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고등교육을 마친 열일곱 살 앳된 졸업생, 오랜 사회생활에 지쳐 잠시 휴직계를 내고 쉬고 싶은 직장인, 퇴직 후 무료한 삶 속 즐거움을 찾고 싶은 중년, 여생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워 보고 싶은 노인, 조금은 특별한 여행을 하고 싶어 떠난 여행자. 무작정 흐르는 삶의 시간을 잠시 늦추고, 낯선 공간 속에서 예술을 통해 자신을 탐색하고 만나고 싶은 이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0개월까지 예술과 함께 먹고 자고 노래하며 흥 내는 자리, ‘덴마크 시민학교(Folks Højskole)’가 바로 그곳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덴마크 시민학교(Folks Højskole)

덴마크 시민학교는 150년 전 니콜라이 프레드릭 세베린 그룬츠빅(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이라는 학자가 농촌의 소작농 층을 계몽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대학을 대신할 ‘농민학교’를 농촌 곳곳에 설립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덴마크 절반 이상이 농민이었던 시절, 그룬츠빅은 덴마크 사회 변혁의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소작농이라 생각했다. 그는 농민들이 농민학교를 통해 덴마크 사회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길 바랐다. 이들의 연대가 아래로부터 위로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랐고, 동시에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끊임없이 삶과 행복에 대해 고민하며 살기를 바랐다.
마을 주민들은 학교에 나와 두런두런 마주 보고 앉아 민주주의에 대한 책을 읽고 토론했다. 밭일, 논일, 젖소 키우는 방법 등 실질적인 정보들을 학교에서 나누고 협동하며 한해 마을살이를 모두 함께 고민했다. 곱절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땅의 일을 하고도 학교에 모이면 한 사람 두 사람 시를 읊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그림도 그렸다. 이렇게 농민들은 학교를 통해 조금씩 더 나은 덴마크를 만들어 나갔다. 덴마크 전역에 140여 개가 넘는 농민학교가 생겼던 시절도 그 때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학교의 기능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현재의 농민학교는 ‘시민학교(Folks Højskole)’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지금은 약 70개의 시민학교가 덴마크 전역에 운영되고 있다. 소작 농민들을 계몽하던 학교는 지금 누구에게나 열린 ‘인생 학교’가 된 셈이다.
시민학교는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다. 입학한 학생 전원이 기숙사에 함께 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학교는 9월 또는 1월에 학기가 시작되어 입학 신청을 3개월 이전부터 온라인을 통해 받는다. 학교마다 입학 정원이 정해져 있는 등 일정과 정원은 상이할 수 있지만, 정원의 50% 이상이 반드시 자국민이어야 하는 원칙이 있다. 무엇보다 학교의 가장 큰 장점은 입학 시 이전 학교의 학점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국적, 성별, 언어도 입학 조건이 되지 않는다. 누구나 문턱 없이 드나들 수 있는 학교의 친근함은 옛 농민학교나 지금의 시민학교나 그 맥락을 그대로 이은 셈이다.
학교 과정은 대부분 4개월 또는 9개월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기간을 선택할 수 있다. 만약, 그 이상 또는 이하의 일정을 원할 경우 학교와 타협하면 된다. 학비는 학교마다 선택하는 수업에 따라 다른데 대게 4개월 이상일 경우 한 주에 약 1,450 DKK(한화로 약 25만 원)정도다. 학비에는 수업료, 수업재료, 기숙사비, 식대가 모두 포함된 금액이다. 1주~2주 정도 아주 짧게 머물렀다 가는 코스도 있다. 이것은 학교의 정규 수업이라기보다는 견학이나 캠프 형태의 특별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된다. 학비가 부담스러운 학생들에게는 장학금 제도가 있는데, 자국민을 위한 제도와 외국인들을 위한 제도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 경쟁률 부담이 조금 해소된다.
학교의 하루, 덴마크 시민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우나
매일 아침 8시 반, 하루의 시작은 조회다. 3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덴마크의 모든 시민학교는 이 조회를 잊지 않고 진행한다. 500곡 정도가 수록된 시민학교 노래 책자 중에서 그날 날씨와 분위기에 따라 한 곡을 선정해 함께 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연다. 이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는 수업에 들어가기 전 노래 한 곡과 더불어 ‘10분 아침 브레인스토밍’ 프로그램을 통해 하루를 유연하게 열 수 있는 여유로움을 전하는 데 있다. 조회가 끝나고 나면 9시부터 정규 수업이 시작된다. 10시 반까지 1교시가 진행되고 오전 간식 시간을 30분 정도 가진 뒤 2교시 수업이 11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된다.
지역에 따라 학교가 가르치는 과목이 다르다. 예술 과목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학교도 있고, 스포츠나 종교 또는 철학에 집중된 학교도 있다. 특화된 과목에 따라 학교 이름이 정해진다. 필자가 다녔던 학교는 보룬홀룸이라는 섬에 있는 예술 과목에 집중된 학교여서 ‘보룬홀룸 예술 시민학교’라고 불렀다. 보룬홀룸 시민학교의 교과목은 유리공예, 도자기, 그림, 음악, 금속공예, 미디어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름학기에는 요리 수업도 개설된다. 학생들은 한 학기에 두 과목을 선택할 수 있고 격주로 돌아가며 선택한 수업을 듣는다. 실습 공간들은 24시간 열려있기 때문에 두 과목 이상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은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비어있는 실습실에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다.
모든 교과목에는 학습 목표와 주차별 세부 수업 계획이 정해져 있고 이 내용은 첫날 수업시간에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공유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작업 속도에 따라 수업 계획과 일정은 유연하게 움직인다. 모두가 동시에 시작하여 같은 시간에 마무리 짓지 않아도 된다는 학교의 방침과 학생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하는 학교의 원칙 때문이다. 학교마다 교사 선발에 대한 기준이 다르지만, 선생님들은 덴마크 내에서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은 지역 예술가들로 구성돼있다. 선생님들은 대체로 ‘가르치는’ 행위보다는 끊임없이 학생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질문’을 하고 토론 위주의 수업을 진행한다.
필자가 이 학교에 다닐 당시, 미술과 도자기를 배웠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작품을 만들기 전 영감을 얻기 위해 산으로 들로 나가 자연을 깊게 들여다보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보냈다. 특히 기억나는 몇 가지 수업의 예를 들자면 하나의 조형물을 만들기 위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식물들을 관찰한 뒤 실제 크기의 30배로 세밀하게 묘사하기도 했고, 하루 종일 새 볼펜 하나가 닳아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오후 6시만 되면 들에 찾아오는 까마귀 떼의 날개를 묘사하러 한 달 동안 빠짐없이 들녘에 나갔던 적도 있다. 학교를 찾은 사람들 모두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기술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닌 만큼 영감을 얻는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학교의 자율성과 선생님의 가르침,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자신을 알아가고 느끼는 시간을 모두 만족해했다.
오후 수업은 1시에 시작해 4시까지 진행되고 정규 수업이 끝이 나면 4시 이후부터는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학교에서는 외국에서 온 학생들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덴마크어, 영어 강좌를 제공하는데 이 수업은 원하는 사람만 듣는다. 화요일, 목요일 저녁에는 학교 밖 예술 프로그램들도 있다. 외부 전시회나 콘서트에 참석하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기도 한다.
자율성을 부여받은 만큼, 학생들 스스로 책임을 지고 학교를 위해 해야 할 일들도 있다. 점심과 저녁은 학생들이 조를 나눠 급식당번을 정해 학교 조리팀을 도와 음식을 차려내고 치워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모두 함께 대청소를 하고 방 모임을 진행하면서 살면서 불편한 이야기들도 나눈다. 또한, 전교생이 모두 모여 학생 회의도 진행한다. 현재 학교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공유하고 개선해야 할 상황들이 있는지 점검한 뒤 회의 자리에서 방안들을 함께 모색한다. 보룬홀룸 시민학교는 단순히 예술 수업을 제공하고 배우는 기능을 넘어선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각양각색의 삶의 모양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키운다. 예술과 삶을 따로 사고하지 않는 일상 속 예술의 힘이 무엇인지 지극히 현실 속, 학교 안에서 보여준다.

