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에는 인간 수명이 최고 142세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세 시대’ ‘인생 이모작’이라 말했던 것이 최근에는 ‘120세 시대’ ‘인생 삼모작’으로 늘었다. 인간 수명이 늘어나는 속도에 비해 우리 삶의 방식 혹은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혹독한 경제성장의 시기를 지나 ‘나’라는 개인의 삶과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나이 듦에 있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역사적’인 순간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12월 14일(금) 열린 ‘신중년을 위한 2018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 포럼’은 이러한 역사적 순간을 만들고 있는 신중년들의 경험과 과정에서 얻은 성찰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올해 처음 시범사업으로 진행된 ‘생애전환 문화예술학교’는 경남, 세종, 대전, 전남, 인천 등 5개 광역 문화예술교육지역센터(이하 ‘지역센터’)가 참여하였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도 만 50~64세 신중년을 위한 ‘삶과 나이’란 테마로 <문학과 함께 한 달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자연과 함께 한 달 살아보기> <품격 있는 고난으로 한 달 살아보기> 등 3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포럼 1부에서는 <문학과 함께 한 달 살아보기>에 참여한 5개 그룹의 발표가 진행되었다. 발표자들은 먹고사는 일 이외에 다른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던 지난 삶에 대한 회상과 문학과 만나게 된 과정, 그리고 이후 일어난 마음과 삶의 변화를 담담하고도 유쾌하게 전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닌 함께 행하는 것
2부에서는 ‘생애전환의 시기, 왜 문화예술교육과 만나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5개 지역센터에서 기획·운영한 생애전환 문화예술학교의 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2부가 시작되기 전 무대에는 커다란 뮤직 박스가 설치되었다. 이어 DJ 마다가스카르(김보영)의 잔잔한 목소리와 음악으로 문을 열었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남편과 두 아들을 위해 살아왔다는 그녀는 이제야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며 마음속에 담고만 있었던 ‘나’의 이야기를 몸 밖으로 꺼내어 선곡한 <산팔자 물팔자>(서유석)와 함께 들려주었다.
김보영 참가자의 디제잉은 경남센터에서 진행한 ‘쓸만한 인생, 쓸만한교’ 프로그램 중 하나다. ‘쓸만한교’는 ‘지금까지 잘 살아왔나’ 묻는 사투리로 지난 삶을 되짚어보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나누고자 지어진 이름이다. 디제잉, 글쓰기, (입밖으로) 소리 내기, (끌로) 나뭇조각 하기 등의 프로그램을 3개 마을에 있는 평생학습시설에서 진행했다. 발표를 맡은 김미정 코디네이터는 “의식처럼 진행한 디제잉 프로그램을 통해 자기 인생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서로를 스스로를 위안하는 과정이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발표 전 보여준 김보영 참가자의 디제잉으로 디제잉 프로그램이 참여자 간의 관계에 어떠한 역할을 했을지 알 수 있었다. 뮤직박스는 공연장의 무대와 같아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무대(뮤직박스)에 올라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이때 관객(청중)은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공감의 효과는 배가되는 것이다. 김미정 코디네이터는 “결과를 목표로 두거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닌 경험을 함께 나눌 때 효과가 높았다”라며, 관계를 회복하는 방식에서 매개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에서 매개자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들어주는 사람이며, 가르치는 것이 아닌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센터는 신중년과 예술의 만남을 중매(?)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꽃보다 작가, 일상탈출’이라는 제목으로 영화, 문학, 연극, 무용,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가 기획부터 교육강사까지 전 과정을 함께 진행했다. 대전 원도심을 탐방하며 사진을 찍고 발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무용 프로그램으로 참가자 간 스킨십하며 마음을 열었다. 관심은 많았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미디어도 함께 다뤄보았다. 대전센터의 프로그램은 제목 그대로 잔잔하기만 했던 일상에 예술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과정이었다. 발표를 맡은 연극배우 남명옥 교육강사는 “총 12회차의 프로그램이 끝난 지금 어르신들은 예술가(교육강사)들의 서포터즈가 되었고, 내년에 이 프로그램을 한다면 보조강사를 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모습과 자신감을 보였다.”라고 했다.
세종센터는 신중년 세대와 지역 청년이 함께하는 세대 소통형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큰 방향으로 정했다. 그렇게 진행한 ‘청춘문화VJ’ 프로그램은 강의와 실습, 작품 발표로 일반적인 미디어 교육과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세종센터 유정규 팀장은 프로그램이 아닌 과정에서 일어난 ‘관계’에 집중했다. 기능적인 교육이지만 지역 청년과 함께 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했고 한국영상대학교 학생들을 어르신들의 미디어교육 조력자로 참여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뒤풀이, 자발적 번개모임 등 ‘교육’은 어느새 참여자 간 ‘교류’로 바뀌었다. 청년들은 불안한 미래와 큰 변화를 앞두고 있는 자신들도 어르신들과 같은 ‘생애전환’의 시기라고 이야기했다. 어르신들과 청년들의 이야기는 의외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자식 같은 세대를 만나 자식과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닌 삶의 경험을 가감 없이 전하는 자리가 되었다. 수료식 자리에서 강사와 참여자 간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교육강사가 “저는 아무것도 가르쳐드리지 않았다.”라고 했더니 참가자들은 “도와주지 않아서 정말 감사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미디어 교육은 낯설고도 두려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참가자들의 답을 들으니 과정에서 교육강사와 참가자 간의 신뢰와 존중이 느껴졌다.
