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80세가 넘는 장수는 이제 아주 흔한 현상이 되었고, 환갑은 잔치를 벌이기도 머쓱한 정도의 일이 되고 말았다. 장수가 꼭 축복만은 아니다. 일하고 돈 벌 수 없는 나이의 경제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 눈이나 무릎처럼 보다 일찍 망가지기 쉬운 장기들로 인해 건강이 파괴되는 사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친구들이 먼저 죽어갈 때의 고독은? 그런데 그중에서 사람들이 잘 지적하지 않는 치명적인 문제 하나가 있다. 바로 ‘내러티브의 부재’이다.
다른 동물들과는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거니와,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않으면 살아갈 동기를 얻지 못하고, 동기가 없으면 일상적인 활동조차 하지 못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의미를 담은 것이 바로 ‘내러티브’ 즉 이야기이다. 모든 종교와 신화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다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다시) 발견하고 (다시)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지탱해 줄 이야기를 찾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신화, 종교, 이데올로기의 기능이다.
좀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이니 쉽게 다시 풀어보자. 바로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기대수명은 50세를 넘기지 않았다. 그저 사십 몇 년 정도의 삶이라면 의미를 발견할 이야기가 부족하지 않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 젖을 찾으며, 엄마 아빠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하루를 충실히 살 의미를 충분히 찾아낸다. 그러다가 사춘기와 2차 성징이 찾아오면 온 몸을 휘저어 대는 호르몬의 공격과 정신과 감각을 지배하는 온갖 욕망과 감정의 분출로 ‘폭풍 노도’의 시기를 겪는다. 그게 진정되고 나면 보통 20대에 일자리를 찾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그다음 30대와 40대에는 가정을 꾸리고, 돈 모아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운다. 50대가 되면 가정 안팎으로 지도적 위치의 기성세대가 되어 여러 일을 관장한다. 60대가 되면 손자손녀를 보며 노년을 맞는다. 70대가 되면 죽는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20세기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인생 주기의 한 모델이다. 이것도 사실 길게 늘어난 것이며, 몇 백 년 전까지 인류는 50이 되면 사실 노년이라고 여겼으니 40대에 삶이 끝나는 일도 드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생은 지루할 틈이 없다. 몸과 마음의 성장, 다음 세대의 재생산, 사회 성원으로서의 정신적 물질적 욕구 충족 등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필요만 쫓아가도 빡빡한 세월이다. 삶의 희열과 에너지가 넘친 나머지 죽음을 앞두고 “나 같은 놈은 천 년은 살아야 하는데!”라고 억울해했던 희랍인 조르바가 이 시대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기대수명이 80년 이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버리면서, 약 40년 정도의 시간은 의미의 공백 상태로 남게 된다. 아주 성공적으로 삶을 살았다고 해도 50대가 되면 인류가 몇 천 년 간 믿고 살아왔던 삶의 ‘내러티브’는 모조리 끝난다. 아이도 다 키웠고, 노후 준비도 되었으며, 몸에 큰 병도 없다. 그런데 남은 30년 이상의 시간 동안 도대체 무얼 하고 살아야 하는가. 여행도 골프도 좋은 음식도 하루 이틀이며, 거기에 깊이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면 소일거리에 불과하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시간처럼, 이 30년의 노년은 “공허하고 지루한 시간”이 되어 버린다. 공허와 허무는 사람을 빨리 늙게 만든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앞서 예를 든 사람은 아주 성공적인 경우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현실적인 난제들을 또 끌어안고 있는 법이다. 노후 준비는 안 되어 있고, 아이들은 여전히 속 썩이며, 무릎은 벌써 나가 버렸으며, 배우자와는 이혼 직전이며 등등. 그러면 허무함과 지루함 뿐만 아니라 일상의 ‘비루함’까지 더해진다. 이 세 가지 감정은 서로 상승 (혹은 하강) 작용을 일으키며 노년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예술과 문화에 깊이 빠지는 것을 우리는 보통 청소년기의 취미 정도로 아는 경우가 많다. 20살의 젊은이는 세상 모든 것이 한없이 새롭고, 그 속에서 정신적인 의미를 신체적인 감각과 함께 결합하여 발견해간다. 그러다 보니 감각과 상상력으로 삶의 의미를 포착하고 전달하는 예술에 젊은이들이 빠지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런데 노년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예술과 문화에 빠져야 할 이유가 있다. 바로 방금 설명한, 탈산업사회에서의 ‘내러티브가 부재한’ 길고 긴 노년 때문이다. 청소년기와는 전혀 다른 관점,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익히 알던 예술 작품들이 완전히 새롭게 보일 것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질문, “50대 이후의 나의 삶의 줄거리와 의미는 무엇인가”에 관한 언질이나마 받을 수 있다.
소설 『돈키호테』를 20대에 읽었을 때에는 웃기고 재밌는 장면들만 골라 읽었다. 지금은 다른 질문을 가지고 읽고 있다. 돈키호테는 정말로 미친 것이었을까 아니면 미친 척을 한 것일까?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죽었으니 정말로 미친 것이었고 그걸 죽을 때 깨달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참회’라는 건 또 하나의 미친 짓이 아니었을까? 그게 고의였을까 아니면 광기의 연속이었을까? 아니 애초부터 지루한 삶을 때우기 위한 한판 사기극이 아니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내 나이가 집을 뛰쳐나가던 돈키호테의 나이와 비슷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왜 이 허무하고 지루하며 비루하기까지 한 일상을 몇십 년이나 더 이어가야 하는지의 대답을 찾고 있다.
홍기빈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거쳐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후 전환사회연구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소유는 춤춘다』 『코로나 사피엔스』(공저) 등이 있으며, 『거대한 전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 외』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권력 자본론』 『자본주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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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사진제공_전남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생애전환 문화예술학교 <오물오물 나의 ‘ㄱ’>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