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야 호) 가을이 오고 (에야 호) 여름이 가누나 (에 헤야 에야 호)”
“(에야 호) 사랑하는 가족과 (에야 호) 함께 해보세 (에 헤야 에야 호)”
대청마루에 모여 앉은 가족들이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이 돌아가며 메기는 소리를 하면 “에야 호” 받는 소리는 모두 함께 부른다. 잘 부르건 못 부르건 박수와 웃음이 터진다. 오늘 처음 만난 가족들이지만 마치 오랜 이웃인 것처럼 화기애애하게 노랫가락을 주고받으며 가을밤의 흥취는 깊어간다. 지난 가을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열린 문화예술 명예교사 ‘특별한 하루’에서 진행된 <재미있는 토속민요 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옛날 노래라고만 생각했던 민요가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의 노래로 재탄생한 것이다. 전통문화예술이 오늘의 삶과 일상, 공동체에게 주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이 프로그램을 이끈 최상일 문화예술 명예교사를 만났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는 라디오 시그널부터 정말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잘된 것만 골라 담은 것이 103장의 CD음반과 9권의 해설집으로 나왔다고 들었다. 이 방대한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
1987년쯤부터 특집 프로그램 기획으로 시작했다. 라디오 FM 음악 채널이다 보니 뭔가 색다른 소재, 흔치 않은 음원을 찾다가 토속민요를 취재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엔 시시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결재가 잘 안 났는데, 89년이 되니까 방송국 내부에서도 뭔가 해봐야겠다는 분위기가 되었다. 방송국 사람의 감각으로는 찾으면 뭔가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대중의 느낌을 중요시하는 방송국 사람들이 이 아이템이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는 것은 전통문화를 되돌아보는 시대가, 때가 되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80년대 후반은 너무 급히 달려온 산업화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시기가 아니었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여러 각도에서 이 프로젝트를 평가하게 된다. 개인적인 동기도 분명히 있었고, 방송국 차원에서나 사회적으로도 적절한 시기에 다행스럽게 그 일이 이뤄졌다.
개인적인 동기도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경기도 여주에 살았다. 전통문화의 끝자락에서 꽤 많은 것을 경험했다. 집 앞으로 상여가 지나가는 것도 봤고, 아버님은 정월 대보름 되면 윷놀이하면서 며칠씩 풍물을 치고 했다. 뱃놀이를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따라 온종일 배 타고 노래하며 놀기도 했다. 그때 들었던 것이 <배따라기> 같은 통속민요(전문 예능인이 민요를 통속화·대중화하여 부른 노래)다. 아버님이 갖고 계셨던 LP 음반 중 절반은 가요, 절반은 전통음악, 민요가 차지했다. 전통음악을 알게 모르게 꽤 듣고 자란 마지막 세대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음악 PD를 하다 보니 특집 기획이나 프로젝트를 만들 때 당연히 그쪽으로 관심이 갔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랄까. 삶에 균형이 없고 과거의 문화유산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쉬웠고 문제의식으로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이전에도 민요를 수집한 사례가 있었나? 방송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프로젝트였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선구자들이 있었다. 대규모로는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최초지만, 그전에 국문학과를 중심으로 교수님들이 그 지역의 민요 취재를 해 놓은 게 있었다. 권오성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와 이해식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도 한국방송(KBS)에서 PD로 활동하며 민요를 취재했다. 이분들을 만나보고 자문도 얻으면서 제대로 한번 해보자 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한국구비문학대계』를 냈다. 구비문학이라 하면 설화, 민요 등이 다 들어간다. 그렇지만 민요를 문학으로 접근하는 것과 음악으로 접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문자만으로는 민요의 본질을 나타낼 수가 없다. 한창기 선생이 만든 한국브리태니커에서 무형문화재 분들이 부른 토속민요를 LP로 만들어낸 것도 도움이 되었는데, 나는 숨어있는 걸 찾아내려고 했다. 조직과 장비, 인력, 매체, 예산이 있는 방송국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술적으로 녹음도 잘하고,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도 있고, 매체로서 방송도 한다. 해설도 해줄 수 있고, 대중적으로 확산하기에도 좋다. 그때 문화방송(MBC) 라디오 청취율이 최고였다. 1분짜리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채널이 좋았기도 했지만, 라디오라는 매체의 특성을 고려하여 짧게 자주 방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TV라면 현장을 영상으로 찍는 데 한계가 있었을 거다. 내가 라디오 PD가 된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일, 라디오 PD가 전통문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민요가 내가 라디오 PD가 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웃음)
수십 년간 우리 소리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셨다. 지금까지 토속민요를 수집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을 놓지 못하게 하는 민요의 매력은 무엇인가?
