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였다. 스크린을 통해 폭발하는 이미지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내 인생 두 번째 재난 이미지였다. 첫 번째는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될 때의 이미지이다. 지구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내가 딛고 서 있는 지반이 같이 붕괴되는 느낌을 받았다.
무너진 장소, 삶의 변화
9·11과 3·11, 두 사건은 나의 내면세계의 어떤 장소를 무너뜨렸다. 3·11 당시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강하게 일었다. 그래서 일본 친구와 함께 몇 해 동안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규슈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거대한 충격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스스로 바꾸게 한다. 충격으로 의식이 진화하는 것이다. 인터뷰한 사람들은 모두 다 사연은 제각각 다르지만 공통점은 기존의 삶의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고 느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재난의 충격으로 살던 도시를 떠나 자연과 연결된 삶의 방식으로 생활이 바뀐 사람들이다.
이토시마 셰어하우스는 시골의 오래된 집을 개조하여 6명이서 농사를 지으며 여러 대안적인 생활문화 기획과 공동생활을 실험해보는 곳이다. 사이하테 빌리지는 사람이 떠나버린 요양 시설에서 자율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이루며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미디어를 통해 국가를 초월한 여러 가지 커뮤니티 생활방식을 사회에 알리는 느슨한 공동체이다. 인터뷰한 많은 분 중에 특히 아소산의 깊은 숲에서 사는 켄고 씨는 나의 삶의 방식에 살아 있는 영감을 준 분이다. 숲속에 돔하우스를 직접 짓고 태양광 에너지를 생산하며 강인하고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그의 장소를 보고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몇 해를 그의 장소로 찾아가 함께 먹고 자고 이야기를 나누며 너무나 행복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그의 삶의 장소를 흉내 내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집을 숲에 있는 ‘산장’처럼 꾸미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도시형 건물에 살고 있는데, 거실의 모든 벽면에 나무를 덧대어 마치 오래된 산장처럼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다음은 난로를 설치하였다. 겨울에 나무를 태우며 불이라는 에너지를 통해 순간을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가스 난방을 하지 않고, 침구를 침낭으로 바꾸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조용히 앉아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주거 공간과 주거 방식과 행동 방식이 변화하면서 처음으로 물리적인 집이라는 공간이 내면의 집이라는 관념과 일체화되어 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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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숲 은둔 실험
가장 큰 변화는 2년 정도의 실험에서 시작되었다. 촘촘히 짜여진 사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은둔 비스름한’ 생활을 시작하면서 동네의 숲을 2년 동안 매일 빠짐없이 다녔던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낮과 밤을 숲에 머물며 그때그때의 여러 가지 감정 상태와 의식의 변화를 기록하였다. 마치 조선 시대 성리학 선조들이 자연에서 자신을 살피며 기록했다는 『자성록』을 나도 따라 해 본 것이다. 물론 흔적은 사진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남겼다. 그때 느꼈던 경험을 하나 소개해보면 이렇다.
내가 살아오면서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고르라면 그것은 고요한 시간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 무기력한 허무함이 고요한 상태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빠른 속도감, 너무 많은 정보자극, 너무 많은 관계들, 너무 많은 책임들, 끊이지 않는 소음들…. 이런 시공간 속에서는 잠깐 의미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발견한 의미가 고요함 속에서 풍부하고 복합적인 자기의미화의 단계로 진행되지 못하면 그 자리를 일상의 겉표면이 의미를 대체하게 된다. 겉도는 듯한 루틴을 계속 돌게 되는 것이다. 깊이 있는 자기의미화의 결핍이 쌓이다 보면 무언가 빠진 듯한 허전함과 이유 없이 신경질적인 공허한 감정이 자라난다. 나는 우연히 오랜 시간 숲에 머물다 문득 내가 인생의 제 자리에 와 있다는 안정감을 느꼈다. 그러자 갑자기 무의미하던 공기조차 의미 있는 심오함으로 바뀌어 내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기분을 느꼈다. 숲의 고요함이 나의 의식을 회복시킨 것이다. 숲이라는 공간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고요한 시간이란 삶의 독특한 자원이며 그 안에 창조적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개념을 어떻게 삶의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처럼 동네 숲에서 느꼈던 감각들은 나의 몸속에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장소’가 되었다. 중년이 다 되어서야 내면에 나만의 고유한 터가 생성된 것이다. 그 장소에서 의식을 안정화시키고 고독한 시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요즘 산 그리고 있습니다 – 이렇게 작고 시시한 고독은 왜 자꾸 오는가』라는 책도 내게 되었다. 최근에는 숲을 다니면서 숲의 이미지를 인두로 나무를 태워 그린 일러스트를 전시하기도 했다.
