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년 전 여행을 떠났을 때, 여행지에서 우연히 눈에 띈 광경. 버스의 옆자리에 젊은 부부와 아기가 앉아있는데, 아기가 ‘태블릿’을 앞에 두고 화면 위에 손짓을 하며 이미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거의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것은. 과거 내가 필기구를 손에 잡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암기를 하고 사전을 찾던, 거의 인류 역사의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교육의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요즘 어린이들은 모두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며 공부하고, 필요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찾아낸다. 그것도 순식간에.
#2. 최근 전시를 돌아다니면 ‘이머시브(immersive)’라는 용어를 자주 접한다. 사전적으로는 ‘(컴퓨터 시스템이나 영상이 사용자를) 에워싸는 듯한’이라는 의미인데, 전시장을 단순히 시각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음악과 영상, 3D, 가상현실(VR) 등 다양한 특수 효과를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공감각적인 감상을 가능하게 하는 전시다. 이와 함께 진행되고 있는 관련 예술교육도 이러한 트렌드와 맞물려 다양한 매체와 기술이 접목되어 진행되고 있음을 목도하곤 한다.
새로운 만남, 무궁무진한 가능성
예술교육과 다양한 문화 관련 프로젝트에 뛰어들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선혁 레벨나인(Rebel9) 대표와 고명지 히스토리아트랩(HISTORY ART LAB) 대표는 이렇듯 최근 변화한 예술 교육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첨병이다. 오는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주최하는 ‘2018년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행사’에서 ‘예술로 피크닉’이라는 슬로건 아래 ‘예술+기술’을 체험할 수 있는 시민워크숍이 진행된다. 그 중 ‘백제의 보물, 금동대향로 속 숨은 이야기를 찾아’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문화예술 활동을 선보이는 두 사람을 합정동의 복합문화공간 ‘엘리펀트 스페이스’에서 만났다.
“박물관 교육 관련 콘텐츠를 준비하던 중에 만나게 되었죠. 기술 중심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구현에 중심을 두고 작업을 하던 중에 교육의 내용과 커리큘럼에 중심을 두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던 히스토리아트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필요한 요소들이 있어서 곧 의기투합할 수 있었지요.”
– 김선혁 레벨나인 대표
김선혁 대표의 레벨나인은 프로그래머, 엔지니어, 그래픽 디자이너,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 등 디지털 테크놀로지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회사다. 경영을 전공한 김 대표는 학창시절 연극을 좋아한 나머지 공연 기획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문화기술대학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문화기술’ ‘문화콘텐츠’라는 새로운 포맷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디지털 리소스’라는 무궁무진한 테크놀로지 기반의 자원을 이용해 다양한 사업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죠. 특히 이러한 데이터를 이용해 교육, 전시, 공연 등 다양한 형식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습니다. 레벨나인의 레벨(rebel)은 ‘반항’의 의미로 기존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입니다. ‘나인’은 이른바 ‘클라우드 나인’이라는 말에서 따왔어요.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를 뜻합니다. 2016년에 설립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문화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기획, 개발하고, 이를 통해 문화적 감성이 충만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어요.
– 김선혁 대표
2016년 설립 이후 레벨나인은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다양한 기관과 협업해 전시, 공연,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2006년부터 개인적으로 박물관에서 역사와 예술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에 어린 조카에게 박물관 교육 내용을 쉽게 설명할 기회가 있었어요. 어린이에게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박물관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강의를 하면 어떨까 해서 후배와 함께 2013년 히스토리아트랩을 설립하게 되었어요. 저는 한국·동양미술에 대해서, 후배이자 함께 일하는 이수미 씨는 서양미술에 대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고명지 히스토리아트랩 대표
히스토리아트랩의 ‘히스토리’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어린이와의 교육을 진행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양한 역사와 예술 관련 강사 풀을 가지고 적재적소에서 어린이와 박물관, 미술관이 가까워질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다.
몰입을 이끄는 예술과 기술의 균형
이른바, ‘문화가 먼저다’ ‘기술이 먼저다’라고 이야기하는 ‘문화결정론’과 ‘기술결정론’이 대립하고, 특히 미디어 플랫폼,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사회에서 예술에 대한 체험 또한 다양하게 변주되고, 이에 대한 교육 환경 또한 급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한 고민과 방향 모색이 올해 ‘4차 산업혁명, 예술의 발견’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2018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행사에 오롯이 담겨있다.
“사실 기술 중심의 콘텐츠, 예를 들어 인터랙티브 기술이나 VR 기술을 이용해서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진행하면 ‘몰입’이 훨씬 쉬워요. 레벨나인의 기술과 콘텐츠로 충분히 가능하지요. 그러나 교육적인 면에서 ‘이끄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술강사의 교육, 아이들의 집중도 등을 고려해서 교육 프로그램을 짭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과 내용이 적절하게 균형 잡힌 시나리오, 스토리텔링이 필요합니다. 히스토리아트랩의 전문적인 교육 커리큘럼이 이때 빛을 발하죠.”
