참여 시민의 인식 변화나 전환을 목적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계몽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활동의 목적이자 방향으로 ‘전환’을 설정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
기획자가 자신을 인식 전환의 주체로 삼고 참여자를 대상으로 보았을 때는 계몽적이고 폭력적이 된다. 뭘 해볼까 하는 자기 욕망이 있는 분들과 만났을 때 ‘서로’에게 전환이 일어나는 것 같다. 저라는 작은 계기를 통해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제가 일방적으로 그분의 전환에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참여자가 가진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감각에 압도될 때가 있다. 그분과 내가 동등한 작가로서 협업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그걸 실현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하지만 그분에게 나의 욕망을 투영하기보다는 그분의 말과 태도, 작업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교감을 이어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둘의 관계는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 달라져 있다. 상호 자극과 반응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전환이 가능해진다. 전환은 욕망을 일깨우는 것이고, 확실히 일대일 관계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현장에서 명확해졌다.
앞에서 아차도 어르신들의 ‘일 중독’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일 중독은 도시의 화이트칼라 전문직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섬에 사는 노년 여성과 호응하니 의외이고 신선하다. <어부 프로젝트>를 구상한다고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과 함께 말씀해달라.
내 작업에서 ‘일’은 중요한 키워드다. 어릴 적부터 쉬지 않고 일했던 노년 여성의 일은 대체로 ‘집안일’으로 뭉뚱그려지고 ‘바깥양반’의 노동만 의미 있게 다뤄진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는 노년 여성들조차 종종 자신을 ‘주부’로 정체화한다. 노년 여성 중 전문적으로 특화된 일을 수십 년간 해오신 분들도 많다.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조명도 기록도 안 되고 있다. <어부 프로젝트>는 아차도 여성 어부의 일과 생활을 조명한다.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뱃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차도 노년 여성이 자기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주목하고, 그분들의 노동사를 자신의 창작 언어로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다. 그분들의 그림, 텍스트, 사진 등 각자 고유한 매체로 담긴 작업을 엮으면서, 저만의 고유한 작품을 만들 계획이다.
박유미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조교수. 서울과 독일에서 서양화와 미디어아트를 전공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상과 장면을 일련의 사진과 비디오로 담는 작업을 시작으로 현대 사회와 문화에서 드러나는 개인과 집단의 의식을 드로잉 설치 작업과 퍼포먼스로 선보였다. 2012년 <아차도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경계, 지역성, 여성주의에 주목하여 개인 및 단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 외에도 각 지역의 문화재단이 주최하는 다수의 문화예술교육 사업에 참여했으며, 2020년부터 인천문화재단 노년 문화예술교육 사업의 연구·기획을 맡고 있다.
- 백현주
- 교육기획 및 연구자. 미술과 디자인 관련 잡지와 책을 만들며 성인초기를 보냈다. 퇴사와 함께 40대 초반에 전환기 통증을 심하게 앓았고, 그 덕에 사람 꼴을 갖췄다. 예술과 교육 관련 연구와 프로젝트에 계속 참여해왔으며 최근까지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일하다 자유인이 되었다. 2018년부터 아르떼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추진단에 함께 하고 있다.
사진_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프로그램 사진_박유미 미술작가
프로그램 사진_박유미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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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일어나는 ‘눈부신’ 전환
박유미 미술작가
정말 너무나도 기대만점입니다
서로에게 일어나는 ‘눈부신’ 전환
박유미 미술작가
정말 너무나도 잘 보고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