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심여자산업고등학교(법무부 안양소년원, 이하 정심여고)의 굳게 닫힌 철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방문 목적과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덕분에 조금 긴장한 채 작은 언덕에 오르자 붉은 얼굴로 만개한 꽃들로 아름다운 교정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녀들의 웃음소리와 어우러져 여느 여고의 풍경과 다를 바 없이 평화로우면서도 활기 넘쳤다.
정심여고는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관악대, 골프 등 총 7개의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 중 스무 명 남짓한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극동아리에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부처 간 협력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극단 진일보(대표 김경익)의 ‘연극놀이를 통한 창작 뮤지컬 교육’을 진행 중에 있다. 극단 진일보는 연극놀이뿐만 아니라, 미디어 교육, 창작 뮤지컬 제작 등 입체적 문화예술교육으로 자존감이 낮아져 있는 소녀들에게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자긍심을 함양시키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접근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불편함으로부터 해방되는 법
필자가 방문한 날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라는 주제 아래 아이들이 직접 써내려간 대본 중 재판을 다룬 이야기를 선정하여 함께 읽고 역할을 나누어 연극을 만들기로 한 날이다. 소녀들은 처음 대본 리딩을 시작할 때와 달리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더니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연신 ‘아, 나도 하고 싶다.’라거나 다른 친구들이 대사를 읽을 때 따라 하는 등의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대본의 역할을 서로 바꿔 읽어보면서 등장인물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했을지 생각해보고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통해 상대와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살펴보는 방법에 대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대본 리딩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연극을 만들기 위해 역할을 나누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어떻게 대사를 읽을까,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무대는 어떻게 구성될까 고민하면서 대사를 읽을 때보다 적극성을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대사를 주고받을 때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감정을 이입하여 때로는 격양되고 때로는 호소하며 아주 진지하게 연기를 이어갔다. 저마다 조금씩 내용은 다르지만, 재판을 경험했고 이것을 극이라는 형태로 다시 만나 이야기할 때, 가해자가 아닌 다른 역들(판사, 변호사, 피해자, 가해자 엄마 등)을 맡으면서 아이들이 어떻게 이 연극을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자못 궁금해졌다. 짧은 연극이 끝나고 김경익 강사가 아이들에게 각자 맡은 역할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았을 때 어떻게 느껴졌는지 질문을 건네자, 각 인물마다 사건이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점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했다. 재판을 받을 당시에 밉게만 보이던 판사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았다며 수긍하기도 하고, 가해자의 철없는 행동에 대해 비난하기도 했다. 이어 강사는 이 이야기를 인물들이 아닌 제3자, 관객의 입장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자고 제안했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인물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물었다. 아이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하루라도, 한 순간이라도 무언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없는 날이 과연 있었을까.” 반문하듯 이어지는 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그제야 이 연극의 궁극적인 목표를 깨달았다.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를 객관화하여 바라보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진짜 나를 위한 최선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다. 김경익 강사는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상대와 나, 그리고 우리들이 마주하는 불편한 상황들을 스스로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접근하고 있었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 시절, 사회의 편견과 어른들의 이기로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앞세운 강압적인 훈계 혹은 교육은 세게 던지면 더 세게 튕겨져 나가는 고무공처럼 아이들을 튕겨져 나가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억눌린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기
벌써 2년 째 연극반을 하고 있다는 세린(가명)이는 “처음에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 생각했는데 요즘은 하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더 열심히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원래 자신감이 없었고 주변에서 나를 향한 편견으로 안 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나무의 나이테는 인고의 세월을 겪을수록 예쁜 모양이 된다는 이야기를 강사 선생님께 듣고 나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지은(가명)이는 연극반을 선택하게 된 이유에 대해 “여기 온 친구들은 다 각자 마음이 아픈 부분이 있을 거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쟤는 범죄 저지른 애라며 무시하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했었는데, 뮤지컬을 통해서 쟤는 소년원 출신이라 안 된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아이 모두 연극반을 하면서 달라진 점에 대해 “서로 어색하고 눈치 보는 게 있었는데 이제는 의견충돌이 있을 때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려고 노력하고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연극반을 하며 가장 좋은 점은 “무엇보다 내 몸으로 무언가 표현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기대된다. 