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낭만을 자못 갈망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비 오는 파리의 거리와 곳곳에 스민 예술의 정취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홀로 밤거리를 산책한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탑 종소리가 울리자, 거리를 배회하던 남자 앞에 클래식 카 한 대가 다가온다. 홀리듯 낯선 차에 타게 된 그가 도달한 곳은 1920년대의 파리,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피카소와 달리, 마티스의 파리였다. 남자가 그토록 꿈꾸던 낭만과 예술이 거기 있었다.
2018 아르떼 아카데미 ‘창의적 예술교육 프로젝트 : 예술 목욕재계–예술교육 재개’가 지난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2박 3일간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에서 진행됐다. 왕복 8차선 도로와 고층 오피스 빌딩과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 사이에서 처음 ‘행화탕’을 발견했을 때,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가 불현듯 떠올랐다. 빠르고 높은 도시의 풍경 속에 낮게 엎드린 오래된 목욕탕. 그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거슬러 추억의 한 장면으로 들어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곳에서, 낭만과 예술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채,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
행화탕에서 예술로 목욕재계
행화탕은 1958년에 지어져 올해로 환갑을 맞이한 오래된 대중목욕탕이다. 한때는 물 좋기로 소문이 자자해 성업을 이루었지만, 찜질방과 사우나의 인기에 손님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아현동 일대가 주택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오랜 단골들까지 떠나자 2008년경, 결국 문을 닫았다. 이후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공간에 새롭게 숨을 불어넣은 사람은 문화예술콘텐츠랩 ‘축제행성’의 서상혁 대표였다.
“처음 이 공간을 만났을 때, 생명체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기능을 상실한 채 외롭게 늙어버린 노인을 만난 느낌이랄까. 분명 존재해 있지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같았어요. 처음 이곳은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곳, 음산한 건물이었어요. 오후 6시 이후에는 있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피와 살이 돋게 만드는 활동을 해야겠다, 결단을 내렸습니다.”– 서상혁, 축제행성 대표
2016년, 행화탕은 목욕 영업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몸을 씻는 목욕탕이 아니라, 마음을 씻는 목욕탕으로 문을 열었다.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모토로 전시, 공연, 세미나, 강연 등 다양한 문화예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예술 목욕재계–예술교육 재개’ 연수 프로그램 역시, 예술로 마음을 씻는 목욕의 과정을 담고 있었다.
“ ‘목욕재계’라는 것 자체가 신성한 의식을 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는 행위잖아요. 도심 한복판, 6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공간에서 과거의 옷을 벗고, 깨끗이 마음을 정화하고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이 예술가로서, 교육자로서 쌓아왔던 묵은 감각들을 개방하고, 다시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가장 나다운 것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는 시간, 처음의 나를 발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서상혁 대표
프로그램에 참여한 25명의 연수생은 행화탕과 목욕, 재계와 축제, 비움과 발견에 대한 서상혁 대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생들의 눈빛에 기대와 설렘이 교차했다. 낡은 목조 지붕틀과 오래된 목욕탕 타일이 흐르는 시간을 붙잡은 채,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와 타인, 예술과 교육을 돌아보는 시간
연수생들은 프로그램의 내용뿐 아니라, 행화탕이라는 낯선 공간에도 큰 매력을 느꼈다. 오리엔테이션 중에 서상혁 대표의 안내에 따라 목욕탕 건물과 뒤편의 기름 창고, 목욕탕 주인이 살았다던 2층 주택까지 둘러보았는데, 여기저기에서 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찍기도 하고, 공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일상적 공간이었을 행화탕이 60년의 세월을 건너 비일상적인 경험을 선사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프로그램에 앞서, 연수생들을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그런데 그 방법이 흥미롭다. 3명이 한 조가 되어 30여 분 동안 자유롭게 담소를 나눈 후, 각자 소개를 맡은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이윽고 연수생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흡사 목욕 후,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르며 커피와 요구르트를 나눠 마시는 광경처럼 보였다. ‘예술강사’라는 공통분모가 연수생들의 말문을 열자, 서로 다른 장르에 대한 질문, 수업에 대한 호기심, 학생들에 대한 고민으로 대화가 번져나갔다. 생전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말하고 듣는 연수생들의 눈빛은 어느덧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를 외쳤다. 대화의 시간이 끝나고 소개가 시작됐다. 모든 연수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얻게 된 정보에 자신이 받은 인상을 더해 적극적으로 타인을 소개했다. 고운 피부부터 패션 센스까지, 유쾌한 칭찬 릴레이가 펼쳐지기도 하고, 본인이 놀랄 정도로 정밀한 소개가 나오기도 했다. 연수생들은 낯선 이를 소개하는 과정을 통해 행화탕에서 맺은 새로운 관계에 집중했다. 나의 관점과 타인의 존재가 만나 충돌하는 지점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
“교육자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문제가 교육에 대한 태도와 연결된다고 봐요.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만큼만 보고, 딱 그만큼 살다 가잖아요. 세상의 존재는 무수한데…….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관점을 갖느냐 인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타인을 관찰하고, 나를 발견할 것인지, 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가 중요한 거죠. 나를 돌아보고, 나와 다른 남을 발견하고 다시 나를 재점검하는 일. 이걸 토대로 저희 프로그램의 미션을 세 가지로 설정했어요. 첫째는 다른 장르에 대한 이해, 둘째는 문화예술교육 강사로서의 자존감 회복, 마지막으로 교육자로서의 재점검입니다.” – 서상혁 대표
문화예술교육은 단일한 정답을 쫓지 않는다. 다각적인 접근과 개별적 해답, 다양한 표현을 추구한다. 문화예술교육의 열린 가능성은 교육자에게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의문에 시달리게 만든다. 이 방법이 옳은 것일까, 어디까지 개입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새로운 문화적 흐름에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면, 문화예술교육 강사들의 교육은 위축되고 일반화될 수밖에 없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목표의식이 희미해진다. 결국 문화예술교육 강사가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술 목욕재계-예술교육 재개’에서 재차 강조하는 바이다.
