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간의 비행 후 히스로 공항에 도착하여 우버를 이용해 호텔로 이동했다. 짐을 방에 던져두고 서둘러 요양원으로 향했다. 티브이에서 노인 시설을 잠깐씩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직접 노인 시설을, 게다가 영국의 노인 시설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은 긴장됐다. 잠시 헤매다 도착한 꽤 널찍한 방에는 요양원에 거주하는 노인들이 여러 개의 테이블에 나누어 앉아 있었다. 세대 간 연결을 촉진함으로써 더욱 안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예술 자선단체인 매직 미(Magic Me) 직원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음료수를 한 잔 집어 들게 한 뒤 테이블을 배정해 주었다. 이 행사는 매직 미가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는 ‘칵테일 인 케어 홈 파티(Cocktails in Care Homes Party)’였고, 그 주 있던 왕실 결혼(조지 왕자의 결혼식)을 테마로 소박하게 꾸며진 파티는 음악과 함께 1시간 정도 계속됐다. 때에 따라서는 예술가가 참여하기도 하는데 그날은 따로 예술가가 참여하진 않았다. 이 사업은 자원봉사자가 주축이 되는 행사로, 자원봉사자는 사전에 꼼꼼하게 작성된 16쪽의 행동지침을 숙지하는 것이 필수였다. 행사에서 같이 대화를 나누게 된 한 분은 홍콩에서 영국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셨고, 또 한 분은 젊은 시절 은행가로서 잘나가던 시절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는데, 몇십 년 전 영국의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난감했다. 요양원 생활에 대해 여쭈어보았는데, 매일매일이 똑같다는 답이 돌아왔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유치원 일일 교사로 파견된 격투기 선수처럼 낯선 상황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한 시간을 보냈는데, 요양원 밖으로 나와서 같이 갔던 영국인 동료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나만 당혹스러웠던 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예술적 참여가 노년에 미치는 영향
2018년 5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의 영국 방문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영국문화원이 협력하여 영국에서 진행한 리서치 방문을 진행했다. 2017년 12월 두 기관이 공동 주최한 ‘한영 컨퍼런스: 창의적 나이듦(Creative Ageing)’ 이후, 노년층을 대상으로 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있는 양국 예술 전문가들이 교류를 지속하고, 이를 통해 노년층의 예술 참여를 확장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추계예술대학교 정원철 교수, 부산 금정문화예술재단 원향미 팀장,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박수아 대리, 국립현대미술관 홍해지 담당자가 함께했는데, 런던에서는 사우스뱅크센터에서 열리는 60+ 세대와 예술가들이 주축이 된 ‘(B)old Festival’ 참가, 무용 전문 제작극장 새들러스 웰스, 커뮤니티 센터이자 사회적기업인 알마니 센터, 테이트 미술관의 예술 참여 특화 공간인 테이트 익스체인지 등을 방문했다. 또한 맨체스터에서는 맨체스터시의회, 휘트워스 갤러리,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 등을 방문했다. 두 도시에서 정책입안자, 극장/미술관의 노년층 대상 프로그램 운영자, 연구자, 예술가, 예술 기획자, 예술 활동 참가자들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들에 대한 소회를 아래와 같이 적어본다.
새들러스 웰스와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에서는 예술적 참여가 노년층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볼 수 있었다. 새들러스 웰스의 컴퍼니 오브 엘더스(Company of Elders)는 1989년에 창단된 무용단으로, 이전에 무용 교육을 받지 않은 60세 이상 중 단원을 선발한다. 매튜 본, 웨인 맥그리거 등 세계적인 안무가들이 무용단의 안무를 맡았었고, 우리가 방문했을 땐 신진 안무가의 작품을 전문 리허설 디렉터와 연습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단원들이 작품에 몰입하여 만들어내는 우아한 동작들은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났는데, 28명의 단원 중엔 60세에 무용단 창단 멤버로 참여하여 아직까지 활동하고 계신 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은 60대 이상 노년층을 대상으로 연극 기술을 배우고 체험하는 워크숍, 연극 제작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과정, 고령화 사회에서 예술이 갖는 역할에 대해 노인들이 직접 조사 및 연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60세 이상으로 구성된 극단인 엘더스 컴퍼니 (Elders Company)도 활동 중인데, 이곳을 방문했을 때 단원들이 극단에서의 활동과 경험에 대해 직접 들려주었다. 그분들이 이야기를 할 땐 어린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수줍음과 싱그러움이 함께 느껴졌는데, 문뜩 첫날 요양원에서 만났었던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그분들에게는 새로움은 과거에만 있었고, 현재의 매일매일은 같은 일상의 반복이라면, 무용단과 극단에 참여하고 계신 어르신들에겐 여전히 새로운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삶에 큰 활력을 가져다주는 듯 보였다.
