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교육가마다 현장에서 반복해서 마주치는 난감한 상대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침묵일 수도, “발표하기 싫어요”라는 한마디일 수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빈 종이’가 그렇다.
나는 ‘술래’라는 이름으로 랩을 활용한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청소년과 만나지만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과 함께한다. 학교 안 교실부터 도서관, 문화공간, 동네 구석구석까지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랩을 만든다. 참여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사로 만들고 비트 위에서 랩으로 표현한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랩을 얼마나 잘하는가보다 자기 이야기를 발견하고 자기 목소리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가사는 쓰고, 랩은 달다.’ 오래전 내 가사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가사를 쓰는 과정은 어렵지만, 그 가사가 비트 위에서 랩이 되는 순간은 즐겁다. 문제는 랩을 하기 전에 가사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안 나요.”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간을 조금 주고 돌아다니다 보면 빈 종이가 여기저기 보인다. 안 쓴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뒷장에 쓴 거예요?” 하고 물어본다. 종이를 뒤집어보지만 역시 비어 있다. 예전에는 이런 순간에 가끔 당황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빈 종이 앞에서 고민하는 참여자가 한둘이 아니다. 나 역시 그 막막함을 잘 안다.
“지금 보니까 아직 종이가 비어 있거나 한두 줄 정도 쓰신 분들이 많네요. 비트 잠깐 줄여드릴게요. 자리를 옮기셔도 좋아요.”
계속 쓰라고 재촉하는 대신 다른 시작을 찾아본다. 빈 종이에 랩 네임(래퍼 이름)이나 필명, 작가명처럼 내가 만든 이름을 적어보기도 한다. 어떤 이름을 붙일지 고민하는 것부터 ‘나’를 생각하는 시작이 된다. 종이 한쪽에 낙서나 그림이 있다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세요? 이건 뭐예요?” 하고 묻는다. 낙서 하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비유하기’도 자주 한다. “나를 한 글자로 표현해 볼까요?” 학교에서 제법 자주 나오는 답이 ‘돌’이다. “왜 돌이에요?” 하고 물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두 글자는 ‘바위’, 세 글자는 ‘돌멩이’가 되기도 한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지만, ‘돌’이라는 한 글자로 이미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가끔 ‘똥’처럼 엉뚱한 단어가 나오기도 한다. 나는 이런 단어도 반갑다. 왜 그 단어를 썼는지 묻다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렇게 참여자들의 가사에서 똥은 어느새 거름이 되어 있다. 때로는 단어를 찾아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단어로 나, 우리, 동네를 표현한다. 가끔은 서로 연관 없는 단어들을 연결해 엉뚱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나는 종이에 남은 흔적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지우개를 쓰지 않게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나 문장은 지우는 대신 쭉쭉 줄을 긋는다. 버린 단어가 나중에 단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생각을 거쳐 지금의 문장에 도착했는지도 볼 수 있다. 완성된 가사만 보면 결과가 보이지만, 종이에는 그 과정까지 남는다.
그래도 시작이 어렵다면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한 줄을 함께 써본다. “방금 그 이야기 좋은데요? 한번 써볼까요?” 한 줄을 쓰고 그 자리에서 비트에 맞춰 내가 랩으로 불러본다. 조금 전까지 말로 나누던 이야기가 비트 위에 올라가자 다르게 들린다. ‘내 이야기도 랩이 되는구나.’ 한 줄이 두 줄이 되고 빈 종이가 조금씩 채워진다.
반대로 가사를 제법 술술 써 내려가는 참여자도 있다. 옆에 앉아 함께 읽어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래퍼의 가사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어 붙인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어요?” 하고 물으면 “아뇨. 실제로 그런 건 아니고요.”라고 답한다. “그럼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은 있어요?”라고 다시 물으면 “저는 오히려…….”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질문하고 답하는 사이 ‘이건 진짜 내 이야기는 아니구나’ 하고 스스로 알아차리는 순간이 생긴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꺼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둘 나온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나 다른 노래의 가사를 빌리지 않아도, 내 이야기로 충분히 좋은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걸 발견한다.
“술래! 저 종이 한 장 더 주세요.”
때로는 지금까지 쓴 가사를 아예 갈아엎고 다시 시작한다. 남의 이야기 같던 가사 대신 자기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진 것이다. 녹음하고 완성된 곡까지 함께 들어보려면 나도 시계를 보게 된다. 그렇다고 꼭 음원을 완성해야만 결과물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기 이야기를 담은 가사 한 편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빈 종이와 맞선다는 건 어떻게든 종이를 가득 채우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작은 흔적에 관심을 보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참여자는 자기 안에 이미 있던 이야기를 발견하고 나는 그 발견을 함께 따라간다.
처음에는 내가 빈 종이를 건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누군가 먼저 빈 종이를 가지러 온다.
- ✍ “아무 생각 안 나요”에서 첫 문장을 꺼내는 법
- 1. 이름부터 쓰면 일단 빈 종이는 아니다.
- 랩 네임(래퍼 이름)이나 필명, 작가명을 만들어본다. 이름을 고민하는 것부터 ‘나’를 생각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
- 2. 낙서와 그림에도 말을 걸어본다.
- “이게 뭐예요?” “왜 그렸어요?” 작은 질문에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 3. 엉뚱한 단어도 일단 환영한다.
- 엉뚱한 단어도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서로 연관 없는 단어들을 연결하다 보면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 4. 지우개는 잠시 넣어둔다.
-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나 문장은 지우지 않고 줄을 그어본다. 버린 생각도 창작의 과정이다.
- 5. 남의 이야기에서 내 이야기를 찾아본다.
- 명언이나 노래 가사의 일부를 비우고 자신의 단어나 경험으로 채워본다. 남의 이야기로 시작해도 도착지는 내 이야기가 된다.
- 6. 쉬는 시간에도 귀는 열어둔다.
- 쉬는 시간의 수다에는 의외로 이야깃거리가 많다. 잘 기억해 뒀다가 가사를 쓸 때 슬쩍 꺼내본다. “아무 생각 안 나요.”라던 사람도 할 말이 있었다.
- 7. 쓰라고 하지 않고 쉬라고 한다.
- 자리를 옮기거나 주변을 둘러본다. 멈추는 것도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 술래(김용래)
- 래퍼이자 문화예술교육가. 2011년부터 랩을 활용한 문화예술교육을 이어오고 있다. 어린이부터 청소년, 성인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음악과 글쓰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작업을 한다. 유스보이스 미디어교육자와 길 위의 인문학 강사 등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학교와 도서관, 지역의 문화공간 등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 rocha@hanmail.net
인스타그램 @soolaekim
페이스북 @kim.soolae - 사진제공_술래 래퍼·예술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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