목욕의 단계 : 탈의, 세신, 축제
프로그램은 크게 탈의-세신-축제의 단계에 따라 구성되었다. ‘탈의’는 말 그대로 벗고 비우고 내려놓는 과정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습관, 내 것이 아님에도 관성적으로 따랐던 방식, 일상의 묵은 허물을 잠시 내려놓고 가려졌던 원초적 감각을 깨우는 시간이다. ‘세신’은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성찰하고 찾아내는 과정이다.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타인의 욕망을 관찰하고 이를 시각화해 다시 성찰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축제’는 프로그램을 통해 모인 연수생들이 일시적이나마 공동체가 되어 낯선 경험을 공유하며, 성취감을 나누고 고민과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이다.
“참여자들 대부분이 3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문화예술교육 강사들이에요. 자기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분들인 만큼, ‘돌아볼 때’가 필요하지 않나……. 내려놓고 비워내고 정말 순결했던 상태, 초심으로 돌아가서 내 모든 감각을 열고 세상을 경험하는 과정을 함께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뭘 더하기보다는 비우고 덜어내는 탈의의 시간을 제일 먼저 가지게 됐고요. 점차 관계를 더하면서 일시적 공동체로 나아가게 했어요. 나에서 시작해 나와 타인, 나와 공동체, 결국 나와 세계로 확장하는 방식이죠.” – 서상혁 대표
대부분의 세부 프로그램이 연수생들의 직접적인 참여와 움직임을 요구했다. 자신의 감각을 통해 나와 타인, 세계를 체험하고, 깨닫고 재정립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탈의를 위한 오감 명상 프로그램이 무척 흥미로웠다. 숨 명상센터 정수지 원장의 지도로 진행된 명상은 고요하고 정적일 것이라는 기존의 예상을 깨고 무척이나 다채롭고 흥미롭게 채워졌다. 기타 라이브 연주도 함께였다. 먼저, 다 같이 일어나 가슴부터 머리, 얼굴을 거쳐, 몸 전체를 두드리며 몸을 깨우기 시작했다. 몸을 두드리는 소리와 기타 선율이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어냈다. 이토록 경쾌하고 동적인 명상은 처음이었다. 곧이어 가부좌를 틀고 꼿꼿이 앉은 연수생들이 오감에 집중하는 명상에 돌입했다.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선에 가만히 의식을 맡겨보기도 하고, 귓가를 지나 공간을 울리는 소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도 했다. 숨이 들고 나는 것을 그대로 느껴보기도 하고, 온몸을 찬찬히 훑으며 몸의 감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몇몇 참여자들은 명상이 끝난 후에도 여운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맑고 편안해 보였다.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자각했으면 하는 기대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왔는데……. 힐링이 되네요.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씻고 난 다음의 상쾌한 느낌? 개운하고 깨끗한 느낌이 들어요.” – 이원정, 연극분야 예술강사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고민하면서 왔는데 새로운 지역의 선생님들도 만나고 프로그램 부분마다 아이디어도 얻고, 오길 잘했다 싶어요. 이론에 치우친 프로그램이 아니라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좋네요.”– 심필숙, 국악분야 예술강사
2박 3일의 짧은 일정 동안 예술로 목욕재계한 연수생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자리에서 예술교육을 재개하게 될 것이다. 말갛게 개인 눈빛으로 세상을 보고 단단하게 자신을 다잡으며 새롭게 시작할 그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과거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에 덧씌워져 지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5년 뒤, 10년 뒤에 이 프로그램과 함께 한 3일이 새롭게 발아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제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긍정적인 방향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 서상혁 대표
아무리 깨끗이 씻고 다듬어도, 시간이 지나면 때가 묻고 쌓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다시 예술로 목욕재계하고 예술교육 재개하면 될 일이다!
- 2018 아르떼 아카데미 ‘창의적 예술교육 프로젝트’
- 예술장르의 경계 구분 없이 다양한 예술 경험을 통해 감각을 깨우고 새로운 발상을 촉진함으로써 문화예술교육 전문가이자 예술가인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성찰, 창의적 교육 역량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실험적인 연수 과정이다. 예술 활동의 즐거움과 깊이 있는 몰입을 경험함으로써 문화예술교육가로서 자신의 원동력을 이끌어 내고 싶은 이들을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 연수를 제공하고 있다. 올해는 교육내용에 효과적으로 몰입하고자 일률적인 연수원 강의실을 탈피하여 문화적 도시재생을 위한 유휴공간을 활용하고자 했다. ‘강원도 감자꽃스튜디오’부터 ‘서울 문화비축기지’까지 총 6개의 지역공간에서 7월 19일부터 8월 11일 까지 약 한 달 동안 진행된다.
- 박유미_미술작가
- 설치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많은 미술작가. 2013년 개인전 《what a wonderful world》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4년 아르코 퍼블릭아트 프로젝트 ‘마로니에 다방’을 기획했다. 어린이 예술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여전히 예술로 말하고 예술을 가르치는 작가 겸 강사로 목하 활동 중이다.
- gomako19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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