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감상하듯 영화를 거듭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 필요

현대가 이미지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미지의 독해력은 문맹률을 조금 더 벗어난 정도라고 생각한다. 사춘기 시절부터 시와 소설을 수업시간에 공부하듯이 이미지에 관한 교육이 이뤄지면 좋을 것이다. 그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이라는 걸 안다. 그렇다면 대학에 와서야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영화가 거듭 볼 수 있는 텍스트이자 다른 문화 분야와 지속적으로 섞이는 이미지의 핵심 센터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는 수밖에 없다.

일본의 문학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생기면서 문학의 시대가 끝났다고 했다. 한 작가의 삶의 프리즘으로 걸러낸 문학보다는, 학습된 기량으로 요령껏 스토리를 다루는 작가들의 손에 좌우되면서 문학이 쩨쩨해졌다는 것이다. 비슷한 얘기를 영화에도 할 수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에 영화과나 영상을 다루는 학과는 차고 넘친다. 영화산업이 불황에 빠진 요즘 이 과의 학생들은 졸업하자마자 실업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만한 각오를 하고 영화과에 입학하는 젊은이들이 많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대개는 박찬욱·봉준호 감독처럼 돈과 명예를 동시에 얻는 유명 인사를 꿈꾸며 영화과의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기소개 시간에 가끔 “저는 천 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를 기필코 만들어내겠습니다.”라는 따위의 치기어린 발언을 하는 입학생들을 보게 된다. 헛웃음이 나오지만 어쩔 수 없다. 젊은 시절이란 다 그런 것 아닌가. 문제는 그런 자기 환상에서 깨어나 자신들을 단련시키기에 대학 4년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다른 예술분야와는 달리 영화과 지망 학생들은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로 대학에 들어온다. 음악이나 미술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 분야의 지망생들도 적지 않은 습작을 거친 상태에서 나름 체계적인 대학교육을 받게 된다. 영화과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홈 무비나 UCC가 대세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펜으로 일기를 쓰듯이 카메라를 실컷 다룬 학생들은 희귀하다. 그때부터 선생들은 이미지를 만만하게 보는 학생들의 눈을 바로잡으려 노력한다.이미지의 독해력, 문맹률 벗어난 정도내 경우에는 영화사나 기초적인 영화미학을 다루는 저학년 대상 강의에서 간단한 이론적 개요를 가르치는 것 말고는 주로 영화를 보여주고 뭐가 보이는지 묻는다. 학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일반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젊은 학생들도 저마다 좋아하는 영화의 취향이 있고 그만큼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1학년생들이 만든 실습작품을 공개하는 시간에 보면 가관이다. 학예회에 온 것처럼 왁자지껄하고 저마다 자신과 친구들이 만든 영화가 흐뭇해서 어쩔 줄 모른다. 교수가 이런 저런 지적을 하면 잔뜩 위축되지만 근본적으로 말귀를 알아듣는 학생은 한 학년 단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영화가 스토리를 다루는 매체인 것은 맞지만 근본적으로 이미지를 다루는 매체라는 건 대개 무시되곤 한다. 영화가 그림처럼 작가가 그려낸 현실이라는 전제에 여전히 동의하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 영화는 그저 재미있는 스토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스토리를 만들어내는데 이미지의 구성력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지각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현대가 이미지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미지의 독해력은 문맹률을 조금 더 벗어난 정도라고 생각한다. 텔레비전 광고를 비롯해 무작위로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에 묻혀있지만 그런 이미지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대학에서부터 교육한다는 것은 너무 늦는다. 시를 감상하듯이 영화를 거듭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인정되지 않으면 제도권 교육에서 영화를 가르친다는 것은 가까운 미래에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미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생들은 물론 있다. 그들은 대학 1학년 때 수업시간에 명작이라고 강조해서 하는 수 없이 봤던 영화들을 어떤 계기로 다시 보면서 왜 그 영화들이 훌륭한지를 뒤늦게 깨닫는다. 대개 대학 3학년 쯤 올라가면 그렇게 깨달음을 얻는 학생들이 나오는데 그 뒤로 곧바로 너무 늦게 안 것은 아닐까 초조해한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분명 미래가 있을 것이다.대학교육, 이미지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이 왕도어른들이 형성한 질서에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적응한다. 지난 10년간 한국영화계는 굉장한 산업적 성장세를 이뤘지만 거품이 빠진 후에 남는 것은 흥행영화와 비흥행영화로 구분되는 잔인한 상품질서의 속성뿐이다. 누구나 돈이 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흥행이 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로 영화문화의 속살을 나눈다. 전반적으로 영화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진 상황에서 영화에 대한 교양은 와인에 대한 교양보다 못 한 것이 되었다. 결국 대학교육에서는 일반 극장에서 보지 못하는 영화들을 꾸준히 보여주고 토론하는 길이 왕도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영악하지만 진정한 프로가 되는 길, 혹은 좋은 관객이 되는 길에 대해서는 서투르다. 21세기의 영화는 20세기의 영화와 분명히 다를 것이다. 거대한 스튜디오에서 고난이도의 기술적 숙련도를 갖추고 대형영화를 찍는 시대에서 이제는 가벼운 장비로도 장편영화를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시대를 맞이한 지 오래다. 누구나 일기를 쓰듯이 의지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거기에는 20세기의 영화와는 다른 기운이 존재할 것이다. 훨씬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동시에 기존 영화에서 다루지 못했던 현실의 조각들이 영화의 일부로 들어올 것이다.그럴수록 20세기의 영화가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영화학이라는 분야가 없었던 초기에 오로지 삶에 맞서서 카메라를 연출했던 거장들의 영화는 지금 봐도 여전히 경이적이다. 그들의 영화에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화면의 신비가 있었다. 모나리자의 미소와 같은 그런 신비한 기운은 디지털 시대에 성취하기 힘든 것이다. 영화는 훨씬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그런 만큼 쉬운 예술이 될 가능성이 더 넓어졌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 모순의 역설 속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영화교육은 그런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한 쪽에는 너무 고답적인 선생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너무 세속화된 학생들이 있다. 역시 이 간극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사춘기 시절부터 시와 소설을 수업시간에 공부하듯이 이미지에 관한 교육이 이뤄지면 좋을 것이다. 그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이라는 걸 안다. 그렇다면 대학에 와서야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영화가 거듭 볼 수 있는 텍스트이자 다른 문화 분야와 지속적으로 섞이는 이미지의 핵심 센터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솔직히 잘 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신이 없다. 애나 어른이나 이미지는 그저 한 순간에 소비하고 마는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다. 그것부터 시정되지 않으면 영상시대라는 건 한갓 쓸데없는 구호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