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 고가도로 하부에 위치한 ‘미인도’를 찾아가려면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내려야 한다. 이곳은 꽤 알려진 맛집이 많은 대학가이다. 이렇게 번화한 곳 근처에 미인도가 있구나, 의아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신비로움은 횡단보도 하나에 의해 단절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고가도로가 나타날 즈음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인적이 뚝 끊긴다. 그리고 눈앞에 오래전 점집이 있던 흔적을 지나 청소노동자들이 열심히 쓰레기 분리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풍경을 만났다. 길은 이어져 있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진 길이 도시에는 무수히 숨겨져 있다. 끊어진 발걸음을 잇고 다시 걸어 다니는 길을 상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하장호 협동조합 고개엔마을 이사장을 만나 미인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경계를 넘은 연대와 공생
“동선동 미아리고개 고가도로 하부는 쓰레기를 모아서 정리하는 곳으로 쓰였어요. 대표적인 우범지대이고 민원이 쏟아지는 곳이었죠. 2014년 지역의 예술가, 기획자 그리고 성북문화재단과 함께 실험적인 워킹 그룹을 구성하고 국내외 사례를 검토했습니다. 민간 네트워크인 공유성북원탁회의, 성북문화재단, 성북구청의 공동 프로젝트로 미아리 고가도로 하부를 바꾸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 하장호 협동조합 고개엔마을 이사장
2015년 개관한 미인도는 지역 정치와 행정의 협조를 받아서 시작했지만 주차장이나 만들자던 지역 주민의 생각을 바꾼 것은 결국 시간과 신뢰가 쌓였을 때이다. 처음 1~2년 동안 주민들은 문화예술공간을 만드는 예술가들을 본인들이 하고 싶은 것만 실컷 하고 떠날 사람으로 여겨 신뢰하지 않았다. 3년 즈음 되었을 때는 ‘어라, 이 사람들 봐라. 안가네.’ 하며 신기했을 것이다. 뭘 하는지 기웃기웃 살폈고 호기심에 보이지 않는 경계와 문턱을 넘어 미인도에 입성했다.
그 시간 동안 미인도는 지역의 민원과 자신의 공간을 빼앗긴 청소노동자들과 부대끼며 예술가들, 미인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작업했다. 주민 모임에 오신 분들의 비판을 들으며 포기하지 않고 설명하며 견뎠다. 하장호 이사장은 물청소라도 하려고 하면 세금으로 물을 펑펑 쓴다고 3년 내내 혼내던 어르신이 2018년 3월 미인도에 들어오던 날과 그분이 시각예술가와 친구가 되어 가족 이야기를 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지역 주민들과 관계가 변한 터닝 포인트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5년이 지난 2020년, 청소노동자들은 미인도에서 제작한 쉼터에서 피곤한 몸을 잠시 내려놓는다. 공간에서 행사를 하는 날이면 청소하는 시간을 바꿔주기도 한다. 여전히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묘한 연대감과 공생 관계로 변화했다.
“동네 사람과 친해져야 한다는 목적 과정보다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묵묵히 공간을 운영하는 순간이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미쳤어요. 일상적으로 대단한 일을 공동으로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거죠, 그분들은 그분들의 삶을 살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고요. 그러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면 언제든 잡을 수 있어요.”
보이지 않는 변화를 이끄는 공간
공간이 생길 수 없는 길 밑에 공간을 만들고 모인 예술가들의 지역 살이는 또 다른 배움과 사유를 던진다. 미인도를 만들 즈음 하장호 이사장은 성북동에서 공유성북원탁회의라는 민간 네트워크를 시작하면서 지역 사람들을 초대했고, 관계 맺음이 시작되었다. 동네에서 사람과 마주치는 경험은 그도 처음이었다. 집과 일터를 오가며 만난 사람들과 우연히 커피를 마시고 일없이 수다를 떠는 일상, 가면을 쓰지 않는 삶 말이다. 이런 삶의 가능성을 체험한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어쩌면 미인도가 있는 동선동을 중심으로 창작도 하고 일상도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상상으로 이어졌고, 그 마음 하나로 ‘협동조합 고개엔마을’을 설립했다.
지금은 4~5인의 인건비를 만들 정도로 지역 내에서 일하고 있고, 5년 전에 마련한 지하 사무실이자 창고는 이제 포화 상태여서 고민이 많다. 그래도 공간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대신 ‘지하 소굴’로 명명하여 뭔가 재미난 문화예술 작업이 뚝딱뚝딱 계속되어 2호, 3호로 이어졌으면 하는 상상 중이란다. 이 지역에서 청년 시기를 보내는 예술가·기획자가 삶의 길을 단절하지 않고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기대가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지역의 아이들이 자라서 예술가가 되어 다시 지역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마을을 만드는 것은 오래된 꿈이다.