몸으로 표현하다보면 어떤 감정들이 내 안에서 생겨나면서 사이다처럼 시원해지는 것을 느낀다. 무엇보다 강사 선생님의 격려, 관심, 응원을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우리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귀 기울여주시고 때로는 아빠처럼, 삼촌처럼, 오빠처럼 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전했다. 인터뷰를 통해 지금까지 아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의 부재가 느껴졌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위축되고 억눌린 감정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 것 같아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여는 신뢰의 글쓰기, 프리덤 노트
유리장처럼 위태로운 소녀들의 마음에 문을 열고 무슨 말이든 터놓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된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극단 진일보의 대표이자 주강사 김경익은 “마음을 열고 무언가 시도해야만 변화가 생기는 연극이라는 과정에서, 움츠러들어 있는 아이들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끌어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그러려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줘야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4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수업 시간을 이용하는 대신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적어달라고 했다. ‘프리덤 노트’라고 이름붙인 공책에 아이들의 쓴 글 하나하나마다 시행착오와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방법들에 대한 장문의 댓글을 적어주었다. 처음엔 숙제처럼 대했던 아이들은 자신이 써놓은 댓글을 보며 선생이라는 존재를 소통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다시 선순환 되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칭찬받으면서 굳게 잠겨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김경익 강사는 평범한 학생들보다 소년원 학생들의 비자발성이 특히 심각한 이유를 신뢰의 상실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존감이 낮아서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어른들에 의해 ‘신뢰’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신뢰를 쌓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프리덤 노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2년째 정심여고에서 연극 수업을 하고 있는 강사의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느껴졌다.
‘나’를 마주하는 예술교육, 시스템의 변화 필요
김경익 강사는 청소년들 특히 소년원에서 연극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어떠한 좌절을 맛본 사람에게 연극을 통해 ‘나’를 다시 발견하는 일은 너무 중요하다. 특히, 감정의 격한 변화를 겪는 청소년 시기에 어떤 배역을 맡아 그 인생을 대신 살아보면서, 지금 네가 겪고 있는 너는 원래의 네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너’라는 사람이 원래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얼마나 가능성이 많은 사람인지, 진짜 ‘나’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세상에 나가 진짜 아름다운 ‘나’를 드러내며 살 수 있을 것”이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날 필요가 있고, 소년원이라는 특수한 조건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교육 전후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아카이빙 하는 일을 통해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영역을 넓혀야한다고 강조했다.
  • 김경익 강사
  • 이지영 교사
인생이라는 예술에 새로운 안목을 제공하는 연극
작년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계신 정심여고의 연극반 담당 선생님께서는 연극반을 통해 얻은 자신감이 개인의 생활에서도 나타나기도 한다면서, 마음을 나누고 만지고 접촉하면서 눈빛이 순화되고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론 위주의 교육보다 연극 프로그램은 현장감이 있어 아이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닿아있고, 장면을 새롭게 해석하고 역할을 바꿔 생각해보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에게 새로운 안목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인생이 예술이잖아요.”라고 말씀하시고는 밝게 웃으셨다.
인터뷰를 마치고 정심여고를 빠져나오면서 굳게 닫혀있던 철문은 소년원 문이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5월 한때의 꽃처럼 수줍으면서도 생기 있고, 여려 보이면서도 강인함이 숨어있는 이 아름다운 소녀들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혹독할지 모를 사회의 편견과 이기로부터 아름다운 ‘나’를 지키기 위해 애쓰며, 지혜롭고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기를 열렬히 응원한다.
부처 간 협력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문화예술을 접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이들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케 하여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예술에 대한 거리감을 좁히고, 사회성과 자존감 등을 회복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여러 정부부처 및 산하기관과 협력하여 다채로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05년 국방부와 법무부 2개 부처, 8개 시설에서 시작되었고, 2015년에는 산업통상자원부, 여성가족부, 경찰청, 통일부 등 총 8개 부처, 1,160개의 시설에서 1,236개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올해는 1,196개의 시설에서 1,277개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송경화
송경화
2004년 극단 목화에서 배우로 연극을 시작했으며, 2009년 낭만유랑단을 창단하여 대표, 연출, 작가, 배우를 겸하고 있다. 2015년 「프라메이드」로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layair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