그동안을 뒤돌아보니 동네의 숲을 만나면서 내 삶을 운영하는 방식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만약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숲이 없었다면, 세상의 입력을 차단한 2년이라는 실험이 없었다면, 숨 막히는 내 삶 속에서 이런 장소를 발견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은둔을 시작한 처음에는 내가 사회를 등지고 고립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세계가 숲과 동조되면서 오히려 사회가 더 큰 세계로부터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의식이 점점 야위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 숲글쓰기
위기의 지구를 위한 사유
다른 재난 이야기를 해보자. 기후 위기 이야기이다. 올여름 그린란드 빙하가 하루에 3,000톤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16살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변화 대응 촉구운동으로 전 유럽 청소년들의 등교 거부 운동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고 한다. 2014년 유엔 총회에서 인도 모디 총리가 유엔 회원국에게 ‘세계 요가의 날’을 제청했고, 이를 유엔이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가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기후변화가 환경의 위기이기 이전에 인간 의식의 위기로 보고, 요가를 통해 정신과 육체, 인간과 자연, 절제와 충족의 세계관을 기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중남미 볼리비아와 에콰도르가 ‘지구법’을 선언하였다. 인간은 광물, 식물, 동물이라는 큰 가족에 속하며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가족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헌법에 명시한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어떤 북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 지구법을 상위법으로 했을 때 전개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산업은 어떻게 될까, 개인의 삶의 방식은 어떨까….
숲길을 걸으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산적한 무수히 많은 문제는 우리 자신을 인간만의 질서 속에 고립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만약 우리를 초월하는 더 큰 질서 속에서 우리를 다시 위치시킬 수 있다면, 그 확장된 공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사유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서구적 근대화를 위해 맹렬히 달려왔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도착한 곳은 ‘헬조선’이고, 천지는 기후 위기의 충격으로 뒤덮여 있다. 더 이상 이주할 곳도 없다. 그레타 툰베리는 2030년이라고 말했다. 인간의식이 진화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대로 멸종일까.

  • 우드버닝

  • 청년자립 라이프디자인 워크숍 포스터 (주최 : 광주문화재단)
의식이 접속하는 장소, 지역
내가 또 다른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숲에 가는 것뿐이다. 텐트를 치고 밤을 지낸다. 숲속의 다른 종들 사이에 내가 있음을 느껴본다.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모든 존재와 함께 내 삶이 펼쳐지고 있다고 상상해 본다. 겨울밤 다양한 생명을 떠올리며 이런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했다.
다른 종을 사귀자. – 커피를 마신다. 근 2년간 숲만 생각하며 보냈더니 사람친구보다 사람이 아닌 친구들이 더 많아졌다. 그들과 보낸 시간이 사람친구를 만난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이대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내 친구의 생물학적 단일종의 객체수가 인간에서 인간이 아닌 종으로 역전될 수도 있겠다. 헉! 듣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인생목표가 생겼다. 미지의 인생 신대륙을 발견한 느낌이다. 꼭 단일종과 평생을 어울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인간도 여러 친구 종 중 하나인 것이 된다. 인간에게만 향하던 동료애의 선택지가 식물종이건 동물종이건 최소 백배는 늘어난다. 인간종과 멀어지면 나이를 먹어도 꼰대 소리를 안 들을 수 있다. 어느 정도 인간사회 생활을 익히고 나면 나머지 인생은 지구종들과 살아가자. 사회적으로 다원화된 사회에 대한 욕구가 일듯이 자신 안의 동료종에 대한 다원화된 사고가 필요하다. 인간 사회에서 풀리지 않던 자신의 무언가가 오히려 인간 사회에서 풀려고 했던 것이 문제라는 걸 알게 될 수도 있다. 더 큰 차원과 접속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나에게 지역이란 행정구역상의 위치가 아닌, 나의 의식이 접속할 자연의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곳에 접속했을 때 내 삶이 지구 행성에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일깨워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요즘 나는 지인들과 함께 <스스로 걷다. 짓다. 눕다>라는 청년자립 라이프디자인 워크숍을 실험해 보고 있다.
사진 _ 필자 제공
포스터 제공 _ 광주문화재단
박활민
박활민
삶디자인연구소장. 생활방식 모험가. 노머니경제센터장. 잔액부족 초기족장. 생각수집가. 넝마스터.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으나 산업이 모두의 삶을 위협하는 시대임을 깨닫고 삶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삶을 죽이는 것은 무엇인가, 삶을 어디서부터 턴할 것인가, 이런 화두로 도시에서의 주거문제, 자급생산, 생활기술, 에너지전환, 커뮤니티 공간 등을 작업으로 발표하고 있다. 좌우명은 “돈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삶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다”이다.
인스타그램 #haru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