인간이 변하는 순간은 감동으로부터 시작된다. ‘본다, 한다, 나눈다, 배운다’와 같은 동사가 작동해야 보고, 하고, 배우고, 나누며 삶이 변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변화가 동사로 작동하게 연결하는 것이 교육이고 그런 의미에서 공간은 동사의 장소이다. 네모난 실내 장소일 수도 있고 장소와 연결된 거리일 수도 있고, 작은 상자 안일 수도 있다. 심장을 두드리는 떨림, 불편할 수도 있는 낯선 감정을 느끼며 사유하고, 신체의 감각을 통해 경험을 쌓는 지역의 문화예술 공간인 미인도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실제 예술교육 사업도 기능적 숙련이 목표가 아니라 삶을 읽어내는 힘을 통해 글로 완성하거나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살리는 다양한 과정으로 기획한다. 문화리터러시 강연 <10개의 책상> 프로그램도 결국 스스로 해석하여 사유하고 글로 쓰는 과정이고, 생태와 업사이클링도 일상의 감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쓰레기 문제와 환경, 생태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담론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현존하는 위기로 작동하고 있어요.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 지구의 위기를 자기 삶의 위기로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고 있어요. 주민들이 쓰레기를 예술의 방식으로 바꾸는 과정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고, 업사이클링과 손작업에 관심이 커지고 있죠. 거대 담론을 동네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요즘 하장호 이사장은 달라진 동네의 풍경을 만나고 있다. 주차장을 만드는 것이 낫다고 민원을 넣던 주민들이 새로 생긴 생활문화공간을 우리가 운영해보자고 제안한다. 지역의 주민자치회에서 스스로 조직한 주민 협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 카페가 생기고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풍경의 변화라면, 주민들은 경험과 배움으로 달라졌고, 함께 하는 예술가들은 일상과 작업이 이어지는 지역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변화이다.
상호 의지하여 모색하는
코로나를 맞닥뜨린 미인도의 한 해는 어떠했을까. 감염병 상황에 따라 준비하던 사업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일이 제법 있었다. 미인도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공공 공간이라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민간 공간에 비해 잦고 길었다. 안전한 만남과 연결을 위한 상상을 펼쳐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일상을 이어가는 한 해였다. 미인도와 지역 문화공간, 성북문화재단이 함께 방역 지침서 책자를 발행해서 4~5월에 필요한 곳에 배포했다. 지역의 발 빠른 대처였다. 미인도를 주제로 전시를 준비하던 작가의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을 때 전시를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협동조합 고개엔마을에서는 작가의 재료비의 50%를 보장해주자는 결정을 했다.
“코로나는 우리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이기에 상호 의지하면서 맞서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행정의 대처는 아쉬움이 있지요. 코로나 상황에서 개인이 겪은 피해가 구체적이고 다양합니다. 같이 고민해주는 장치와 모색이 좀 더 필요합니다.”
순식간에 바뀐 일상과 현재를 보내고 있는 요즘, 마스크를 쓰고 한 해를 보낼 것이라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인도와 미인도를 운영하는 하장호 이사장의 꿈은 뭘까. 미아리고개 고가도로 위쪽으로 미인도를 확장하고 싶다는 답이 제일 먼저 나왔다. 또 한 지역의 관계망 속에서 나이 들고, 젊은 사람들이 또 다른 어린 세대의 삶의 소란스럽지 않은 안내자가 되어서 이어지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우정을 이어가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보통 나이가 들면 가족 중심으로 상상하는데 저는 친구들과 삶을 상상하게 됩니다. 늙어서도 친구들과 일상을 나누고 서로 돌보는 삶이 되기를요.”
미인도와 동선동 사람들의 인연이 묵묵하게 이어져가기를. 감염병 시대를 견디며 포기하지 않은 관계와 감각을 깨우는 예술 작업이 이 시기를 견디는 그들의 소리를 듣게 되리라 저절로 믿게 된다. 마스크를 벗고 다시 미인도에 앉아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나눈 얘기를 다시 기억하며 나누게 될 이야기를 상상한다. 미인도와 미인도로 연결될 동선동, 좋은 날 다시 보자, 미아리고개.
- 삐삐(허선희)
- 마을예술창작소 ‘공간 릴라’ 운영지기, 마을예술네트워크 이사.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과 ‘공간 릴라’를 만들어 문화예술 활동을 한지도 10년. 잠깐 살다 떠날 줄 알았던 마포구 성산동에서 13년째 동네 사람으로 사는 문화예술 기획자이다.서울의 마을예술창작소 운영자들과 네트워크 하는 재미로 한세월을 보내고, 길에서 구조한 고양이들의 언니로 살면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소통을 배우고 있는 중. 쫌 노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다.
pippiya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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