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다른 방식으로 사부작거리기
‘계획’이 무의미해져 버리곤 하는 재난의 시대를 사는 우리, 슬프지만 이미 ‘취소’ ‘연기’ ‘중단’ 등의 언어가 일상이 되어버렸다. 동네 지인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함양지역 한 마을학교도 일정이 미뤄지고 미뤄지다 드디어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아이들과 딱 한 번 만나고는 학교 측 요청으로 다시 무기한 연기되었다. 우리와 비슷한 조건인 구례도 당연히 분위기가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지리산 마을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지리산씨협동조합(이하 ‘지리산씨’) 임현수 대표에게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여기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못하니 (마을학교가) 학교 안으로 들어오라는 분위기예요.”
역시 중요한 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와 만나고자 하는 마음인가.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지리산 마을학교는 여전히 ‘사부작사부작’ 제 할 일을 하는 중이다. 고택이 있는 마을 숲에서 하던 프로그램을 학교 주변 생태와 나무들을 이용하는 프로그램으로 재구조화하고, 실내에서 활용 가능한 체험 키트를 만드는 등 학교 안에서 진행이 가능한 형태로 마을학교 2학기를 준비하고 있다. 자신들이 해결해 보고 싶은 마을의 문제들을 찾고 과정을 스스로 만들어 보는 ‘생활실험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청소년들 또한 작년에 문을 연 농촌형 메이커 스페이스인 ‘구례 로컬 라이프 앤 디자인 스튜디오’에 드나들며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학교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학교 보조재 정도로, 마을교사들을 ‘외부인’으로 여기는 우리 지역 어떤 학교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든다.
지리산 마을학교를 운영하는 지리산씨는 지리산 둘레길과 자락의 마을, 주민의 삶에서 가치를 찾는 예술 및 여행, 생태 레저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협동조합이다. 2013년부터 구례, 남원 등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테마 여행, 문화 프로젝트, 교육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고 운영해왔다. 옆 동네에 사는 사람이 어깨너머로 보기에는 지리산 자락에서 걷고 공부하는, 구례에 남은 오랜 것들에 대해 눈길 가는 기획을 해내는 곳이 지리산씨다.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2018년도부터 전라남도교육청에서 지정한 ‘지리산 마을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 2019 마을학교
  • 자립기술공작단
지역과 어떻게 만나게 할까
우리에게 마을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사는 곳이 ‘꽤 괜찮은 곳’이 되려면 우선 마을을 알아야 한다. 마을에 사는 생명들, 사람들, 흔적들과 만나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마을학교 프로그램에 대한 동기를 갖게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지리산 마을학교’에서도 지역 고등학생들과 마을 어르신들과의 만남을 주선한 적이 있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인데도 아이들은 어르신들 말씀의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이들이 ‘세상이 빠르게 변했고 내 주변에 다시 소중하게 조명해야 할 것들이 있을 수 있겠다’는 느낌 정도만이라도 받으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재미는 없죠. (웃음)”
– 임현수 지리산씨협동조합 대표
그래서 올해는 ‘리빙랩’이라는 방식을 써보고 있다. 그리고 하반기부터는 미디어 역량을 기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누구나 스스로 지역을 읽고 담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길 바라서다. 작년엔 생태탐험대, 마을콘텐츠기획단, 놀이터모험대, 자립기술공작단, 구례교육아고라 등을 학교 수업 과정과 연계해서 진행해보았다면, 올해는 ‘리빙랩’과 ‘투어랩’ 이라는 생활 속 문제 해결을 위한 ‘생활실험실’ 형태로 운영 중이다. 어쨌든 아이들이 주도하는, 일회성 체험이 아닌 장기 프로젝트 중심으로 운영하려 한다. 지리산씨 사무실이기도 한 ‘구례 로컬 라이프 앤 디자인 스튜디오’라는 넉넉하고 창의적인 공간이 있어 아이들은 신이 난다. 이유는 단순하다. ‘(학교와 달리) 장비를 마음껏 만질 수 있어서’다.