개별적 삶과 만나는 문화예술교육 현장
인천센터는 총 13회에 걸쳐 ‘생애전환 문화예술특강 : 전환을 위한 삶’을 진행했다. 발표를 맡은 인문학연구실 윤진현 동행자는 ‘삶을 바꾸는 일상의 철학’ ‘나의 삶 기록하기’ 등 꽉 짜인 13회에 걸친 프로그램 외에도 많은 고려 지점이 있었음을 이야기했다. 13회차에 달하는 프로그램을 전용 공간이 아닌 카페에서 진행한 것, 나이와 직업, 성별에 구애되지 않는 수평적 관계를 위한 장치들이 그것이다. 윤진현 동행자는 ‘생애전환을 위한 성찰의 점검 사항’으로 나와 다른 이를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할 준비는 되어 있는지, 배우거나 바꿀 준비는 되어 있는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을 만날 것인지를 꼽았다. 이러한 점검 사항은 참가자와 함께한 이번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예를 들면 ‘말할 준비가 되어있는가?’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이 구상하는 생애전환에서 가장 큰 장벽이 가족임을 인정하면서도 가족에 대해서는 이야기, 판단, 평가를 어려워했다고 한다. 윤진현 동행자의 발표는 이번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얻은 문화예술교육의 역할과 자세에 대한 연구 보고서와 같았다.
전남센터는 교육 프로그램과 포럼을 진행했다. ‘아저씨 아줌마들의 따뜻한 매 순간’을 줄여서 ‘아따매’라는 제목으로 구례와 장흥 두 지역에서 진행했다. 구례에서는 귀농 귀촌이라는 삶에 전환을 이미 만든 이주민과 함께 연극 프로그램을, 장흥에서는 전업주부들과 함께 춤과 소리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발표를 맡은 전남센터 차서연 주임은 변명이라면서도 홍보 과정까지 곁들인 모집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지역일수록 모집이 어려웠다. 결국 직접 대상 탐색에 들어갔다. 50~64세로 나이가 들어 생애전환기에 들어선 주민이 있는 반면 귀농 귀촌으로 인한 경력단절 혹은 결혼, 출산, 부모나 배우자의 사망 등으로 나이와 상관없이 자발적 생애전환을 만들어낸 대상으로 구분했다. 통계자료를 확인하고 참가자에게 직접 질문하면서 프로그램 방향을 구체화했다. 내년에는 올해 확인한 도시, 농촌,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각 지역별 성격을 감안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계획이며, 특히 홍보에 있어서는 자발적 참여가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참여를 권할 수 있는 자녀들을 타겟으로 홍보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이름을 지키고, 내면의 다름을 인정하는
5개 센터의 발표에 이어진 토론에는 생애전환 문화예술학교 추진단에 참여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윤소영 실장과 고영직 문학평론가, 그리고 김현주 미술작가가 무대에 올랐다. 윤소영 실장은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노력은 삶에서 계속된다”라며, “타인이 지어준 정체성에서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문화예술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발표를 듣는 내내 하게 되었다고 했다. 김현주 작가는 “사람이 돼지나 새가 지저분한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종,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람들끼리는 같은 종, 같은 사람이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라며, 예술 활동은 사실 서로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해주는 활동이라고 했다. 생애전환 문화예술학교 추진단장을 맡은 고영직 문학평론가는 “지역센터 워크숍 과정에서 미디어 교육이 상투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 우려했는데 지혜롭게 잘 헤쳐나갔다”면서, 5개 지역센터가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며 집단지성과 동료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신중년의 세대적인 특징과 특성을 말할 수 있지만,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인 한 사람을 봐야 한다. 어떤 소소한 것 속에서 이야기의 생산자로서의 나로 전환할 때”라면서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의 역할과 기능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4시간에 걸쳐 총 10개 사업의 발표와 3번의 토론이 진행된 포럼 현장은 딱딱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참석한 사람 모두가 지금 생애전환기이거나, 혹은 곧 생애전환기로 들어서는 당사자이거나, 혹은 나의 부모의 이야기로 느꼈기 때문일까. 발표자나 토론자 모두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발표를 했고, 객석 또한 웃음과 눈물이 뒤섞이는 과정을 반복했다. 누구도 ‘생애전환’과 상관없는 사람은 없다. 세종센터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년들의 이야기처럼 생애전환은 나이가 아닌 개별적인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은 생애전환기에서 다음 시기로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하는 다리이자,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주소진 _ 프로젝트 궁리 기획팀장
- 이메일 _ funkyij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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