모두에게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학생들은 무게 없는 교육 시스템 아래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예술을 대한다. 학교를 찾기 전, 누구는 진로 고민에 방황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도, 또 다른 이는 지금보다 더 즐거운 삶을 꿈꾸기도 한다.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어 누군가의 삶과 견주어 비교하며 쫓아가는 삶을 살아왔던 우리이기 때문이다.
덴마크 시민학교는 다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 안에 예술을 툭 하고 던져 주었다. ‘세상의 속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돌보라’고 이야기하며 말이다. 시민학교엔 열일곱 살의 학생과 칠십이 넘은 학생이 한자리에 앉아 물레를 돌리면서 나누는 이야기가 있다. 간호사였던 직장인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 하루 동안 그린 그림을 보고 나누는 이야기도 있다. 필자는 덴마크 시민학교를 통해 예술이 안내하는 우리들의 넘나드는 시대와 시간의 힘을 느꼈다. 복잡한 세상 속, 벅찬 시간 속에서는 결코 들여다보지 못했던 이 세심한 것들이, 이렇게 생명력이 있던 것들이었을까. 학교의 시계는 천천히 흐른다. 그리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모두에게 온전하게 주어지며 흐른다. 이들이 학교에 모인 이유, ‘예술’을 만나 ‘천천히’ 가는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다.

천우연_문화기획자
천우연_문화기획자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태어나 풀밭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어린이 전시와 뮤지컬을 제작하며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는 공공기관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수주하는 일을 하다 2016년 일년 반, 세계 곳곳에 있는 예술마을을 여행했다. 여행 후 ‘세계 예술마을로 떠나다’ 책을 출간하고, 현재는 북촌문화센터에서 오래된 북촌의 마을 이야기로 여행 프로그램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머지 않아 고향 해남으로 다시 돌아가 마을 주민들과 예술가들과 함께 가슴 따뜻한 일을 하고픈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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