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어지고 진해지는 감정의 교류

마당극패 우금치의 비대면 시대 생존기

명칭의 힘이었을까? 무거운 이름값은 그들이 섣불리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우금치’, 우리나라 연극, 마당극 계의 결코 작은 이름이 아니다. ‘우금치’는 공주에서 부여를 넘어가는 고개 이름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과 친일 관군이 최대 격전을 벌인 역사적인 곳이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죽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문화로 꽃을 피우자는 그 사명과 가치는 마당극패 ‘우금치’를 여전히 충청도에 묶어두고 있는지도 몰랐다. 30년, 적지 않은 세월이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기’ 딱 좋은 시간이다. 서울의 ‘자장’이 예술판에도 강력하게 작동되었을 테고, 문화예술의 불모지인 지역에서 무언가를 일군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깃발은 여전히 건재하고 동지들은 여태까지 남아있다. 독재권력이 자본권력으로 넘어갔던 그 시기에도 무던히 지향점을 잊지 않고 시대정신을 반영하려 노력했던 마당극패 우금치는 여전히 ‘살아있다’. 코로나19로 심각하게 외환을 겪었던 우금치는 이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30년의 내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켜켜이 쌓인 나이테가 쉬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둥구나무를 키워냈다. 1990년 대전 동구 대동에서 창단작품 <호미풀이>로 시작하여 91년 선화동 30평의 지하공간으로 이전해 살림을 꾸리다가 96년에는 동구 하소동 677번지 산속으로 들어가 11년간 그야말로 공동체 생활을 했다. 2006년 하소동 생활을 청산하고 폐교된 유성구 대동초등학교를 임대해 축제 상설 기획과 문화예술교육을 하며 지역으로 스며들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는 서구 만년동 평송청소년문화센터 공연장 상주단체를 하며 화려한 시절을 보냈으나 그 역시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다. 2016년 드디어 15년 동안 방치되었던 교회건물을 건물 담보와 단원들 개인 담보대출, 시민 후원으로 매입하여 별별마당 우금치란 둥우리를 틀었다. 
  • <돼지잔치>
  • <해야 해야>
단타를 치듯이 짧은 ‘짤’과 유튜브 영상들이 활개를 치며 우리 시간을 잡아먹고 있을 무렵, 마당극패 우금치는 영상과의 싸움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무대 객석 구분 없이 가장 짧은 거리에서 같이 호흡하고 느끼는 소리의 파장과 움직임의 전율이 동시 공간대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마당극의 특성상 코로나19의 비대면은 환난과 같은 악재였다. 마당극의 장점을 모조리 앗아간 것이다. 비대면으로 찍은 영상은 초점이 맞지 않았고 거리두기는 마당극의 관객을 확 줄였으며 그나마 줄은 관객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교감과 공감 속에 힘을 얻는 마당극의 특성상 ‘차’ 떼고 ‘포’ 뗀 장기판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작품을 만들려고 아끼고 모아둔 후원금은 운영비로 다 소진되어가고 있었고 조금씩 지쳐갔다. 
연극도 익숙하지 않은데 마당극이라니, 그들은 비대면 시대에 여전히 목마르게 대면을 찾고 있다. 같이 어울렁 더울렁 느끼고 울고 웃고 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코로나19로 더 어려워졌는지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서로 직접적인 소통이 어려운 시대에 들어섰다. 매개가 반드시 존재해야 편안한 그런 시대가 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당극은 사람과 사람이 수평적으로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예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성큼 다가오니 부담이고 불안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 본능 속에 잠재된 어떤 관계의 본질을 하나둘 끄집어낸다. 어쩌면 많이 고팠던 공감과 교감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그냥 그대로 많은 문제들이 절로 치유되는지도 몰랐다. 미국, 유럽, 러시아 유학파들이 연극 이론서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이처럼 현장에서는 오롯이 우리 연극에 대한 메소드, 연기술 등을 축적해 나가고 있었다. 마당극패 우금치는 코로나19 비대면 시대에 더 빛이 나는 외로운 별이다. 지역에서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 코로나19 비대면 시대에서 공연예술을 한다는 것,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지 않은 기초예술인 마당극을 한다는 것 등 물어볼 것은 차고 넘쳤다. 지금 이 시대의 마당극을 만나기 위해 별별마당 우금치 성장순 극장장을 만났다.
