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전 KBS 1TV의 ‘한국 한국인’이라는 방송에 출연했다. 사전 녹화에 앞서 방송작가가 이런저런 사진자료를 요청한 탓에 오래 전에 찍은 사진들을 들춰보았다. 그 때 우연히 발견한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다름 아닌 나와 내 딸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며 환호하는 모습이었다. 사진에 찍힌 시간을 유추해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면서 나도 모르게 지긋한 웃음이 입가에 배어 나왔다.
# 여러 해 전 일이다.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 발굴 작업이 재개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 나는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딸아이를 데리고 곧장 중국 시안(西安)으로 날아갔다. 내 딴에는 어린 딸에게 병마용의 위용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안에 가기 앞서 진시황이 누구이며 그가 왜 병마용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는지를 어린 딸에게 사진까지 보여가며 열심히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초등학교 1학년 어린 딸이 그 모든 이야기를 알아들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 어쨌든 아빠인 나로서는 딸아이에게 얼굴 모양, 갑옷 형태, 들고 있는 무기 등이 모두 다른 병마용의 가장 큰 가치는 다름 아닌 그 각각의 ‘차이’에서 발원한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싶었다. 모두 한 틀에서 찍어 낸 듯 똑같았다면 그 위용이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결코 경이롭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세계 8대 불가사의에 속한다는 진시황의 병마용 앞에 선 어린 딸아이의 시선은 그리 경이로워 하지도 감탄하지도 않았다. 정작 아이의 눈에는 그저 흙으로 만든 커다란 장난감들의 집합처럼 보였던 것인지 모른다.
# 그렇다고 만사 제쳐놓고 중국 시안까지 날아간 것이 몽땅 허사는 아니었다. 13개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반복했던 시안 곧 옛 장안(長安)은 특히 중국이 가장 강성했던 한당성세(漢唐盛世) 시절의 수도였다. 그 오래된 수도 장안의 한 복판에는 명 태조 주원장이 다시 쌓았다는 장안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명의 도읍은 장안이 아니라 연경 곧 베이징이다!) 나와 어린 딸아이는 높이가 12m나 되는 성곽 위에 폭 12~14m의 벽돌로 포장된 길이 직사각형 형태로 총 13.7㎞나 깔려 있는 장안성곽 위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다.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영화 이티(E.T.)의 장면이 떠오를 만큼, 장안성곽 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만큼 멋진 경험이었다.
# 당시 키가 내 허리에 겨우 닿을까 말까 했던 어린 딸은 2인용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아 페달을 밟으려고 까치발을 들며 애를 썼다. 시안이 대륙의 분지인 탓에 30도가 훌쩍 넘는 더위 속에서 딸 아이는 페달에 닿지 않는 다리를 내쳐 뻗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었다. 하지만 결국 발이 닿질 않았다. 그것 때문에 풀이 죽어 의기소침해진 딸아이의 몫까지 대신해 내가 페달을 밟아 장안성곽 위를 질주하듯 내달리자 딸 아이는 어느새 우울한 얼굴빛을 던져버리고 대신 활짝 웃으며 마주하는 바람결에 환호를 내질렀다. 아마도 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얼마 전 내가 다시 보게 된 바로 그 순간의 스냅사진이었으리라.
# 그 어린 딸이 이제는 제법 성숙해져 발레리나의 꿈을 안고 산다. 어쩌면 그 때 페달에 발이 닿지 않아 속상했던 것에 복수(?)라도 하듯 어린 딸은 다리를 곧게 내뻗으며 발끝을 세워 점프하며 자기만의 하늘을 또 다시 날고 있다. 어린 시절의 뜻밖의 체험과 경험은 소중하다. 특히 가장 가까운 이와 더불어 하는 그것은 더욱 그렇다. 내 딸 아이에게 어릴 적 시안으로의 여행에서 비록 진시황의 병마용은 어슴푸레한 기억 저편에 있을지 모르나 장안성곽 위를 아빠와 더불어 자전거를 타고 날 듯이 내달렸던 기억만큼은 스스로 자기 안의 신나는 예술적 감성과 영혼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 어릴적 그리 밝게 웃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던 어린 딸이 그 날 그 순간만큼은 더없이 해맑고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어쩌면 그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느낌으로 아버지와 함께 탔던 자전거의 기억, 아니 그 추억이 그 아이로 하여금 삶에는 어려움 가운데도 희열이 있고 기대치 않게 찾아오는 남모를 기쁨도 있다는 것을 일깨우게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딸 아이는 어렵게 땀 흘리며 피나는 훈련 끝에 무대에 서면서도 아버지인 내가 봐도 놀랍도록 자기 속이 웃는 표정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바로 그 때가 내 딸의 가장 행복한 때임을 확신하게 만든다. 자전거 페달에 발이 닿질 않아 아빠의 등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장안성곽 위를 날아가듯 함께 내달리던 꼬마 아이가 내질렀던 환호와 웃음을 나는 이제 조금은 성숙해져 가는 딸 아이의 토슈즈를 신은 채 발끝으로 선 발레무대에서 다시금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 아이들은 방학을 했고, 어른들은 휴가를 떠나는 이즈음에 가장 가까운 가족과 함께 하는 경험은 한 아이의 삶에 어떤 형식으로든 녹아 내리기 마련이다. 함께 미술관을 가서 작품 앞에 서보는 경험, 함께 음악회에 가서 오케스트라연주를 듣는 경험뿐만 아니라 함께 물놀이를 하고, 함께 등산을 하며,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함께 캠핑을 하며 별자리를 헤아려 보는 경험 등 가족 혹은 가장 가까운 이와 함께 하는 경험이 남기는 것은 한 장의 스냅 사진만이 아니다. 그 순간 순간에 한 아이의 세계를 놀랍게 구성하고 그 아이의 미래의 인생퍼즐을 신기하리만큼 맞춰가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사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예술적 감성을 자신의 삶 속에서 발현시키도록 쉼 없이 요구 받는다. 적어도 삶이 메마르지 않고 윤기 있게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안의 예술적 감성과 감동은 늘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살아 작동하려면 그 어떤 경험과 체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들이 다름아닌 어린 시절, 가장 가까이 있던 이들과의 교감이다. 아빠와 엄마와 또 다른 형제자매들과 어울리며 놀고 즐기며 얻게 되는 그 순간순간의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그 때의 한 장의 빛 바랜 스냅 사진과 같은 기억들이 결국은 우리 안의 예술적 감성을 일깨우며 우리의 인생을 빚고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글쓴이_정진홍
컨텐츠 크리에이터, GIST다산특훈교수,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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