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였다. 과천중앙공원을 가로질러 시내로 가던 길에 거리공연을 마주쳤다. 잠시 멈춰서 보다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끝까지 봐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길 가는 사람 멈춰 서게 만드는 과천축제가 벌써 23번째를 맞이했고, <아시아 공동체/참여 예술의 현황과 가능성>을 주제로 한 축제의 국제포럼에서 마지막 발표자로 서게 되었다. 과천 촌사람은 이렇게 조그만 도시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 새삼 신기할 뿐이다. 그리고 너무나 익숙하게 보고 자라온 이 과천축제가 아시아 최초의 거리예술축제라는 걸 이번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아파트
인구 7만의 작은 도시 과천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은 과천을 과촌이라 부르거나 시내를 읍내라 부르기도 한다. 도시라기엔 시골 마을 같은 감성이 살아있는 곳이라 한 다리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중학교가 2개뿐이라 동창회 하면 과천 출신 청년들 다 만날 수 있겠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5년 전부터 과천을 좋아하는 청년들이 모여서 수다 모임을 가졌다. 지금도 ‘과천 청년들’이라는 단체로 활동하고 있는데, 첫 모임 때 곧 재건축으로 사라질 1단지 주공아파트가 내 고향이고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얘길 했었다. 그때 소개받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는 책과 기록 프로젝트를 보고 큰 영감을 받아 책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로 고향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고향이라고 하면 꽃 피는 산골 같은 이미지를 쉽게 떠올리게 되지만,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지금의 청년들에겐 아파트 단지가 고향이다.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가 아파트가 된 것을 생각하면 아파트를 고향으로 여기는 ‘아파트 키즈’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에 심긴 나무를 보며 사계절의 변화를 알았고, 주차장과 놀이터는 놀러 나온 아이들로 늘 시끌벅적했다. 아파트 하면 도시적이고 차가운 콘크리트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아파트 키즈들에겐 소중한 기억들이 많은 따듯한 공간이다. 이 아름답고 소중한 공간이 한순간에 싹 사라진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사실 발표를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이 되었다. 발표자 중에 나만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발표 제목들은 흥미로웠지만 참여 예술이란 것이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고, 그것과 내 이야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하면 난 누구 여긴 어디가 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도시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돌아보거나 공동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는 생길 것 같았다. 아니면 예술가가 아닌 비예술가의 눈으로 참여 예술에 대해 알아보고 필요성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정도에서 출발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발표자의 입장보다는 사례에 나오는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었고 모든 발표마다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각각 다른 사례들이지만 공통으로 언급되거나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린 것들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과보단 과정
참여 예술에 대한 감이 잡히기 시작한 건 노인 커뮤니티와의 창작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 마카오에서 온 조안나 찬(Joanna Chan)의 발표에서부터였다. 노인 커뮤니티에 들어가 노래 연습도 하고,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드라마도 배우고, 발표회도 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나갔던 과정을 얘기했다. 시작부터 진행된 모든 과정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노인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노인들에게 워크숍과 교육을 하기 전에 교육의 주최자들이 어떻게 워크숍을 할지 소셜 아트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먼저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는 드림 시어터 협회만의 스킬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먼저 했다. 그런 뒤에 현지의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청소년들, 시민들과 프로젝트의 목적을 공유하고 교육하는 시간을 가졌고, 마지막 단계에서 워크숍과 교육을 통해 노인들 자신의 삶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공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표하고, 춤을 추고 연극을 했다. 이런 발표나 공연은 그 자체보다는 마음의 문을 점차 열고,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알아가고, 표현하게 되는 그 모든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이 지탱되려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필요하기에 그것을 쌓아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어서 발표한 인도에서 온 디비야 바티아(Divya Batia)의 뭄바이 어촌마을 프로젝트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빈곤과 실업이 큰 문제인 지역에서 어떠한 예술도 접한 적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다. 이 지역 사람들은 도시로 연결되는 큰 다리가 완공되면서 땅값이 오르자, 아이들을 잘 교육해서 지역을 떠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그래서 예술은 접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대부분 자존감이 낮았다. 시작부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관습적으로 학습되어 온 신에 대한 이야기, 서로를 향한 축복의 이야기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전거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중년 여성이 자전거를 타보는 것 같이, 평소에 해보지 못했던 작은 것들부터 시도해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면서 차츰 주변에 대해 알아가고 실업과 부족한 의료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 주변에 죽어가는 사람들(아무리 인구가 많은 인도라지만 한 해에 자살하는 농민이 6만 명이라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야기 등 점차 주제를 넓혀갔다. 이런 내용을 공연화 하는 것을 낯설어했지만, 일주일에 2번씩 만나서 모두 참여하는 형태로 계속 연구했다. 약속 시간을 따로 잡을 필요가 없었다. 오후에 모두 낮잠을 자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 다들 모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공연예술에 대한 관심도 올라가고 청년들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보여지는 공연뿐 아니라 예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들 또한 예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참여 예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모두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통념들과의 싸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체계로부터의 거부, 성격이 다른 커뮤니티 간의 부딪힘 등 보이지 않는 벽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그 벽을 인식하고 허물려는 시도와 과정 또한 참여 예술이 지향하는 점일 수도 있겠다.