  • ‘별별마당 우금치 수군수군 버스킹’
마당극패 30년, 여전히 고군분투 중
그는 코로나19로 많은 문화예술단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남고 있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살아남은 게 아니라고. 살려고 여전히 버둥거리고 있다고.
“살아남았다는 것에 동의하고 싶지 않아요. 현재 진행형이거든요. 늘 위기에 봉착해 있어요. 사실 내년도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3~4년 후의 계획 자체가 무리수죠. 올해같이 코로나19같은 뜻하지 않은 변수들이 시시때때로 곳곳에서 위협하고 있죠. 18명의 단원들이 여기서 월급으로 먹고살아야 하다 보니 대단하다고 하지만, 또 대단히 위험하죠. 저희는 다 배우예요. 다른 사무나 홍보 일을 별도로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한 사람이 여러 업무를 겸업하죠. 회계도 봐야 하고, 기획도 해야 하고, 홍보도 해야 하고, 분장, 의상, 무대감독, 소품 제작, 식사 당번 등도 각각 배우를 하며 다 챙겨야 해요. 연기에만 전념해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절절히 체감하고 있기 때문에 각기 역할을 나눠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남들은 대단하다고 하는데 사실 앞이 막막하죠. 탄탄대로일 거라고 얘기하는데 속을 까 보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요.”
늘 어렵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만, 올해 코로나19는 그야말로 ‘직격탄’이었다. 작품을 만들려고 모아놓은 후원금도 다 까먹고 있었다. 공연은 열리지 못했지만, 극단과 극장 운영은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고민이 많은 한 해였다.
“올해는 초청공연이 80% 이상 줄었어요. (공연은) 모여서 같이 봐야 하는데 모이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잖아요. 막상 공연하려고 하면 예약한 사람들이 대부분 취소를 해서 망연자실했죠. 온라인 비대면으로도 해봤는데 조회수가 200회 이상 나왔지만, 이분들이 끝까지 다 보는 것도 아니고요. 답답해서 못 보겠다고 직접 오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전문 영상 찍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소리가 잘 안 들리기도 하고 초점도 잘 안 맞고…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이 참 많았지요.”
정말 올해는 재앙이자, 비상시국이었다고 했다. 마당극을 하는 우금치로서는 앞이 깜깜했고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마당극은 비대면 영상으로 보면 생동감이 확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코로나19 시대 모든 것을 비대면으로 다 하라고 하는데 영상 콘텐츠만 늘어날 뿐이었어요. 이제는 코로나19 대비로 공연에 영상이 꼭 필수 요건으로 따라붙게 된 거예요. 그래도 계속 이렇게 가야 하는가? 안 하고 살아남는 방법은 없을까? 마당극 특성상 영상을 위주로 공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영상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마당극은 가까운 거리에서 같이 호흡하며 눈빛으로 교감하며 봐야 하는데 영상으로 그 맛이 전달되겠어요? 땀방울 떨어지는 것도 보고 가쁜 호흡소리도 듣고 절절한 눈빛도 교감하면서 그래야 뭔가 맛이 나는데. 그게 안 되니 죽을 맛이었지요. 결국 이렇게 소외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 ‘별별마당 우금치 수군수군 버스킹’
교감의 규모 대신 밀도로
어렵게 대면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규모를 줄여 적은 인원으로 공연하는 게 익숙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에 둘러싸여 표정도 보지 못한 채 공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앞으로 코로나19가 쉬이 종식되지 않을 텐데 어떤 방법으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화두가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다른 방식의 만남이 필요해요. 예전에 저희 같으면 30명 이하면 공연을 안 했어요. 한 시간 넘게 온몸을 내던져 하는데 그 에너지를 동시간대 같이 느낄만한 관객들이 필요했죠. 많게는 5백 명에서 1천 명이 볼 때도 있었지요. 그런데 거리두기 하면서 20명 정도 관객이 마스크를 쓰고 보는데 환장하겠더라고요. 사람 수도 그렇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관객의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는 거예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관객과 서로 교감하며 시너지가 생겨야 연기하면서도 신바람이 나는 건데. 그런데 그것도 자주 하니까 익숙해지더라고요. 그렇게 굳어지는 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나는 거죠. 지난해처럼 큰 공연도 하겠지만, 이제 소수를 더 진한 만남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는 대전문화재단 원도심 문화예술활동 거점공간 사업의 일환으로 극장 앞 작은 공간에서 ‘별별마당 우금치 수군수군 버스킹’ 행사를 열었다. 피리, 해금, 오카리나 연주부터 소리꾼, 춤꾼, 배우, 버블 아티스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극장 앞 작은 무대에 섰다. 비대면 시대인만큼 우금치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하고 유튜브를 통해 하이라이트 영상을 게시했다. 중요했던 것은 코로나19로 무대가 사라지고 있었던 시기에 무대를 만들고 함께 그곳에 서는 일이었다.