민요를 따라가다 보면 다양하고 소박하고 민중 문화가 줄줄이 달려 나온다. 지역적으로도 다르지만, 하나의 종류라도 곡조, 가사가 다 다르고, 산만 하나 넘어가도 또 달라지는 다양성이 있었다. 샅샅이 다 건져내야만 민요의 면모가 전부 드러나니 그때까지 무조건 하는 거다. 수집하는 재미가 그런 거지. 어떻게든 완벽하게 수집하려는 직업적 의식이 있었다. 민요는 옛 촌락공동체 속에서 만들어진 노래라서 그 안에 공동체 사회의 면모와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전통 공동체 문화의 가장 뚜렷한 증거가 ‘민요’라는 생각이다. 다른 방법으로도 탐구할 수 있지만, 민요, 특히 토속민요를 통하면 굉장히 쉽고 풍부한 콘텐츠가 되기 때문에 가장 적합하고 중요한 유산이다. 민요 프로젝트 끝나고 혼자라도 계속하려는 게 ‘민속기행’인데, 그걸 하게 된 이유도 민요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배경이 되었던 전통 공동체 문화가 궁금해져서다. 그때가 어땠기에 이런 좋은 노래가 쏟아져 나왔을까 하는 그 시대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혼자 몇 년을 돌아다닌 거다. 토박이 노인네들을 만나서 도대체 그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고, 뭘 해 먹고, 무슨 재미로 살았나 물었다. 이게 놀이와 문화지. 내가 이 일을 끝까지 할 수 있었던 매력은 바로 그런 거다.
집필하신 『우리 소리를 찾아서』에서 풍물이나 민요가 우리 공동체 문화의 핵심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사람 사는 멋과 재미를 더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요즘은 공동체적 삶이 사라져가는 것뿐 아니라 가족 간의 소통도 턱없이 부족하다고들 한다.
무너져버린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살만한 사회된다. 자살률 높고 사람들이 떠나고 그러는 것은 살만한 사회가 못 된다는 거 아닌가. 같이 살긴 하는데 그 속에 공동체성이 없다. 재미도 없고, 왜 사는지 모르겠고,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상호부조 개념이 없어진다. 그래선 안 된다. 옛날에도 빈부격차가 있었지만, 그래도 다 같이 살 만큼 어떤 장치랄까 문화가 있었던 거다. 결국, 전통문화를 탐구해야 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전통사회에서는 풍부하게 남아있었던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먼저 공동체 정신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끄집어낼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문화적으로는 어떻게 표현되었나를 연구하고 기록하고 탐구해야 한다. 그럴 때 좋은 소재가 음악, 문학, 그림, 풍속 같은 전통문화유산이다.
