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센터와 예술학교의 성공적인 연대는 이상적인 아이디어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예술현장에 기반한 전문성 높은 예술교육이 가능하고, 예술센터는 학교의 교육모델과 커리큘럼을 이용해 보다 폭넓은 대상에게 문화예술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상적 모델의 수위만큼 현실에서의 성공은 쉽지 않다. 1982년 설립되어 영국을 대표하는 공연예술기관인 바비칸센터는 같은 공간에 입주한 길드홀음악연극대학과 연계하여, 10여 년 전부터 이러한 통합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다. 두 기관은 각자 운영하던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창의학습(creative learning)’ 프로그램으로 통합해 전문적이고, 다양하며, 교육적인 실험이 가득한 사회적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연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문화예술의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아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가족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비칸이 내세우는 ‘경계 없는 예술(arts without boundaries)’과 ‘예술가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당위성의 강조는, 당연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그 철학이 예술가를 기르는 교육기관에서부터 강조되어 전반적인 프로그램의 구석구석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도. 왜냐하면, 여전히 예술기관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커뮤니티 아웃리치 프로그램은 중요도나 완성도에서 차별적이고, 특히 커뮤니티 아웃리치 프로그램은 관객을 육성하기 위한 지원책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소외계층’을 위한 ‘수혜’ 같은 예술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 부분으로서, 우리 인간성의 한 부분을 완성하기 위해 “모두를 위한 예술”을 실현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추위가 한창이던 날, 해외전문가 초청워크숍에 참석한 바비칸-길드홀의 학습·참여부서 총괄디렉터 션 그레고리(Sean Gregory)와 만나 창의적 리더로서의 예술가 교육과 센터-학교 간의 연계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예술센터인 바비칸센터와 교육기관인 런던 시립 길드홀음악연극대학이 협력해서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사실 공연센터와 교육기관의 목적이나 우선순위가 달라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이 연대의 의미와 성과를 간략히 설명해 달라.
사실 두 기관은 10년 전까지는 같은 건물을 사용하면서도 거의 소통이 없었다.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서고, 협업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두 기관의 행정 관련 부서들이 통합되었다. 가장 중요한 연대는 두 기관의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통합한 창의학습 부서의 창설(2009년)이다. 세계적 수준의 예술학교와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있는 전문적인 아트센터의 기반을 통합하면 정말 훌륭한 커뮤니티 프로그램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출발했다. 특히 문화적으로 혜택이 적었던 런던 동부지역(East London)의 가족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좀 더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 가능했다.
창의학습 부서는 크게 다섯 가지 주요 영역을 설정했다. 우선, 센터 안팎에서 문화예술의 혜택이 적었던 사람들을 위해 (대개는) 무료로 진행하는 축제나 공연 같은 공공행사이다. 둘째는 소외 지역으로 찾아가는 커뮤니티 참여 영역으로 시민 단체나 젊은이, 가족 등 다양한 그룹과 연계하여 예술 활동에 참여하도록 한다. 세 번째는 ‘바비칸 박스(Barbican Box)’처럼 학교에 예술가 파견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활동이고, 네 번째는 ‘영 크리에이티브(Young Creative)’로 예술이나 문화에 관심 있는 14세에서 25세 젊은이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일이다. 예컨대, 시나 영화에 관심 있는 친구들을 위한 ‘젊은 시인(Young Poet)’, ‘젊은 영화제작자(Young Film Maker)’ 등이다. 예술가를 꿈꾸는 아이들에게는 커리어에 대한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관객으로서 문화예술에 관심 있는 아이들에게는 공연관람을 지원한다. 마지막으로는 신진 예술가(Emerging and Established Artist)들을 위한 개발과 교육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부서명이 창의학습센터(Creative Learning Center)인데 우리 시대에서 ‘창의’ 혹은 ‘창의적’이라는 단어는 예술가나 과학자를 넘어 모두에게 필요한 마법의 단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예술을 변론하는 입장에서 예술(감상 혹은 참여)을 통해 유도된 창의력은 어떻게 다르고 특별한가? 창의성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르칠 수 있고’, ‘습득 가능한’ 능력인가? 창의성을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한 부분으로 보자면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
실제로 우리가 학부 커리큘럼을 구성할 때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개인적으로 창의성은 (교육된다기보다는) 환경이나 참여과정을 통해서 포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의적 학습은 예술가의 주도하에 이런저런 방법을 쓰면 다른 사람들의 창의성을 기를 수 있다는 식의 고정된 교육방법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다만, 예술가는 창의적인 경험을 하는 방법, 혹은 접점에 대해 유도하거나 제시할 수 있다. 그 제시와 재현과정에서 예술가 혹은 참여자가 스스로 자신의 길, 자신의 방법을 찾는 것이 창의성의 발현이라고 본다.
이번 워크숍에서 21세기의 예술가는 예술을 홍보하는 ‘포트폴리오 실행가(portfolio practitioner)’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의할 수 없는 현대 예술의 흐름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내러티브뿐 아니라 예술을 어떻게 감상하고 참여해야 할지, 작품뿐 아니라 자신들의 관객들을 창조해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 길드홀음악연극대학에서는 리더십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교육자(혹은 창의적 리더로서의 예술가)를 양성하는데, 여기서 강조하는 예술가의 리더십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예술가를 ‘창의적인 리더(creative leader)’로 교육하기 위해 어떠한 철학과 방법론이 필요한가? 그리고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었는가?