맨체스터시의회 관계자와의 만남은 정책이 어떻게 지역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실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 들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맨체스터시의회에서는 노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나이 들기 좋은 도시로 가꾸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고령친화도시 맨체스터(Age Friendly City Manchester)’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7년부터 진행되는 문화 제공 프로그램(Cultural Offer Programme)은 맨체스터시의 노인들이 우수한 문화와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보건‧복지 분야에 예술을 접목시키고자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 휘트워스 갤러리,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 등 맨체스터와 샐포드의 19개 문화예술기관들과 함께하고 있다. 문화 제공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11년부터는 문화 챔피언 제도(Cultural Champions Scheme)를 시행하고 있는데, 문화 챔피언은 지역사회 내에서 노인문화예술 활동을 알리는 일종의 홍보대사로, 이들을 통해 지역 내 노인 커뮤니티에 문화예술행사 소식을 알리고, 노년층의 문화예술 활동 참여를 독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맨체스터시 내 모든 노인들은 문화 챔피언으로 지원할 수 있으며, 선정된 챔피언들에게는 연간 진행되는 다양한 문화예술행사에 관한 폭넓은 정보와 각종 행사의 할인 티켓, 그리고 지정 문화공간에서 근무하거나 봉사할 수 있는 기회 등이 제공된다.
한국과 영국, 차이를 넘어 교류하기
영국에선 예술 기관, 예술가, 관객·참여자 등 예술 생태계 구성원들의 주도성에 중점을 둔다. 영국의 미술관, 극장 등에서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부서의 명칭은 대개, ‘배움과 참여(Learning & Engagement)’인 경우가 많고, 테이트의 경우엔 좀 더 나아가 ‘테이트 익스체인지(Tate Exchange)’이다. 예술 프로그램에서 내용을 제공하는 자와 수용하는 자가 수직적으로 나누어져 있기보다는 좀 더 수평적인 관계를 표방하는데, 연주, 연기, 드로잉 등 예술적 기술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정보의 수동적인 수용보다는 주도적인 예술 참여를 지향한다.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의 노년층 대상 프로그램 또한 연극에 대한 지식 전달이나 기술 습득에서 멈추기보다는 주체적인 예술 참여자로서 역량을 기르는 것에 지향점을 둔다. 이러한 주도적 참여는 예술의 지속, 확장,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한 번의 전시나 연극 관람이 아닌 예술과 깊고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는 참여적인 예술에 있어 예술 기관(매개자)들과 예술가들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영국에서도 참여자들과 같이 만들어가는 예술적 경험 속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고민이 감지되는데, 한국의 예술 강사나, 참여적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예술 기획자 혹은 예술가들과 아이디어나 경험을 공유할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영국에서 노년층을 위한 예술 활동은 1970년대에 지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배링재단이 2009년부터 10년간 예술 기관들의 노년층을 위한 예술 활동에 예산을 지원하고, 잉글랜드예술위원회가 관련 사업을 지원하면서 확장되었다. 새로운 지원 덕분에 예술가들이 요양원에서 레지던시를 하고, 미술관들이 치매 노인을 위한 프로젝트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들이 감행되었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영국에서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예술 활동은 완숙기라기보단, 움을 틔우는 단계인 듯하다.
한국과 영국은 판이한 역사를 갖고 있듯, 예술 생태계의 구성이나 작동에 있어서도 차이점이 많다. 영국에서 노년층은 대개 은퇴 후인 65+로 인식되고 있고, 우리나라 예술 정책은 50+ 세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번 영국 방문 리서치를 준비할 때도 양국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연령대의 차이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차이는 불편함을 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발견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국과 영국의 예술가들과 예술 전문가들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노년층의 예술적 참여를 양적, 질적으로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영국문화원 ‘2017-18 한·영 상호교류의 해’ 기념 공동 협력 사업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주한영국문화원과 ‘2017-18 한‧영 상호교류의 해’를 맞이하여 양국의 예술‧창의교육을 위한 한‧영 공동연구 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7년에는 영국왕립예술협회(RSA) 연구자 및 예술-창의교육 분야 영국 전문가 8명이 한국을 방문하여 라운드테이블 등에 참여하였으며, 2017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 행사 국제심포지엄에서는 테이트미술관 교육총괄 ‘안나 커틀러’가 발제를 진행했다. 또한, 2017년 12월 진행된 ‘한·영 컨퍼런스 <창의적 나이듦>을 통해 ‘고령화 사회’에 대한 공통의 도전 과제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 영국이 세대 간 단절, 치매 노인의 증가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주목하여 고령 친화사회로 가기위한 방향을 모색하였다. 2018년에는 노년층을 대상으로 예술 프로그램을 기획·실행하고 있는 양국 예술 전문가들의 교류를 지속하고, 이를 통해 노년층의 예술 참여를 확장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고자 5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 영국을 방문하였다.
- 박윤조
- 영국문화원은 국제 문화 관계와 교육기회를 위한 기관으로 6대륙 100여 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 교류 및 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윤조는 주한영국문화원 아트디렉터(Director Arts)로 재직 중이며, 2007년부터 ‘공주시 디자인 카페: 일상의 행복’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 ‘리딩 바이러스’ ‘아트토크: Between Arts & Audience’ 등을 기획·실행했다. 한국의 기관들과 협업하여 한·영 큐레이터 교류, 무용 교류, 문학 기획자 교류, 런던도서전 문화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였으며, 한국과 영국의 다양한 예술 기관과 예술가 간의 교류 및 협업을 지원해 오고 있다.
arts@britishcounc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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