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의 저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에는 퍽 강렬한 장면이 등장한다. 1970년대 중반 히말라야 오지에 있는 ‘작은 티베트’라 불리는 라다크(Ladakh) 공동체를 처음 방문했을 당시 그곳의 한 청년에게 “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을 보여달라”고 말하자 청년은 “여기에는 그런 집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가난’이라는 개념 자체가 검소한 생활방식을 추구하고 협동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라다크 사회에는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약 십 년 후쯤 헬레나가 라다크를 다시 찾았을 때 그때 만난 청년이 서양인 관광객들을 향해 “우리를 도와주셨으면 해요. 우리는 너무 가난해요”라고 구걸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불과 십 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라다크 사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라다크 청년은 자기 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더불어 자기혐오의 감정을 철저히 내면화하면서 ‘라다크적인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마음의 습관을 견고히 형성한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저 히말라야 오지인 라다크 공동체마저 진출한 글로벌경제라는 이름의 ‘세계화’ 때문이다. 헬레나의 『행복의 경제학』은 라다크 사회를 지탱해온 오래된 지혜[Ancient Wisdom]의 회복을 촉구하면서 ‘세계화’에 맞서는 진짜 힘은 자치의 정치와 자급의 경제 그리고 자존의 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지역화’에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이른바 글로벌경제에 노출되면서 철저히 파괴된 생태학적 균형을 회복하고 공동체적 조화를 이루는 삶이야말로 인류의 ‘오래된 미래’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결국, 지역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헬레나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로컬의 미래』에서도 여일하게 나타난다. 지역화를 통해 ‘지역 감각’을 회복함으로써 근본적인 변화로 나아가자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기동성, 경쟁력, 개인주의를 강요하는 ‘세계화’에 맞서서 사랑과 연대의 힘을 서로 신뢰하며 ‘지역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고, 온전한 경제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로컬푸드 프로젝트, 로컬 비즈니스연맹, 로컬 금융기획, 공동체 기반의 신재생 에너지사업 같은 글로벌운동들을 소개하며 지금, 여기에서 당장 ‘큰 그림 행동주의’(big picture activism)를 실천하자고 주장한다. ‘바닥없는 경주’를 이용해 자기 이윤만을 극단적으로 챙기는 ‘금융의 대량살상무기’ 같은 길이 아니라, ‘경제를 지역으로 가져오기’(bring the economy home)를 통해 지역의 다양성을 살리자는 것이다. 헬레나가 대규모 단일 품종 농지보다 모자이크식 식량 생산, 소농(小農) 지원, 농업 다양성, 자급의 삶을 선택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흥미 있는 것은 이런 주장을 하는 헬레나의 어조에서 좀처럼 침통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운동들을 ‘명랑하게’ 응시하려는 낙관적 태도와 어조마저 감지된다. 세계 각지에서 로컬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며 결정적 다수를 만드는 ‘큰 그림 행동주의’를 깊이 신뢰하기 때문이리라. 예를 들어 국내총생산(GDP) 대신에 실질진보지표(GPI) 혹은 국민총행복(GNH) 같은 다양한 대안들에 대한 탐색은 최근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대한민국에서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도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한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컬의 미래』를 보노라면 지역에 근거한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위에 인용한 라다크 청년의 모습은 바로 대한민국을 사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 성인, 어르신들의 자화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대안학교, 홈스쿨링, 숲속학교 같은 대안교육을 비롯해 생태마을, 전환마을, 지역사회권운동 같은 로컬 계획 공동체들의 탐색은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예방적 사회정책이 되어야 마땅하다. 전쟁의 공포를 대체한 시장의 공포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짓누르는 대한민국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역화에 근거한 새로운 협력의 습관 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최근 포용국가를 표방한 정부의 국정기조는 문화예술(교육)적 실천을 통해 일종의 ‘문화안전망’ 개념을 적용하는 것으로까지 육화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캐나다 주부 C.J.슈나이더가 쓴 『엄마는 누가 돌보지?』(원제 Mothers of the Village)는 헬레나의 큰 그림 행동주의를 일상에서 실천하며 엄마를 위한, 엄마에 의한, 엄마들의 마을공동체를 역설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 『로컬의 미래』도 그렇지만, 『엄마는 누가 돌보지?』에서 강조하는 가치는 공동체적 유대와 확고한 상호의존이다. 한마디로 말해 엄마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육아가 엄마 혼자 돌보는 ‘독박 육아’가 되고, 심지어 ‘육아 폭탄’으로 간주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잘 사는 사회는 종종 “사회적 자본이 부식되는데” 그 이유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 대신 심리치료사를 고용하고, 집안의 노인을 가족과 공동체 대신 돈을 내고 요양원에서 돌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도 가족이나 공동체가 키우기보다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 시설에 맡긴다. 사회적 관계가 정서적으로 훨씬 더 만족스러울 잠재성을 가졌음에도 시장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관계의 기능을 대체해버렸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제는 사회적 자본을 대체한 시장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헬레나의 문제의식과도 같이 육아와 엄마를 위해서라도 시장화의 길 대신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마을공동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공동경작과 공동분배를 하는 멕시코의 ‘밀파’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망에 대한 작가의 탐색이 재미있다. 그러나 더 흥미 있는 것은 친자식이 아닌데도 아이의 양육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인 할머니/엄마/고모/이모/언니… 같은 알로마더(allomother)들의 역할과 알로페어런츠(alloparents)들이 연출하는 ‘확대가족’의 힘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쉽게 말해 분리되고 독립된 지금의 핵가족 형태는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알로페어런츠 같은 확대가족이 모든 문화권에서 유적 존재인 인류를 진화시킨 핵심 동력이었음을 풀이하는 대목이었다. 결론적으로 아이들을 위해서 마을이 필요하고, 엄마들을 위해서 마을이 필요하며, 우리 모두를 살리는 살림살이 경제를 위해서 마을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권의 책은 성장 중심의 경제 패러다임을 넘어설 새로운 사회문화적 비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책이다. 돈벌이 경제가 아니라 살림/살이 경제를 위한 사회문화 비전을 우리 모두 공유하고, 일상적 삶에서 그런 비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숙고하게 한다. 전 세계적인 지역화 운동의 일환으로 헬레나가 제시하는 다섯 단계의 행동 강령은 연대(Connect), 교육(Educate), 저항(Resist), 재건(Renew), 기념(Celebrate)의 가치이다. 이 다섯 가지의 행동 강령은 결국 사랑과 연대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가 사는 지역의 안녕을 위해 우리 모두 ‘마을 큐레이터’가 되어 뭐라도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마을은, 세상은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지제공 _ 남해의봄날, 서유재
- 고영직
- 문학평론가.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문학웹진 [비유] 편집위원, 문화예술교육 웹진 [잇다]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등을 펴냈다.
gocrit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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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라는 이름의 세계화는 우리 삶의 형태를 너무나도 많이 바꾸어 놓았죠.
그리고 우리에게 할머니 이고 고모 언니 등의 삶이 함께 연출 되었던 시대도 그리 먼 이전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죠. 그런 점에서 좀 안타깝죠. 이런 삶의 형태조차도 네이밍을 통해 만들어야 하나 하는 부정적 생각이 들긴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안이 있어, 그랬으면 좋겠음에 참 다행이란 생각이듭니다.
고맙습니다. 그런 관계망을 만들어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