– 김선혁 대표
레벨나인과 히스토리아트랩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예술교육 방법론의 내용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어린이를 위한 예술교육이라는 공통의 화두 안에서 서로 균형을 찾는다.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박물관이 즐거운 곳이고 예술이 아름답고 흥미롭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 이번 주간행사에 선보이는 ‘백제의 보물, 금동대향로 속 숨은 이야기를 찾아’는 국보 제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가 주제다.
“다양한 우리 문화유산이 존재합니다. 그중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문화유산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국보 제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는 스토리가 살아있어요. 1993년 12월 12일 발견된 때부터 아름다운 형태,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관련 이미지 등 어린이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거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지요. 실제로 유물을 보고 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 유물을 잘 알게 되면, 박물관에 가서 유물을 볼 기회가 있을 때 훨씬 집중도가 좋아집니다. 관심이 생기는 거죠.”
– 고명지 대표
어두운 공간에서 다양한 미디어로 구성된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직접 보고 있으니, 어른들도 좋아할 만하다(어른인 나도 좋았으니까).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부터 향로의 용도, 향로의 기원을 찾아 나가면서 백제와 세계의 역사까지 아우른다. 어린이들과 함께 온 부모도 좋아한다고 하니, 예술과 역사 교육의 대상을 한정 지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프로그램은 이른바 기관과의 협력이나 요청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특정 기관과의 협업으로 운영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용역 작업이지요.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속가능성 면에서 불리한 점도 있습니다. 히스토리아트랩과 이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만든 것은 좀 더 지속가능하고 독립적인 문화예술교육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 김선혁 대표
지속가능을 위한 현재진행형
레벨나인은 지난해 서울 합정동에 복합문화공간 ‘엘리펀트 스페이스’를 오픈했다. 과거 창고로 쓰이던 널찍한 공간과 높은 층고가 시원하다. 공간 가운데 ‘큐리어스 큐브’라는 블랙박스를 제작해 이 안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프로그램은 디지털 전시, 음악 공연, 인터랙티브 체험 교육, 강연, 연극, 퍼포먼스까지 아우른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과 인문학적인 교육 프로그램까지 진행이 가능하다. 특히 고품질의 디지털 리소스, 디지털 자원을 이용해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은 그 수준을 한 단계 높인다. 오프라인 공간과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러한 프로그램의 자생성과 지속가능성을 꾀한다.
“히스토리아트랩이 기획한 교육을 통해서 역사와 예술에 대해 즐겁게 접근했으면 좋겠어요. 지식을 얻음으로써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지점이 있거든요. 그리고 문화예술에 소외된 사람들과 교육을 통해 좀 더 소통했으면 좋겠습니다.”
– 고명지 대표
“지난 4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ACC 박사와 비밀의 문’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혼합현실 기술을 적용한 교육 콘텐츠로 아시아의 잃어버린 세계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는 모험입니다. 마지막까지 ‘ACC 박사’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어요. 다음 편을 준비 중인 거죠. 이른바 마블 영화처럼, 티저 광고를 깔고요.(웃음) 이번에도 <백제금동대향로>에 이어 고명지 대표와 <고구려 벽화>를 주제로 2편을 준비 중입니다. 히스토리아트랩과 계속 협업을 통해 독립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시리즈로 만들 계획입니다. 시리즈를 통해 교육 프로그램이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자생력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선혁 대표
레벨나인과 히스토리아트랩의 프로젝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화예술교육 ‘어벤져스’처럼 흥미로운 주제로 다음 편을 상상하게 한다. 이렇게 곧 2부가 시작된다. 두둥~.
김선혁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AIST 문화기술과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 KAIST 문화기술연구센터에서 일했으며, 2016년 ㈜레벨나인을 설립하여 현재 대표를 맡고 있다. 경기문화재단 20주년 메모리 전시 《Connect》(2017), ‘백남준기념관 버츄얼뮤지엄’(2017) 등 다수의 예술‧기술관련 연구, 문화 프로젝트 및 전시를 기획했다. 2017 iF디자인어워드 전시부문에서 수상했고, 서울특별시 미술작품심의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고명지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한국미술사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등 다수의 박물관에서 예술교육자로 일 해왔다. 2015년 히스토리아트랩과 배우다박물관을 설립하여 현재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만만하게, 박물관 첫걸음』(공동저자, 시소출판사, 2016)이 있다.
영상 _ 박영균(영상작가)
프로그램 사진 제공 _ 레벨나인
프로그램 사진 제공 _ 레벨나인
- 류동현
- 서울대학교에서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미술전문지 [아트](현 아트인 컬쳐), [월간미술] 기자로 일했으며, 문화역서울 284 전시큐레이터를 역임했다. 『미술이 온다』(오픈하우스, 2015), 『런던-기억』(책읽는 수요일, 2014) 등의 저서가 있다. 전시 <프로젝트284: 시간여행자의 시계>(문화역서울 284, 2017), 《페스티벌284: 美親狂場》(문화역서울 284, 2015) 등을 기획했으며, 개인전 《미술기자 Y씨의 뽕빨 111번》(워크룸, 2009)을 열었다. 현재 미술 저널리스트 겸 전시기획자, [페도라프레스]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fedora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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