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철학자 랑시에르가 쓴 『무지한 스승』(1987년, 한국어판 2008년 출간)의 핵심 문장이다. 랑시에르는 자신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스승을 ‘무지한 스승’이라 부르는데, 그 구체적인 인물로 19세기 교육자 조제프 자코토(1770-1840)의 교육 경험을 예로 든다. “1818년에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무지한 스승』은 “창시자는 그것을 이미 예언했었다. 보편적 가르침을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사실 덧붙였다.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철학자 랑시에르가 쓴 『무지한 스승』(1987년, 한국어판 2008년 출간)의 핵심 문장이다. 랑시에르는 자신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스승을 ‘무지한 스승’이라 부르는데, 그 구체적인 인물로 19세기 교육자 조제프 자코토(1770-1840)의 교육 경험을 예로 든다. “1818년에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무지한 스승』은 “창시자는 그것을 이미 예언했었다. 보편적 가르침을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사실 덧붙였다.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랑시에르는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 경험을 철학적으로 복기(復碁)하며 지적 해방을 위한 ‘보편적 가르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네덜란드로 망명한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작문과 문법을 가르쳐야 했다. 그 무렵 페늘롱이 쓴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이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으로 출간되어 그 텍스트를 바탕으로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감행했다. 그것은 ‘설명’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코토의 학생들은 설명의 도움 없이도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스스로 익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네덜란드 학생들이 구사하는 문장은 초등학생 수준이 아니라 작가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랑시에르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의 지적 능력이 똑같고, 자신의 지능을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랑시에르가 “설명의 논리는 무한 퇴행의 원리를 내포한다.”고 힐난하며,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설명의 원리는 ‘바보 만들기’의 원리와 같다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자코토의 경험을 통해 모든 지능의 발현이 내포하는 본성적 평등을 의식하는 것을 지적 해방이라고 명명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자코토의 지적 실험은 계속된다. 그는 전혀 할 줄 몰랐던 회화와 피아노 두 과목을 가르쳤던 것이다.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학생들은 비좁은 강의실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라는 자코토의 말을 들으려고.
랑시에르가 전하는 자코토가 행한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는 무엇인가. 가르치는 자 자신이 먼저 해방되라는 것, 그런 후에 다른 사람을 도우라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경험을 통해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고 풀이한다. “무언가를 배우라, 그리고 그것을 이 원리,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pp.41-42) 다시 말해 진정한 가르침은 지식의 전달 차원이 아니라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과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자코토의 이러한 확고한 교육철학은 인간에 대한 고유한 관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인간은 말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한다.”고 말한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교육의 목적은 가르침(teaching)이라는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에 어떤 심각한 균열을 내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그런 습관적인 가르침이야말로 ‘바보 만들기’라는 교육체제에 일조하는 것은 아닐지 한 번쯤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이 진짜 가르침인가’이고, ‘우리의 가르침이 학생들의 배움(learning)을 지적 해방으로 이끌고 있는가’여야 한다. 당신이 만나는 수강생이 누구든 간에 지적 능력의 평등을 옹호하는 랑시에르의 교육철학적 접근법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이러한 랑시에르의 교육철학은 자신의 박사논문을 출판한 『프롤레타리아들의 밤』(1981)에서 확인된 바 있다. 1830년대에서 1850년대 프랑스 노동자운동 관련 자료를 검토하며 랑시에르는 ‘지능의 평등’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지한 스승』은 단순한 교육방법론에 관한 책이 결코 아니다. 한 인간만이 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교육철학을 자코토의 경험에 덧붙여 역설하는 책이다. 교육의 목적은 가르침(teaching)이 아니라 배움(learning)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점에서 더글라스 토마스와 존 실리 브라운이 집필한 『공부하는 사람들』(2011년, 한국어판 2013년)은 ‘어떻게 배울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놀이하듯 공부하는 새로운 공부문화를 탐사한 흥미 있는 책이다.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게임(MMOG)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예를 통해 ‘명시적 지식’의 지배체제에서 묵살당해온 ‘암묵적 지식’(암묵지)의 의미를 복원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 저자들의 핵심 주장은 “학생들은 자신의 열정을 따르고 주어진 환경의 제약 안에서 움직일 때 가장 잘 배운다.”(p.109)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논지에 따라 저자들은 새로운 공부문화의 핵심 원리는 놀이와 상상력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교육자 혹은 예술강사들은 한목소리로 ‘교수법’에 관한 새로운 방법론을 찾고자 갈망한다. 그러나 교수법이란 결국 교육의 목적이 교육자의 가르침(teaching)에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부문화의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수강생들의 배움(learning)에 응답하려는 교육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금 여기의 문화예술교육은 명시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 안의 ‘암묵적 지식’을 강화하며 수강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무지한 스승’들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제프 자코토의 아들이 쓴 기록에 의하면, 페르-라셰즈 묘지에 있는 자코토의 무덤에는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새겼다고 한다. “나는 신이 혼자서 스승 없이 스스로를 지도할 수 있는 인간 영혼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지적 해방을 위한 보편적 가르침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지 제공 _ 궁리출판, 라이팅하우스
- 고영직
- 문학평론가. 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자치와 상상력』(공저)이라는 책을 펴냈다.
- gohy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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