이렇게 개인화‧개별화되어가는 삶에서 가족과 일상,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민요 혹은 전통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민요가 오늘의 우리 삶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쉽진 않다. 누군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회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니까. 전통문화 속의 공동체 정신을 탐구한 후에 그것을 현대에 어떻게 적용해서 살려 나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방면으로 정말 창의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요즘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이 마을도서관, 공동육아, 축제, 마을 만들기 같은 것을 많이 하지 않나. 사람 살만한 동네를 만드는 것, 결국은 공동체성을 살리는 거다. ‘생활 속 민요 다시 부르기 운동’도 해보고 싶다. 예를 들어 <축제>(임권택 감독, 1996)라는 영화를 보면 발인(發靷) 전날 밤에 마당을 돌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상여 메고 나갈 때, 봉분 만들 때 부르는 노래도 많다. ‘호상 놀이 노래’라고 상여 나가기 전에도 밤새우면서 불렀다. 이런 것을 응용하면 문상을 가서 그냥 밥만 먹고 올 게 아니라 명복도 빌고 가족도 위로할 수 있게 다 같이 한 번씩들 부르면 좋잖나. 이런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누군가 실제로 해야지.(웃음)
농업전문대학교 학생들이 옛날 모심기를 재현하면서 어떤 민요를 부르는 게 좋을지 물어보기에 이왕이면 그 동네 민요를 부르도록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런 시도를 해보면서 옛사람들의 흥취를 느끼고 ‘노동요’라는 것이 주는 느낌을 체험하는 거다. 공동체 정신이 살아난다고 해도 옛날 노래 그대로는 안 되지 않나. 새로운 민요를 만들어야 한다. 꼭 민요가 아니라도 자기들 노랠 부르면 된다. 학교, 군대, 회사도 공동체이고, 교가나 군가도 공동체의 노래다. 누가 작곡한 노래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만들어나가면 그건 새로운 민요가 되는 거다. 음악적으로는 전통 민요를 발전시켜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새로운 음악을 창작할 때 민요를 소재로 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아이템인데 안타깝게도 창작하는 사람들이 잘 못 써먹는다.
재미있고 좋은 아이템이지만, 여전히 편견도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세대별로 다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우리 아버지 세대는 조선의 풍속을 다 없애버리고 빨리 적응해야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분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전통문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싫어하게끔 된 것이다. 우리 세대는 그분들과는 좀 다르지만, 이전 세대가 만들어놓은 교육이나 대중매체 속에서 자라다 보니 보고 들은 게 별로 없다. 게다가 팝송이 들어오고 서양음악이 판을 주도하니 전통음악은 슬슬 없어지는 거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김세레나, 김부자, 김상국, 하춘화 같은 신민요의 전통이 있었고 히트곡도 많았지만 그나마 70년대 중반 이후 맥이 끊어졌다. 지금은 또 다른 세대다. 발전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우리 역사나 전통문화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고, 민요를 다시 새로운 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교육과정에서도 국악, 민요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같은 전통문화지만 받아들이는 것에서도 세대 차이가 난다. 감각이 전혀 다르다. 지금 세대는 전통문화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없기 때문에 잘만하면 좀 더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창작하고 경험을 쌓는 게 필요하다.
문화예술 명예교사 ‘특별한 하루’에서 가족들을 대상으로 <재미있는 토속민요 이야기>를 진행하셨다. 민요의 맛과 멋을 강의로 설명해주신 뒤 아이들이 직접 민요를 지어 불러보게 하신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뭔가 시키는 걸 좋아한다고 하더라.(웃음) 늘 혼자 마이크만 놓고 방송을 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게 교육적인 효과가 높은 것 같다. 민요가 마침 열린 구조로 되어 있어서 애들에게 뭘 시키기 딱 좋다. 보통 토속민요는 시작도 끝도 없다. 맘만 먹으면 온종일도 할 수 있다. 메기는 소리만 해주면 후렴은 계속 받아간다거나, 돌림노래처럼 계속 비슷한 곡조에 노래가사만 바꿔서 한다든가. 어려운 곡조면 못 부르지만 쉬운 뱃노래는 얼마든지 부를 수 있다. 말꼬리 잇기처럼 ‘도토리는 동그랗다’ 하나 줬더니 ‘동그라면……’ 하면서 그 자리에서 막 쓰더라. 아이들도 좋아하고 나도 재미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반응이 빠르다. 특히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토속민요가 많이 들어있어서 아이들이 민요를 제일 많이 안다.