“점심시간에 극장 앞에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거든요. 듣거나 말거나, 안 보더라도 들리긴 할 거니까, 작은 버스킹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참 좋아했어요. 그것보다도 더 의미 있었던 것은 함께 해준 예술가들이에요. 밥값 정도의 적은 개런티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참여해주었죠. 한분 한분 여러 장르에서 모시느라 거의 80명 정도가 참여했어요. 그분들 중 여럿이 ‘여기서 올해 처음 공연한다’고 하더라고요. 정작 저희는 판을 까느라 못하긴 했는데, 그게 되게 뿌듯했어요. 영상으로 내보내면 참여했던 아티스트가 고마워했어요. 어쨌든 홍보가 되고 SNS로도 공유되고 전파가 되니까요. 굉장히 작은 노력으로 판을 깔아서 나름의 성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
연극, 마당극만큼 복잡다단한 갈등과 감정을 풀어내면서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매개는 드물다고 말을 했다. 모든 청소년들이 연극, 마당극을 수업으로 배울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오랜 경험치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창단때부터 탈춤 강습과 풍물 강습을 해왔어요. 2007년 극단이 폐교에 있을 때 문화예술교육을 병행하려고 현장체험학습 모델 개발 사업을 하면서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했지요. 장르 프로그램도 하고 진로 체험도 많이 하고 있어요. 공연을 하면서 직업군 설명도 하고 작가, 분장, 의상 등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탈춤, 사자춤,민속 놀이도 가르쳐요. 극 중 역할을 뽑아서 연습하여 작은 공연을 하기도 하죠. 이게 한시간 반 정도 프로그램인데 굉장히 좋아해요. 공연에 흥미를 갖고 여러가지를 경험하면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좋아하죠. 이런 문화예술교육은 예산이 지원되어야 조금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어요. 예전에 서울시교육청에 예술꿈버스란 프로그램이 있어서 학교로 찾아가 문화예술교육을 하기도 했었지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고 연기로 승화시키는 문화예술교육은 누구에게나 큰 도움이 되죠.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것. 그리고 다른 감정을 표현해보는 것. 그러면서 합을 맞추는 것은 학습을 떠나 삶을 살아가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될거라 생각해요. 이런 문화예술교육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동학농민혁명은 우금치에서 패퇴하며 실패로 끝났지만, 그 정신을 마당극패 우금치가 여전히 계승하고 있었다. 30년 뿌리를 내리며 성장해온 커다란 느티나무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역의 터무늬와 나이테를 간직하며 오랜 세월 버텨온 ‘우금치’란 느티나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모두의 힘이 필요한 것 같았다. 느티나무 아래 그들이 구성지고 신명나게 공연하는 마당극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를 바란다.
황민호
황민호
[옥천신문] 제작실장. 옥천 사람. 18년 동안 옥천에서 살았고, 옥천에 사는 것이 재밌고 즐겁다. [옥천신문]에서 줄곧 일했으며 ‘옥천살림’ 트럭 운전사로 공공 급식 배달 기사 일도 한 바 있다. 차별과 위계 없이 사람들과 어울렁더울렁 재미나게 사는 대동 세상을 꿈꾼다. 지역 곳곳을 쏘다니면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옥천 사람들의 짧은 인터뷰를 페이스북에 올리는 ‘#옥길만사’를 하고 있다.
minho@okinews.com
사진제공 _ (사)마당극패 우금치 www.wukumch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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