동서양 문화의 접목(Hybridism)을 추구하는 현대 무용팀인 소울 시그니처의 공동대표인 호주의 셰리든 뉴먼(Sheriden Newman)과 싱가포르의 수프리 수와히르(Sufri Juwahir)가 발표를 이어갔다. 서양 문화권에 속해 있는 뉴먼은 동양의 춤을 배우고 접목해가는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몰입을 배웠다고 했다. 단순히 춤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음식, 음악, 전통이 무엇인지, 어디서 나왔는지 등을 배워야 했고 인내심과 포용성을 갖게 되었다. 다른 전통과 문화를 받아들여서 더 화려하게 만드는 일이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상대 문화 입장에서 보면 기분 나쁠 수 있기 때문에 민감하게 접근해야 하는 일이다. 싱가포르에서 아시아 각 나라의 춤을 보여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인도 춤과 싱가포르 춤을 접목한 무대를 준비했다가 쫓겨난 경험을 얘기해주었다. 춤을 잘 추긴 하지만 싱가포르 춤이 아니라는 이유로 참여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인가 생각하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얘길 듣는 순간 나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비주얼씨어터꽃 이철성 대표의 <마사지사> 공연에 관한 발표에서도 벽은 존재했다. <마사지사> 워크숍에 참여해 거리의 마사지사가 된 일반 시민들이 공연 현장에서 참여한 관객들을 마사지해준다. 그리고 마사지를 받으며 자신의 몸을 본뜬 종이가 만들어진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해주고, 가면을 잘라 만들고, 나중엔 태워서 재가 된다. 그런데 서울 공연 중 한 중년 남성은 자신의 얼굴을 오리는 모습을 보며 ‘이건 우상숭배야!’ 하며 뛰쳐나가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감당하기 힘들다며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고, 영국에서는 워크숍 도중 주택가에 있던 여성이 나와서 미친 짓을 왜 여기서 하냐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거부하는 행동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가 예술을 통해 드러난다.
목소리
요즘 매체를 통해 자주 볼 수 있는 16세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의 사진으로 시작한 대만의 청 치아오(Chung Chiao)의 발표는 말하고자 하는 지향점을 두고 지역 사람들과 함께 공연을 만들어가는 사례였다. 대만의 메이농(mei-nung)에서 댐 건설에 반대하는 농민들과 수백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재해를 물리치는 춤을 반년 동안 연습하여 공연했다.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는 종교적인 지역에서 행진을 하기도 했고, 통영에서는 바다 오염에 관한 공연을 했다. 생명, 생태계, 생산 3가지 가치를 담고 있는 사토야마(里山)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주민들과 함께 하는 공연을 통해 세계 기후 위기와 지구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알린다.
구례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군민극단 마을의 이상직 대표 발표에서는 18년간의 서울 활동을 접고 귀농하여 지역 주민들과 공연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구나 주체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예술을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 저 멀리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가 모여 만들어진 설득력이 2만 7천 명의 작은 도시에서 열린 모든 유료 공연을 매번 매진되게 만든 것 같다. 구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지역에서 참여 예술이 갖는 가능성에 대한 또 다른 목소리일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에 예술이 스며들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일상의 창의적인 행위를 예술이라고 알려주지 않는다면 예술의 역할은 무엇일까. 소수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끌고 가는 시대는 점차 지나가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좋다고 표하고 공유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일이 생길 땐 촛불을 들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온다. 적어도 대한민국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참여 예술은 어쩌면 이 거대한 시대적 흐름과 자연스럽게 발맞춰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난 고개를 들어도 꼭대기 층을 보기 힘들 정도로 높아진 새 아파트들만큼이나 이웃과의 따듯함을 잃어가는 도시의 삶을 걱정하는 편이다. 그래서 더욱 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방구석에 있는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나올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회이자 나는 누구고, 내 옆에 누가 살고 있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구심점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은 느려 보이지만 보통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는 참여 예술이 참 반갑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어느 공동체든 이러한 예술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곳은 없을 것 같다.
이한진
이한진
30년 넘게 살아온 마을 같은 작은 도시 과천을 애정하고, 그런 청년들이 함께 수다 떨며 재미나고 의미있는 일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태어나고 자랐던 단지가 재개발로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여 작별 인사로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라는 기록물을 만들었다.
‘2019 과천축제 국제포럼 : 아시아 포커스’에서 시민발제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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