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출장으로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를 찾아갔을 때 일이다. 오전 10시. 입장을 기다리는 긴 줄에 나도 서 있었다. 내 뒤에는 부부가 두 아이와 함께 서 있었는데 그들 의 대화가 내 귀에 흘러 들어왔다. 한국어였다. “아빠 나 여기서 몇 개까지 살 수 있어?” 아이는 아마도 지브리 스튜디오에 딸린 아트샵에서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브리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온갖 캐릭터들이 그 또래 아이들은 물론 나 같은 어른마저 유혹하고 있으니 입장 전부터 그 캐릭터가 담긴 물건들을 사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 그런데 아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들으려고 들은 것이 아닌데 그냥 들릴 만큼 목소리가 컸다. “물건을 한꺼번에 살 때와 나눠 살 때 어느 게 더 이익이냐?” 아이에게 경우의 수를 들어가며 알 듯 모를 듯 한 이야기를 퀴즈식으로 되물었다. 언뜻 들어서는 너무나 자상한 아버지의 말투였지만 솔직히 내게는 듣기가 좀 거북한 이야기였다. 마치 MBA출신이거나 회계사인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지나치게 효율적 구매와 계산을 강조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굳이 지브리 스튜디오에까지 와서 입장을 기다리는 시간에 아이에게 꼭 그런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물론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가 적어지는 마당에 아이들과 함께 일본까지 날아와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관람하게 해줄 만큼 교육에 지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는 부모임에 틀림없어 보였지만, 정작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시종일관 효율성과 계산적인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기(지브리)는 어쩌면 반(反) 효율성의 극치인 곳입니다. 그리고 계산적 생각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곳이지요.” 하고 말이다.
#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남들이 컴퓨터와 디지털의 세계로 휩쓸려 갈 때에도 고집스럽게 손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수백 가지 안료를 섞어 채색을 하면서 수많은 원화를 그렸다. 게다가 그것들에 일일이 움직임과 생동력을 부여하는 2D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정말이지 반(反)효율의 극치요, 효율이라는 단어와는 참으로 거리가 있는 일을 평생에 걸쳐 해온 셈이다. 하지만 거기엔 그가 생각하고 꿈꿔 온 ‘가치’가 있었기에 그 어떤 다른 계산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덕분에 지브리 스튜디오는 디지털로 뒤덮인 세상에서 아날로그의 전설로 남아 세상에 다시 없는 콘텐츠를 고집스럽게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지브리 스튜디오는 세계와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혼과 혼을 잇는 결코 녹슬지 않을 가치생산의 본거지요, 그루터기로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된 것이리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전설의 산실이라고 할만한 지브리 스튜디오가 사실상 문을 닫는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이제 더 이상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새로운 2D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하기 어려워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설의 산실인 지브리 스튜디오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또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브리가 던져준 ‘혼(魂)의 교감(交感)’이 저마다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가치의 세계는 단지 전설 속의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며 사람과 세상, 사람과 사람을 잇고 혼과 혼을 잇는 의미 있는 매개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가치산출의 본거지를 직접 보겠다고 비싼 비행기표를 사 도쿄 외곽에 소재한 지브리 스튜디오까지 애써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브리 스튜디오를 들어가려면 사전에 시간약속을 하고 그 정해진 시간에만 제한적으로 입장이 허용되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과정을 거쳐야 함에도 이 많은 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아침부터 장사진을 이룬 것을 보면 그 가치의 유혹이 실로 대단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런 상념에 젖은 나는 뒤로 돌아서 그 아이들에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곳을 즐겨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내가 초면인 남의 가족과 아이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간다고 다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정신, 그 근원, 그 뿌리에 닿아보려는 애정 어린 시선과 주의 깊은 노력이 더 필요한 것이다.
# 요즘 유행처럼 미술관, 박물관을 순례하는 여행이 적잖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대목이 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우르르 몰려다니며 설명 듣는다고 문화예술적 안목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궁을 방문했을 때다. 그 곳에는 클림트의 그 유명한 작품 ‘키스’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작품 앞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여 제대로 작품을 감상하기 힘들다. 특히 패키지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것이 일반화되다 보니 더욱 그렇다.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단체도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된다. 나도 슬쩍 끼어서 귀동냥으로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봤다. 하나같이 이 그림이 이 궁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 오스트리아 최고 국보라는 것을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한다. 하지만 온갖 확인되지 않은 에피소드가 마치 정설인 양 이야기될 뿐 정작 그 그림이 그려질 때의 클림트의 상태나 그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없다. 말의 성찬 속에 정작 작품은 실종되어 버리고 만 셈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들은 비단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흔히 목격되는 일이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1~2분 가이드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듣고 정작 작품과의 교감은 생략된 채 또 다른 이름난 작품 앞으로 쉼 없이 이동하여 눈도장 찍듯 진행되는 미술관 순례, 박물관 탐방에 대해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서점을 찾아가 그림도판을 찬찬히 살펴보는 편이 낫다고!
# 우리가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는 이유는 단지 눈으로 보기 위함이 아니다. 미술사적 지식을 확인하기 위함만도 아니다. 진정한 이유는 교감하기 위해서다. 만든 이의 혼과 정신을 만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눈도장 찍듯 하는 것으로는 그런 교감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니 작품을 대하는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빈 분리파의 성전으로 불리는 제체시온에 가면 클림트의 또 다른 작품 ‘베토벤 프리즈’가 있다. 제체시온은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전후에 다시 복원했다. 베토벤 프리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복원작품에는 여전히 구스타프 클림트의 혼이 전승돼 흐른다. 그것을 느끼려면 제체시온의 지하전시실로 가야 한다. 그 전시실에서는 오로지 침묵만이 흐른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중앙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앉아 벽면을 둘러싸고 그려져 있는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를 하나하나 곱씹어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벨베데레 상궁의 ‘키스’ 앞에서의 패키지 여행그룹의 소란한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된다.
# 예술공부 한답시고 우르르 몰려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술관, 박물관 순례한답시고 눈도장 찍듯 바쁘게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작품이라도 제대로 느껴보도록 해보면 어떨까. 그러려면 혼자 조용히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자. 그리고 그 곳에 작은 화첩을 들고 가서 누군가의 작품을 나의 손으로 직접 모사해보며 그 작품에 담긴 혼과 일대일로 마주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 때 비로소 그 작품 속에 담긴 혼의 가치와 만날 수 있고 또 하나의 세계가 열리지 않겠는가.
- 정진홍 _ 글
- 컨텐츠 크리에이터, GIST다산특훈교수,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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