사실, 우리가 30년 넘게 씨름을 해온 어려운 문제다. 우리 부서에서 진행하는 활동들은 학생들의 교과과정을 연계하고 통합한다.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학생들은 커뮤니티 활동들을 이수해야 하는데, 종종 ‘왜 이것이 내 전공인 기술연마와 관련 있지?’ 하고 불만을 품기도 했고, 이를 시간 낭비라고 보는 교수진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예술계의 환경이 많이 변화했고 특히 예술가의 고용 형태 자체가 바뀌면서 학생들도 스스로 다양하게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학생들 중에는 학창시절 학교에서 접한 예술가의 영향으로 예술을 선택한 이들도 많아서, 스스로 사회적 환원을 원하기도 한다. 이는 섬세한 균형을 이뤄야 하는 부분으로 행정적으로 무조건 밀어붙여서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리더로서, 구현자로서, 매개자로서, 교육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리더에게 필요한 기술이라고 한다면 대인관계 기술이라든지 의사소통 기술, 공감 능력, 경청 능력, 상황에 대한 인지능력 등인데, 예술가들은 이미 이런 기술을 다 갖추고 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적용하는가 하는 문제다.
보편적으로 예술가 교육은 내적인 집중과 전문성교육을 강조해왔기에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처음 접할 때 예술가들은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예술가들이 “예술을 좋아하지만, 예술가를 꿈꾸지 않는(혹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려면 어떤 관점과 태도가 필요한가?
모든 예술가가 꼭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면에서 교육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학생들에게는 이런 활동이 의미 있다는 걸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예술가는 기본적으로는 기업가의 마인드를 갖는다. 꼭 돈을 번다는 의미보다는 창의적으로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 아이디어를 구현한다는 점에서는 예술가도 결국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 창의적인 마인드로 모든 영역에서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구현해야 한다.
최근 연구조사를 보면, 한국의 20대 젊은이들은 문화예술의 가장 중요한 소비계층이지만, 최근의 불황과 경기 여파로, 문화예술에 대한 지출을 더 줄일 것이라고 말한다. 바비칸센터에서는 ‘영 바비칸’이나 ‘프리 비(Free B) 등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경제적 부담이 없는 예술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 성과가 궁금하다. 그리고 무료 프로그램의 부작용에 대한 대안은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도 무료 티켓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똑같은 이유로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케팅부서와 협의해서 이제는 회원제로 운영한다. 무료로 ‘영 바비칸’에 회원 신청을 해야만 한정된 수량의 표를 5~10파운드에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성과가 있었고, 무엇보다 약 3만 명에 달하는 ‘영 바비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우리의 여러 프로그램이나 워크숍에 참여하며 스스로도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
개인적으로 무료 프로그램이나 축제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람료가 무료라고 해서 무조건 공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기획 측면에서는 카페, 상점, 티셔츠, 레스토랑 등 센터가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이 다각적이고 다양해지는 것뿐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지금의 젊은 관객들의 세태가 걱정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변화에 적응하는 기획자의 탄력성이 필요하다. 특히 전통적 예술 형태들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추출해서 새롭고 매력적인 방법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젊은 관객들을 계속해서 개발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최근의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매우 다이내믹한 상황을 겪으면서,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단어로 현재 상황을 지칭한다. 또한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젊은이들을 극장이나 예술, 인문학, 독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현대예술은 정의조차 어렵다. 우리가 어떻게 이 시니컬한 세대를 예술의 세계로 좀 더 다가가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들에게 살아있는 예술을 직접 만나고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는 예술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의미 있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자문할 필요가 있다.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은 연령을 뛰어넘는 글로벌한 문제다. 스마트폰보다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는 경험을 우리가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지 예술가들은 고심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다른 인간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으로 스포츠를 시청할 수 있어도 여전히 엄청난 돈을 들여가면서 농구, 축구 경기를 보러 간다. 예술도 마찬가지의 가능성을 지닌다. 전통과 혁신, 실제와 테크놀로지, 또 예술과 교육. 이것이 대립 항이 아님에도 우리는 나누고 고착화된 상태로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10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문제점은 어른들이 우리 세대에 느꼈던 것처럼 그냥 진화의 과정이라 인정해야 한다. 문화와 예술의 근본적인 특징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발견하는 정수와 핵심을 추출하여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다. 이 자체는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진부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남았다. 이번 해외전문가 초청워크숍에서 느낀 점이나 강조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창의성, 창작활동, 창의적인 사고를 통해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 워크숍에서 각자 배운 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미 하고 있는 활동에 긍정적으로 적용 하길 바란다. 만약 적용하지 않고 있다면 왜 그러한지 한번 자문해보면 좋겠다. 중요한 것은 결국 태도의 문제다. “워크숍에서 들은 내용은 다 좋지만, 내가 적용할 수는 없어.”라고 생각하지 말고 정말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을 확실하게 인지해야 한다. 혼자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파악하고 필요한 도움을 청하는 것도 중요한 책임감이다.
한국의 참가자들은 열성적이고 적극적이며 과정을 신뢰하고 위험을 감수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국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스스로 창의성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배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우리를 초청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와 창의성의 수준을 보면 매우 의미 있고 진보적이다. 이미 한국이 갖고 있는 창의성에 대해, 그리고 이루어낸 일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동서양은 이미 발전과 진보의 측면에서 위계가 없다.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션 그레고리(Sean Gregory)
작곡가이자 바비칸 학습‧참여부서 총괄디렉터. 창의학습(creative learning)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지역사회와 바비칸센터, 학교 등을 연결하는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다.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런던박물관 등 런던 주요 문화예술기관과 협력하며 아동청소년을 비롯한 런던 안팎의 문화교육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각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_ Studio E
- 제환정
-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강의전담교수. 국립현대무용단의 커뮤니티 프로그램 ‘무용학교’,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 무용도전’을 3년간 진행했다. 춤을 비롯해 춤추는 인간, 그리고 춤이 어떻게 인간사회에게 기여할지에 관심이 있다.
jaehj@kncd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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