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초 진흥원으로부터 택배로 책을 받았다. 문화예술교육기관들의 여러 가지 교육사례를 묶은 책이다. 진흥원의 자료실을 보면 짧은 문화예술교육정책 사업기간에 비해 엄청난 양을 축적하고 있어 언제 다 읽어보나 싶은 부담감이 밀려온다. 물론 모든 강사가 이 모든 자료를 스터디 하지 않는다고 해서 수업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철학과 방법론이 분명하거나 ‘몸’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프로그램 사례집을 볼 때 예술은 무엇인가, 왜 예술이 교육되어야 하는가, 예술의 어떠한 점이 교육에 효용성이 있다는 것인가.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등의 질문을 하게 된다.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관찰과 조사’
우리의 문화정책은 주로 정책연구를 통해 사업계획(general)을 세우고 방향과 기준을 설계한 후 공모를 통해 개별 사업(specific)을 선정하여, 실행한 후 가설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연역적 방법을 많이 쓴다. 탁월한 전문가들과 명석한 행정가들이 멀리 앞을 내다보고 설계한 문화예술교육정책 덕분에 현재 우리의 문화예술교육 인프라는 놀라울 정도로 확장되고 발전하였다. 하지만 일관되고 추진력 있는 프로젝트 진행으로 단기간에 큰 효과를 도출할 수 있는 장점에도 이러한 탑다운 방식은 문화예술 생태계에 인위적으로 개입하고 왜곡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많은 작가와 기획자들은 재정적인 이유로 공모에 대한 유혹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시범사업들이 일몰제에 의해 끝나고 나면 조직과 인력들은 발전적인 비전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뿔뿔이 흩어지거나 다른 정책사업을 찾아 헤매기 일쑤다. 이는 지속성의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문제다.
정교하게 설계된 정책이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창의적 아이디어를 수렴하고 이를 통한 지속적 재생산을 담보할 순 없을까? 2007년도 인터뷰에서 독일 베를린의 문화부 장관은 ‘베를린 자체가 가진 매력과 끊임없이 예술가와 예술을 끌어들이는 것이 문화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문화부는 이러한 문화적인 힘들을 적절하게 지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또 지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관찰’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쩌면 모든 원리는 같다. 예술가이든 문화기획자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관찰과 조사이다. 실제로 베를린시 문화부 주력 업무는 베를린시에서 활동하는 모든 문화예술, 교육, 예술가 등의 데이터베이스로 매트릭스를 그리는 일이었다. 또한 모든 학교는 문화예술 교육 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문화부의 자료는 이들이 동시대 예술가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교육의 질을 관리하며 넘치거나 부족한 부분을 조정하고 지원하는 기본 자료가 된다. 미리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상황을 관찰하고 필요한 곳을 찾아내겠다는 태도이다. 예술과 교육에 대한 전사회적인 공감과 잠재적 힘에 대한 확신이 있고, 개별성을 인정할 때, 다양성이 확보된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개별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가장 기본이라는 믿음과 동시에 여유로움을 갖는 자세는 부러울 수밖에 없다.
꿈꿀 수 있는 틈새
예술가들은 매력적인 장이 펼쳐지면 스스로 모여들게 되어 있다. 존 케이지의 캠프에 백남준, 요셉보이스와 같은 당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플럭서스와 같은 새로운 운동이 생겼다. 누가 일부러 만들지 않더라도 여건을 주면 교육도 예술도 스스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창발이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란, 스스로 발전하는 영구운동 기계를 만들려는 돈키호테의 도전과 같다.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동인을 발굴하고 끊임없이 폭발함으로써 스스로 활성화하고 재생산하는 시스템은 이론적으로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예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의 원리를 사례집에서 찾으려던 나의 노력은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의 문화예술교육정책은 아직은 불확실하지만 상상 속에서 가능해 보이는 어떤 것을 위해 장을 열었기 때문에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미래에는 더 낯선 것들이 밀려올 것이다. 우리는 용감한 정책으로 문화예술교육의 터전 위에서 판을 벌였던 예술가와 강사들, 기관이 어떠한 매트릭스를 그렸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방향을 체크하고 놀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꿈꾸는 사람들이 꼬이는 틈새를 마련하기를 기대해 본다.
글_aec비빗펌 대표 윤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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