  • 2020 마을학교 리빙랩
  • 2020 마을학교 투어랩
마을교육, 배움에 약자가 없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
올해 함양, 산청지역 학부모들과 워크숍을 하던 중 ‘코로나 시기에 새롭게 알게 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배움을 너무 학교에만 맡겨두고 나 몰라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들이 많았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배움이 단절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학교가 아닌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배움을 이어갈 수 있는 경로와 현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마을교육공동체가 만들어갈 기획과 실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역의 현실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지역에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거나 발전시킬 교육력이 있나요? 고도성장 시기에 열심히 잘해보자고 그것(교육)을 학교에 위탁했는데, 여기서 잘하는 아이들은 도시에 나가서 혼자 잘 살고, 지역에서는 땅값 오르기만 기다리고, 학교는 거대한 탁아소가 되어 있고…. 이미 시골은 역량을 기르고픈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공간이 되어 있어요.”
아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지역의 교육 역량은 어디서,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회복할 수 있을까?
임현수 대표는 “교사가 핵심”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때 교사는 전문적 지식을 전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끊임없이 나누어주는 사람’을 말한다. 자격증이나 나이, 혹은 학력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의 ‘터 무늬’를 간직한 사람들이 교육의 장에 다시 초대되는 일이며, 평범한 삶의 현장이 배움터로 다시 회복되는 일일 것이다. ‘배움에 약자가 없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 마을교육공동체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음악을 안 하느냐? 그렇지 않거든요. 어르신들이 피아노를 배우러 가는 게 아니라, 어르신들의 세계 안에서 음악을 함께하면 돼요. 같이 재생산하는 쪽으로 설계를 바꾸는 거죠. 옆집 할머니가 가르쳐주는 그림교실,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마을로 찾아가서 이 사람들 사이에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도록 연결하고 북돋는 사람이 있으면 되는 거예요.”
지리산씨는 이러한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재생산되는 학습공동체를 구례사람 누구나 접근 가능한 형태로 구현하는 꿈을 꾼다. 문화예술교육도, 마을교육도 ‘누구나 배움의 시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리라.
2019 구례교육아고라
개인이 지탱가능한 기반과 협업구조
‘지리산씨’는 안정적인 고용 형태를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야 젊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이 일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씨’는 최근 직원이 무려(?) 25명이나 있는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성장한 것은 불과 2년 반밖에 되지 않았다.
“마을학교에서 교사들도 역량을 키워야 하는데 시간당 3만 원, 5만 원 강사비로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고용을 다른 곳에서 확보해 이 사람을 안정적으로 키우려고 해요. 우선 개인의 삶이 지탱되어야 하니까요.”
행정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마을사업을 하며 만났던 어르신들, 교사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작업자, 예술가 등 여러 단위와 전방위적으로 협업하는 것 또한 중요한 요소다. 도와달라고 손 벌리는 게 아니라, 지리산씨가 한국관광공사, 중소기업청, 문화체육관광부 등 중앙의 자원을 끌어오고 군청, 지역 교육지원청과 같이 짜고 만들어간다. 젊은 공무원 10여 명과 함께 꾸준히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것도 모두 지역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라 여긴다. 지역 인프라와 협업구조를 만들어두어야 이 일들이 구례 안에서 지속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힘들 때일수록 함께 살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힘과 지혜를 모으면 됩니다. 나라에서 해주길 기다리는 것은 나라의 주인 된 입장이 아닙니다.”
– 임현수 대표 페이스북 게시글 중
‘장소를 지킨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자본에 포획되지 않고, 대도시의 유혹에 낚이지 않고 이 낡고 때로는 초라하며 아름다운 장소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있어 마을은 다시 교육을 꿈꾸고 학교는 다시 장소와 연대한다. 당분간 지리산 남쪽 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디로 어떻게 퍼져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이은진
이은진
함양읍의 명소(?) ‘빈둥’ 일요일 까페지기. 빈둥을 중심으로 지역에 활력을 더하는 기획이나 활동을, 함양교육지원청에서 ‘학부모지원전문가’란 이름으로 학부모들을 돕는 일을 한다.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연결되고 교차되는 가운데 가끔 글도 쓰고 카혼이나 우쿨렐레 같은 악기를 벗 삼아 놀기도 하며 잘 지낸다.
svjin96@gmail.com
사진제공 _ 지리산씨협동조합 www.jirisan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