요즘은 음악 시간에 국악과 민요를 꽤 다룬다고 들었지만, 아이들이 민요를 접하고 배우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옛날에 아이들이 노래를 배우는 방식은 어땠나?
할머니들이 어떻게 노래를 배웠냐 하면, 엄마들 틈에 끼어서 일 배우면서 노래도 배웠다고 한다. 몇 시간씩 길쌈을 하면 심심하니까 재잘대고, 얘깃거리가 난무하고, 간식도 먹고, 노래가 나오는 거다. 아이들이 어른들 틈에 끼어서 일을 배우면서 바로 어른들 노래를 배워버린다. 아이들 문화가 따로 있지 않았다. 옛날에는 가족끼리 노는 문화는 별로 없었다. 그때는 가족 단위보다는 동네 단위로, 두레나 품앗이하면서 모여서 농사짓고, 잔치가 열려도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하거든. 이웃 간에 넘나들고 다 그렇게 컸던 거다. 지금은 가족이 최고라고 하지만, 가족이 너무 강조되면 공동체가 이뤄지기 어렵다. 이웃 간에 소통도 안 되고 더 큰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난 가족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족이 중요하지만, 굳이 중요성을 강조해서 거기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는 거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할머니가 ‘자장자장’ 불러주시던 것이 토속민요인가보다.
애들 키울 때는 아이 어르는 소리로 ‘둥개둥개’도 하고 ‘들강달강’도 하고……. 자장가 이야기를 하려면 거품 물고 얘기해야 한다.(웃음)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자장가는 알면서 우리 자장가는 너무 부르기 쉬운데도 불러주지 않는다. 아기 재울 때는 전통 자장가가 최고다. ‘자장자장 우리애기 잘도잔다 우리애기’만 반복해도 된다. 가사만 4‧4조로 붙이면 된다. 우리 민요의 음수율은 4‧4조가 기본이다. 라디오에서 청취자들에게 만들어보라면 곧잘 만든다. ‘우리남편 보기싫다 술만먹고 잠만자네’ 이런 식으로.(웃음) 우리 언어구조가 4‧4조와 잘 어울리고 만들어 부르는 재미가 있거든. 게다가 리듬이 토닥토닥, 2/4박자, 심장 박동과 같다.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 엄마 심장 소리가 쾅쾅 울린다고 한다. 엄마가 안고 토닥토닥해주면 태아 때 듣던 심장 소리와 같다는 거지. 아이 재우는 게 목적이면 그보다 좋은 노래가 없다.
작년에 개인적으로 민요를 배운 적이 있다. 마음만큼 따라 부르기가 쉽진 않았다.(웃음)
늴리리야, 태평가, 수심가 같은 통속민요는 공연용으로 만든 세련된 음악이기 때문에 부르기가 쉽지 않다. 내가 말하는 민요는 토속민요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부르던 거라 어렵지 않다. 그런데 토속민요 공연을 본 적 있나? 아직도 토속민요를 어려워하고 낯설어하고 예술성이 없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방송을 했는데도 아직 멀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막상 토속민요를 활용해야할 사람들이 안 하거나 못하는 거다. [아르떼365] 독자들은 예술교육이나 창작활동을 많이 하실 텐데, 이런 분들이 그 역할을 해줘야 한다. 민요가 가진 고향의 느낌, 소박한 민중의 정서, 공동체 정신을 대중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걸 활용해서 공연이나 교육을 하는 것은 예술가, 창작자, 교육자들이 해야 한다. 활용 단계에 가면 공부를 좀 해야 한다. 가사도 짧게 시적으로 표현되어있기 때문에 배경을 모르면 이해가 안 된다. 그러고 나면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훨씬 깊이 있게 흥미롭게 가르칠 수 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아르떼365] 독자 중에는 전통문화에 편견이 없는 요즘 세대들과 문화예술로 소통하는 분들이 많다. 독자들께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분야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교육은 참 중요하다. 전통문화가 어떤 배경에서 이렇게 이뤄졌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하면서 가르치면 좋겠다. 단편적으로 민요면 민요, 악곡 하나만 가지고 얘기하면 금방 끝나고 단순하다. 가사도 음미하고 사회적 배경 같은 것도 탐구해서 연관된 전통문화를 폭넓게 가르치면 좋겠다. 그래야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노래 따로 그림 따로, 따로따로 하면 종합하는 능력이 부족할 수 있고 효과가 작다. 종합적 시각을 가지면 가르치는 분들도 재미있을 거다. 나는 민요를 설명할 때 김홍도, 신윤복, 김준근, 김득신 같은 분들의 풍속화를 활용한다. 풍속화는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다. 그걸 음악의 현장으로도 설명해줄 수 있다. 난 그 속에서 민요가 막 들린다.(웃음) ‘디딜방아 찧는 소리’를 설명하려면 디딜방아의 원리도 알아야 하고 어떤 역할에 몇 사람이 필요한지도 알아야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통문화에 파고들게 되어 있다. 그 재미를 느끼고 공부하면 아이들과 나눌 얘기가 풍부해지고 아이들도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공부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을 섭렵할 필요가 있다.
강연이나 저술활동 외에도 홈페이지, 소셜네트워크(SNS) 등을 통해 민요를 기록하고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을 오래 하셨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그동안 민요 관련한 일을 많이 했지만, 책을 한두 권 더 내고 싶다. 그동안 민요 소리꾼들 인터뷰를 많이 해 놨다. 그분들의 생애를 인터뷰해놓고 나만 알고 지나가기엔 아깝다. 또 민요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종합적이고 이론적인 연구를 담은 책도 하나 쓰고 싶다. 그리고 민요에 나오는 특이한 용어들, 관용어, 또 전통사회에서 많이 쓰던 용어지만 지금은 전혀 안 쓰는 용어 등을 담은 ‘민요사전’ 작업도 두고두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많이 못 다녔던 섬 같은 곳을 찾아 인터뷰를 더 해봤으면 좋겠다.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최근엔 틈나는 대로 다른 나라 민속 음악도 수집하고 있는데, 더 열심히 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하다 보니 언어 소통도 어렵고, 시간‧비용도 많이 들고, 방법론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그렇지만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세계 전통음악을 섭렵하고 기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유네스코 산하 아태무형유산센터가 그런 일을 하고 있긴 한데, 거기도 소규모 조직이라 크게 일을 못 벌인다.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우리의 전철을 밟고 있는데, 그 와중에 자기네 전통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 전통문화를 기록하는 작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그동안 쌓은 경험이 거기에 활용될 수 있길 바라지만, 혼자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지 않을까 싶다. 주변을 보면 확실히 때가 오고 있다는 느낌이 온다. 요즘은 민요가 아니라 세계전통음악에 대해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많아졌다. 내가 충분히 준비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역할이 그거라면 할 수밖에 없다. 공부를 많이 해야지. 그래도 요샌 공부하긴 좋다. 인터넷을 비롯해 정보가 넘치니까. 목디스크만 조심하면 된다.
최상일
최상일

1981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하여 2015년까지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다니며 이 땅에 사라져가는 수많은 토속민요를 취재하고 소개했다. 『우리 소리를 찾아서 1, 2』(2002), 『백두대간 민속기행 1, 2』(2009), 『어야디야차 우리 소리에 풍덩실 빠져보자』(2014) 등 다수의 저서와 음반을 펴냈고, 1991년 특집프로그램 <풍물굿>으로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ABU) 방송문화상’, 1995년 <한국민요대전> 프로젝트로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립국악원, 서울시 민요박물관 건립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초빙교수와 국악방송 <세계의 전통음악> 진행과 연출도 맡고 있다. 올해는 문화예술 명예교사로서 어린이와 가족이 함께하는 ‘특별한 하루’도 보내고 있다.
MBC 한국민요대전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홈페이지와 우리소리연구소 블로그, 페이스북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 _ 마루스튜디오
남은정
남은정 _ 상상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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